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19화
119화 소설 흑야(黑夜)
-12세 이후로 가족에 대한 기억은 아무것도 없다.
있다면 일본군의 지독한 시달림뿐이다.
선우는 김옥분 할머니가 그에게 남긴 일기를 몇 번이나 읽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것은 그의 이성을 단번에 마비시키는 차가움이었다.
-일본이 위대한지 모르면 죽여 네년의 간을 꺼내 먹겠다.
-칙쇼! 제기랄! XX가 들어가지 않잖아.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힘이 없는 여자라도 죽였다. 또한 위안부로 끌려온 여인들이 임신을 하면 약물을 주사하거나 XX을…… 다시는 임신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악마 같은 놈들이네…….”
일본군의 행태에 솜털이 곤두서는 듯한 잔인함이 느껴졌다.
이것은 과거 그가 판타지 세계에서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흑마법사였지만 적어도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켰기 때문에 더욱 크게 다가왔다.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다.
-바라는 건 없었다. 난 그저 조용히 살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녀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위로해 주진 못할망정 위안부로 끌려간 년이라며 손가락질하고 그녀를 모욕했다.
그녀는 결국 모두가 잠든 밤,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이름을 바꾸고 신분을 숨긴 채 돈을 모았다.
사내들 틈바구니에서 여인의 몸으로 장사를 해야 하니, 자연스럽게 거친 욕설이 그녀의 입에 달렸다.
-욕을 달고 사는 욕쟁이 할머니.
-항상 불만을 토해내는 불만쟁이 할머니.
-그로 인해 동네 주민들이 가장 기피하는 꼰대 노인이 된 할머니.
하지만…….
-정체를 감춘 건물주로 힘든 사람들을 도와주는 할머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손길을 내미는 할머니.
-위안부와 관련된 소식이 뉴스에 나올 때마다 남몰래 울부짖는 할머니.
선우는 할머니가 남긴 마지막 한 글자까지 집중해서 읽고 또 읽었다.
-탁!
“…….”
선우는 깊게 고민했다.
위안부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와 소설의 주를 이루게 될 어두운 내용 때문이다.
그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이 어둡고 칙칙한 내용의 소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선우는 자기 자신부터 위안부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기로 했다.
그는 로베르토 베르다니의 영화 <인생은 정말로 아름다워>와 같은 느낌을 주고 싶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생이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바다에 아픔, 슬픔, 고통, 설움이라는 물고기들이 살아가는 것이다. 바다는 모든 것을 포용한다.
선우의 머릿속에서 수백, 수천 아니 수만 개의 단어가 마치 양자물리학의 불확정성의 입자처럼 난리법석을 피우다가 어느 순간 그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설 흑야]
주인공은 83세 할머니다.
그녀는 평생을 욕쟁이로 그리고 외톨이로 살았다.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녀는 그녀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
12세 소녀에서 이제는 83세의 노파가 되었지만 여전히 악몽을 꾼다.
꿈속에서 본 자신의 모습은 어둠 속에서 울고 있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다.
그녀에게 어둔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휴우!”
소설의 큰 줄기가 완성되었다.
1940년을 배경으로 시작해 현재에 이르기까지, 김옥분 할머니의 트릴로지(trilogy)가 윤곽을 드러낸 것이다.
선우는 할머니의 스토리에 시대를 관통하는 한국사를 자연스럽게 녹여 내렸다.
-고향에 돌아온 옥분이는 야반도주를 택하지만 고통, 절망, 슬픔 등을 동반하지 않았다. 그녀는 세상을 이리저리 유영하는, 마치 방랑자 같은 모습을 보였다.
-방황이란 괴로움의 짐을 지고 슬픔의 쇠사슬을 발에 끌며…….
-세상을 향한 원망은 분노를 낳고 분노는 폭력을 잉태하며 스스로를 파멸시킨다.
-상처가 있는 곳에 위로와 아픔이 있는 곳에 용서를.
-나를 용서하는 것, 그것의 시작은 바로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
-마포대교의 노을빛 그리움을 심장에 새겨놓고 걸어야 하는 길.
-늙음에 기대어 늙음을 팔고 싶지 않습니다.
거친 욕을 입에 달고 살지만 마치 한 편의 시를 읊조리듯 독백하는 그녀의 모습은 독자들에게 전율을 선사했다.
선우는 총 80만 자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에서 20만 자를 통해 독자들을 웃게 했고 40만 자를 통해 독자들을 집중하게 만들었으며 마지막 20만 자를 통해 독자들을 울게 만들었다. 또한 과도한 욕설과 적나라한 성적 표현을 최대한 자제하는 동시에 기발한 전개와 번뜩이는 코드를 그 자리에 숨겨놓았는데, 이와 같은 점이 독자들의 상상력을 더욱 자극시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독자들을 울리게 만든 할머니의 마지막 말.
“얘들 참 재밌네. 이 녀석들아. 그만 울어. 아픈 것도 나고 상처 받은 것도 난데, 울긴 왜 울어?”
태연한 듯 태연하지 않은 그녀의 모습에 독자들은 또다시 참아왔던 눈물을 토해내야 했다.
“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한 두 시간이 지났다 싶었는데, 새벽 동창이 밝아왔다.
“응?!”
펜을 잡은 검지와 중지 안쪽에 시퍼런 멍이 들었다.
밤을 하얗게 새우는 동안 한 글자, 한 글자에 집중한 결과였다.
한편 선우는 소설 <흑야>와는 별도로 김옥분 할머니의 기록을 담은 일기를 별개의 책으로 만들어 출간을 준비했다. 그것은 나치 치하에서 생명을 잃은 안네 프랑크의 일기와 몹시 흡사했는데, 다른 것이 하나 있다면 사실로 판명된 일본군의 만행을 명시한 것이다.
객관적인 자료들을 글과 함께 묶었기 때문에 혹시 모를 논란의 불씨를 초장부터 없애버렸다.
보름 후,
규용은 선우가 탈고(脫稿)한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훌쩍, 훌쩍!
책을 읽으면서 많이 웃은 동시에 참 많이 울었다.
책의 초반에는 주인공 옥분의 천진함과 순수한 모습을 그리는데, 평범한 소녀의 모습과 소박한 삶이 참 재미있게 그려지고 있다.
행동 하나하나가 재밌고 마을 사람들 역시 자연스러웠다.
마치 그 시대에 살아본 사람 같았다.
소설은 12세 소녀 옥분과 35세 옥분이 그리고 80세 옥분의 시점에서 그려지고 있었는데,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었기에 충격과 공포, 일본군의 잔인함에 비분을 감출 수 없었다. 마음이 아프고 아렸다.
“하아……!!”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아들의 글이라는 것을 전적으로 배제하더라도 이건 그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는 글이었다.
웃음과 울음이 몰아치는 폭풍 속에서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벅찬 감동이 몰려왔다.
감히 단언컨대 소설 <흑야>는 이태리 작가의 대표작이자 시대를 대표하는 소설이 될 것이다.
규용은 진중한 얼굴로 수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초록별 출판사와 관계가 있는 해외 출판사들에 연락을 돌렸다.
돈이 문제가 아니다. 금전적 이익을 탐하기보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을 전 세계에 알리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이것이 선우가 바라는 것이기도 했다. 이태리 작가의 이름이라면 전 세계 동시 출간도 꿈이 아니었다.
“Hello~”
“Ciao. Io sono Choi. corea del Sud.”
“Hi~ I’m Kuyoung-Choi.”
“…….”
“…….”
한 달 후,
전 세계를 대상으로 이태리 작가의 트릴로지(trilogy) 3부작 <흑야>에 대한 대대적인 광고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 정부에서는 이태리 작가의 신작 소설이 위안부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소설 <흑야>가 모습을 내밀었다.
출간과 함께 대대적인 프로모션 역시 시작했고 말이다.
트릴로지 3부작을 한 번에 모두 구입하면 <흑야>의 번외편이라 할 수 있는 김옥분의 일기(The Diary of a Young Girl Okbun, Kim)를 무료로 증정한 것이다.
얼마나 기다렸던 이태리 작가의 소설인가!
펜실베이니아에 살고 있는 금발의 소녀 소시는 기대감을 잔뜩 품고 서점을 찾았다.
오전 시간대였는데도 사람들이 참 많았다.
“이게 이태리 작가님의 신작 소설인가요?”
“네~ 소설 <흑야>입니다.”
“3부작이네요.”
“네. 트릴로지 3부작이에요. 한꺼번에 구입하시면 번외편이라 할 수 있는 김옥분의 일기도 드려요. 지금 프로모션 기간이거든요.”
“프로모션은 언제까지 해요?”
“딱 일주일만 해요.”
“네~~”
한 권의 가격은 33.3$.
세 권을 모두 사면 99.9$다.
다행히 100$ 지폐를 챙겨온 덕에 소시는 세 권 모두 구입할 수 있었다.
“헤헷~ 어서 가서 읽어봐야지.”
소시는 김옥분의 일기마저 챙긴 후, 서둘러 발걸음을 집으로 향했다.
“꺌꺌꺌~~”
“호호호~”
“훌쩍, 훌쩍!”
“……?!!”
“큭큭큭!!”
“……어, 어떡해!!”
“으아앙!!!”
웃음과 울음을 한 바가지나 쏟아내고 말았다.
소시는 뭔가에 홀린 듯,
책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만나서 쇼핑하자는 친구의 전화도 거절했고 밥 먹으라는 엄마의 말에도 책 읽기를 멈추지 않았다.
-어둔 밤, 아직 아침은 오지 않았다.
가슴이 먹먹했다.
일본이 싫은 건 아니다.
그녀는 일본의 ‘망가’를 즐겨 봤고 사실 알게 모르게 일본의 문화를 동경해왔다.
하지만 소설 <흑야>를 읽고 이것이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소설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사과하지 않은 일본 정부에 대해 화가 났다.
이것은 누가 봐도 잘못된 일이었다.
가만히 있기엔 너무 분하고 억울했다.
같은 여자로서 김옥분 할머니의 인생이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쫙쫙! 쫘아-악!
“이게 독일의 하켄크로이츠와 같은 전범기였다니!!”
소시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욱일기가 그려진 티셔츠를 갈기갈기 찢는 일이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어.”
개인이, 그것도 외국인이 일본이라는 국가를 상대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래. 일단 사람들에게 알리자. 선생님이 그러셨잖아. 개인의 힘은 작지만 뭉치면 다르다고 말이야. 정 안되면 피켓이라도 들면 되지. 그래! 일단 그렇게 하는 거야. 그리고 불매 운동도 펼치면 좋겠어. 그래, 좋아~ 소시! 넌 할 수 있어.”
이런 생각을 한 것은 비단(非但) 소시만이 아니었다.
주미 일본 대사관 앞은 난데없는 시위대의 등장으로 혼란스러운 모습이었다.
-일본 정부는 사죄하라.
-위안부 문제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밝혀라.
-일본 차를 타지 맙시다.
-피해자에게 사죄하지 않는 일본은 각성하라.
-JAPAN OUT!
자극적인 여러 가지 문구가 적혀 있는 피켓을 들고 대사관 앞에 모여서 시위를 하고 있는 이들은 소설 <흑야>를 읽고 자발적으로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전범 국가가 왜 저렇게 당당한 겁니까?”
확성기를 들고 있는 백인 남자가 시위대를 향해 외쳤다.
“독일 정부의 모습과 비교되는군요.”
어떤 젊은 여자가 앞에 나와서는 남자의 말에 열렬한 동감을 표시했다.
“맞아요. 비교 자체가 안 되죠.”
“그렇게 안 봤는데, 일본이 참 가증스럽네요.”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는데, 더욱이 명백한 증거가 넘쳐 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과하지 않는 일본의 태도에 사람들은 분노했다. 특히 여성 관련, 인권 관련 단체들은 마치 싸움닭처럼 달려들 기세였다.
한편 창밖으로 시위 군중을 내려다보던 시게루 일본 대사는 난감한 표정으로 나직하게 신음을 내뱉었다.
“칙쇼!! 제기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그는 이런 사태를 야기한 이태리 작가가 눈앞에 있다면 자근자근 씹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