◈ 제 121화
121화 펜은 총보다 강하다(2)
“대체 우리가 어떻게 하라는 거야?”
“그러게 말이야. 손발이 맞아야 일을 해먹지! 쳇!”
“전 세계에 문제없이 팔리고 있는 마당에 우리만 금지시키면 누가 납득을 하나? 더욱이 일본어 번역판이 바마존에서 버젓이 팔리고 있단 말이야.”
“됐어. 그만하고 어서 단체들에 연락이나 넣자고!”
“그래.”
일본 정부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먼저 소설 <흑야>에 대해 출판 금지 조치를 내렸고 시중에 풀린 책 중에 이미 판매가 된 책을 제외하곤 모두 회수 조치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주요국의 법원에 소설 <흑야>에 대한 판매 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그 어느 법정도 일본 정부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일본 정부의 대단한 로비 실력도 이번만큼은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적어도 일본과 가까운 몇 개국에서는 일본의 편을 들어줄 것으로 예상했는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모두 외면하고 말았고 설상가상 일본 내의 반응도 심상치 않았다.
-J, A, P, A, N, P, A, S, S, I, N, G
-J, A, P, A, N, I, S, O, L, A, T, I, O, N
양심 있는 일본인들이 정부 청사 앞에 모여 기습적인 시위를 가졌기 때문이다.
이들은 일본 소외와 일본 고립이라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나와 일본 정부의 진정성 있는 사과를 요구했다.
-팍, 팍, 파파팍!
기자들의 플래시가 일제히 터지기 시작한다.
상황이 점점 더 악화되자 일본 정부의 보이지 않는 지원 아래 우익 단체와 언론들이 이태리 작가에 대한 망언을 퍼붓기 시작했다.
생각이 있는 지성인이라면 모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망언들이었지만 일본 정부의 보이지 않는 적극적 지원 아래, 혐한 시위대가 앞장섰다.
“일본의 도움이 없었다면 한강의 기적도 없었다.”
“이미 불가역적 합의가 끝났다.”
“위안부는 없었다. 돈을 벌기 위한 여자들의 자발적인 행위였다.”
“이태리 작가는 당장 사죄하라.”
“한일합방은 우매한 조선인을 교육시키기 위한 조치였고 위안부는 그런 일본에게 은혜를 갚기 위한 조선인들의 자발적인 행동이었다.”
“대일본 제국은 영원하다.”
“소설 <흑야>는 거짓투성이다.”
혐한이라는 동일한 목적을 가진 덕에 사람들의 연설이 이어질수록 시위대는 박수를 보내며 크게 환호했다.
“옳소! 한국은 일본의 은혜를 절대로 잊어선 안 됩니다.”
“맞아요.”
“위안부는 없었습니다. 있었다면 돈을 벌기 위해 몸을 판 창녀들이 있었겠죠.”
“옳소~~ 옳소.”
사진을 찍으면서 열심히 현장을 취재하던 산케이 신문 기자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선배님. 이건 좀 아니지 않나요?”
“히로시. 됐어. 까라면 까.”
“그, 그래도…….”
“야! 인마. 우리 같은 말단 기자들이 무슨 힘이 있어. 잘리고 싶지 않으면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해.”
“……네. 선배님.”
히로시는 선배의 꾸짖음에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와 같은 시각,
수많은 기자들이 한국 땅을 밟았다.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세계 각국의 비상한 관심이 결국 그들을 대한민국으로 인도한 것이다.
그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CMN, ACB, FEX, BCC, Media1, Tele2, COTV, GER1 등을 비롯해 카타르의 민영 방송사 알자지라(Al Jazeera)의 모습도 보였다.
-보세요. 이게 일본군이 제 몸에 새겨놓은 칼자국과 낙서예요. 내 몸엔 이런 흉터들이 수도 없이 있답니다. 이 흉터들을 볼 때마다 그 날의 지옥 같은 고통이 되살아나요.(김*순 할머니)
-돈을 원하지 않아요. 우리가 원하는 건 일본의 진정한 사과입니다.(황*주 할머니)
-저것 보세요. 일본 정부는 위안부의 존재에 대해 여전히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의 탈을 쓰고 어찌 저럴 수 있을까요! (조*희 할머니)
-증거요? 제가 바로 증거예요.(김*실 할머니)
일부 기자들은 할머니들의 증언에 눈을 질끈 감기도 했다.
한편 세계인의 관심이 집중되는 가운데 여의도와 광화문 일대에서도 사과하지 않는 일본 정부를 규탄하는 집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폭력이 100% 배제된 평화로운 집회에 다수의 국민들이 참여했는데, 주말이 되면 마치 나들이를 온 가족이 손을 잡고 집회에 참여하는 모습이 보였다.
[한국의 위안부 집회 –영국 BCC]
[아름다운 시위, 평화로운 집회 –미국 CMN]
[놀라운 광경, 놀라운 시민 의식 –독일 GER1]
며칠 후,
각국 기자들의 지속된 요청에 소설 <흑야>를 집필한 이태리 작가가 공식 기자회견을 갖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즉각적으로 뜨거운 이슈가 되었다.
기지 회견 장소는 김포 공항에서 가까운 모비딕 호텔 그랜드볼룸으로 정해졌고 회견 방식은 사람들의 엄청난 관심에 비례해 생중계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재미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어쩌면 단순한 기자회견으로 끝날 수 있었는데, 일본 기자들로 인해 다시 한 번 논란을 증폭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
“미요우리의 히데키 기자입니다. 일본군을 아주 나쁘게 매도했는데, 당신이 직접 본 사실인가요?”
“직접 본 분들께 매우 자세히 들었습니다만, 기자님은 혹시 <흑야>를 읽어 보셨나요?”
“아뇨.”
“그럼 한번 읽어보세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겁니다.”
“…….”
또 다른 일본인 기자의 질문이 이어졌다.
“마쓰이 기자입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이미 완전한 합의를 이룬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지금은 동북아의 평화를 논의해야 할 시점인데 뜬금없이 위안부 얘기를 꺼낸 저의가 무엇입니까?”
“기자님이 직접 본 사실인가요?”
“네?”
“고인이 되신 박정희 대통령님께 직접 확인하신 것인가, 묻는 겁니다.”
“그, 그건……!!”
그는 앞서 던진 동료의 질문으로 인해 선우의 반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사아히 신문의 오노 기자입니다. 항간에 김옥분 할머니의 일기가 조작되었다는 말이 있는데요.”
“네, 말일 뿐입니다.”
“아, 아니요. 작가님. 제 질문이 그게 아니라…….”
일본 기자들의 해괴한 질문과 그들만의 답변이 계속되자 모두들 불쾌해했다.
기본도 안 되는 질문을 던지면서 대체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주간 일본의 노무라 기자입니다. 작가님께서는 일본의 금서 조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위법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네. 출판의 자유를 침해한 부분이 있지요. 하지만 전 일본 정부의 행태가 옳다고 봅니다. 일반적인 법으로 이번 사건을 판단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더욱이 위안부에 대한 객관적인 증거가 부족합니다.”
“생존자들은 지금 일본 정부를 상대로 거액을 받아내려는 속셈입니다.”
“위안부는 없었습니다. 유독 한국만 주장하는 거짓입니다.”
지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고 한다.
아무래도 선우의 대답을 끝까지 들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선우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그려지는 것이 아닌가?
다음 순간 선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안부가 없었다고 하셨나요?”
“네.”
“한국만 주장하는 거짓이라고요?”
“네!!”
선우는 환하게 웃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여러분들에게 소개시켜 드려야겠네요.”
선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푸른 눈을 가진 할머니 한 분이 단상 앞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로 끌려간…….”
-웅성웅성!!
“헉!!”
“이, 이런!!”
“특종이야. 어서 사진 찍어!!”
위안부로 끌려갔다고 고백하는 백인 할머니의 출현에 기자회견장이 뒤집어졌다.
“하루에 20명, 많게는 40명의 일본군을 상대해야 했어요. 놈들은 작은 칼로 내 몸을 조금씩 찌르고 콘돔을 쓰지 않은 채 달려들곤 했지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해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지만 백인 여성이라는 이유로 더욱 특별한 감시를 받았죠.”
사람들은 할머니의 고백에 충격에 빠졌는데, 그 충격의 여파가 가시지도 않은 상황에서 또 다른 푸른 눈의 여성이 단 위로 올라왔다.
“안녕하세요. 전 네덜란드 식민 지배하의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난 얀…….”
두 번째 백인 위안부의 등장이다.
“……젠장!!”
한 명이면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거나 딴지를 걸어 보겠는데, 두 명이라니!! 극우 성향 일본인 기자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악몽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저와 함께 끌려온 소녀들은 무려 3년 반 동안 그들의 정액받이 노릇을 했지요.”
“What?!!”
“Mamma Mia!!”
“Oh My God.”
-웅성웅성!!
기자회견의 여파는 대단했다.
백인 여성들의 위안부 발언은 서방 세계의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왔다. 한편 이날 방송을 지켜본 민주당 의원 5명과 공화당 의원 2명은 일본군의 위안부 동원을 비난하고 일본 총리의 공식 사죄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마련해 의회에 제출했다.
그리하여 미국 하원의 주도로 청문회가 열리게 되었다.
의회 소식통에 따르면,
“청문회에서 일본군의 만행 실태가 폭로되고 일본 정부의 사죄 해명이 거짓임이 드러남에 따라 향후 결의안 통과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주미 일본 대사는,
“일본은 이미 위안부 문제에 대해 책임을 인정했고 한국과 필리핀, 대만, 인도네시아 등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보상도 했다.”며 결의안 통과를 저지할 뜻을 분명히 했다.
그날 밤,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의 사죄를 촉구하는 결의안이 미국 하원에 제출되자 일본 정부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미국을 방문할 예정인 일본 총리는 홍보 담당 보좌관을 현지에 급파했는데, 결의안 채택 저지를 위한 움직임으로 보입니다. 지금까지 보도에 도쿄 이정민 특파원입니다.
-미국 하원이 청문회까지 개최하자 일본 정부가 바짝 경계하고 있습니다. 96년 이후 몇 번이나 미 하원에 제출된 위안부 결의안이 폐기되었지만 이번에는 분위기가 다르다는 판단입니다. 소설 <흑야>로 인해 전 세계인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일본 정부의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응원합니다. 지금까지 보도에 워싱턴 최동민 특파원입니다.
네덜란드 소재 일본 대사관 건물 앞,
처음에는 그저 한두 명의 시위자가 모여 팻말을 들고 일본을 비판하는 구호를 외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대규모의 군중들이 몰려들었다.
“칙쇼!!”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얀 할머니의 인터뷰를 시청한 네덜란드인들이 소설 <흑야>를 읽고 분노를 토해낸 것이다.
유혈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지만 위협을 느낀 일본 대사관 측은 즉시 경비 충원을 요청하였고 혹시 모를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네덜란드 정부는 수백 명의 경찰 병력을 대사관 주변에 배치하였다.
몇 달 후,
일본의 전 방위적인 로비에도 불구하고 위안부 결의안이 마침내 미국 하원을 통과하고 말았다.
위안부 문제를 단순한 과거사가 아닌 인류 보편적 가치라 할 수 있는 여성 인권 문제로 전환하는 동시에 20세기 최대의 인신매매라고 규정했다.
-탕탕탕!!!
결의안이 통과하자 사람들은 일제히 박수를 치기 시작했고 곧이어 기자들의 플래시가 정신없이 터져 나왔다.
방송사의 카메라맨들은 좀 더 화면을 클로즈업하기 위해서 난리를 치고 있었다.
이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