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11화
111화 배려의 시대
책상 앞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선우의 모습이 보인다.
아주 조그만 소리도 들리지 않는 호텔 내부의 방.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마침내 생각을 정리한 선우가 눈을 떴다.
그리고 조용히 펜을 들었다.
-슥슥슥!
<배려의 시대>
하얀 원고지 위에 제목이 걸리는 순간 선우는 거침없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종이를 긁는 만년필 소리만이 일정한 리듬을 타며 들려올 뿐이다.
그것은 엄청난 속도였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를 꺼내 글자로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였다.
-나만 아니면 돼.
-나만 잘살면 돼.
-우리 가족만 행복하면 돼.
경쟁 사회,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이런 사회에서 나만 잘살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책은 경제학자인 아벨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인간은 홀로 살아갈 수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며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그러기에 평등(equality)의 시대를 넘어 이젠 배려(equity)의 시대로 가야 한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 융복합 시대를 맞아 약자를 조금 더 배려하는 사회, 바로 이것이 필요한 때이다.
미국과 프랑스, 일본과 중국 그리고 대한민국이 나온다.
그중에서 대한민국 편을 보면, 아벨은 이렇게 정의한다.
대한민국은 부의 세습이 강한 나라다.
전통적인 가치관에 따른 이유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무려 70% 이상의 부자가 상속 부자다. 이는 곧 개천에서 용이 사라지는 결과를 나타나게 했다.
흙수저 어린이는 흙수저 대학생이 되고 흙수저 회사원이 되었다가 결국 흙수저 부모가 되는 것이다. 부의 세습으로 인해 계층 간의 이동이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정해진 것이다.
교육을 예로 들어보자.
교육은 평등하다.
학생들은 똑같은 교육을 받지만 부의 척도(가정의 소득 격차)에 따라 대학 진학의 격차를 낳고 이것이 또다시 사회생활의 격차를 낳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제는 교육의 패러다임 자체도 바뀌어야 한다.
평등에서 배려로 말이다.
아벨은 문제만 제기하지 않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해결 방법을 제안하기까지 한다.
누구에게나 못하는 것이 있으면 잘하는 것이 있다.
다시 말해 공부를 못한다 해도 재능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아니면 고등학교에서라도 다양한 교육을 통해 학생들의 재능을 발굴하고 그것을 찾게 해줘야 한다. 또한 재능을 발견하게 되면 그것을 꽃피우기 위한 아낌없는 지원을 해줘야 한다.
단지 흙수저라는 이유로 그의 재능을 박탈해선 안 된다.
또한 평등하지 않다는 이유를 들이대며 반대해서도 안 된다. 이것이 바로 배려이기 때문이다.
배려의 시대! 이것이야말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우리가 함께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선우는 300 페이지 분량을 끝내자마자 갑자기 몰려온 허기에 룸서비스를 이용했다.
티라미수 한 조각을 디저트로 즐긴 후, 다음 권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배려의 시대 2부>
노동 시장에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존재한다.
그것은 많은 국가들이 경제 성장을 가장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시작된 임금의 격차는 사회 구조에 심각한 불평등과 함께 소득 불평등을 초래했다.
선우는 아벨의 입을 통해 1700년대부터 시작해 2000년에 이르기까지 자본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변화했는지 도표를 이용해 보여줬고, 2차례에 걸친 세계대전, 대공황, 탈식민지화 등을 통해 1950년대 이후 자본이 어떻게 변신했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1970년대 기업 최고 경영자들의 보수는 보통 노동자들의 임금보다 30배 정도 많았다. 하지만 현재는 300배를 웃돌고 있고 맥*날* 같은 곳은 1,000배가 넘게 차이가 난다.
선우는 아벨의 입을 통해 또 한 가지의 질문을 던진다.
“배려의 시대, 과연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많이 주면 회사가 망할까?”
여기 배려를 택한 해피 그룹을 보라.
필자는 해피 그룹의 허락을 받고 그들이 제공한 3년간의 경영 자료를 제시한다.
그리고 그 결과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효과를 실제로 확인하였다.
일한 만큼 보상을 받는다는 생각에 업무 태도가 크게 개선되었고 이는 곧 회사의 매출이 늘어나는 결과로 이어졌다.
“……!!”
“……?!!”
모두가 실패하리라 예상했지만 그런 우려와 달리 해피 그룹의 영업이익이 큰 폭으로 증가하였단 사실을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선우는 주인공 아벨의 입을 통해 책 말미에 투자의 귀재라 불리는 알렌 버핏의 말을 인용한다.
‘미안해요. 버핏 씨. 당신이 2006년에 말한 것을 제가 먼저 쓰네요.’
이것은 선우가 과거에서 회귀한 인물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확실히 계급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더욱 확실한 것은 부자 계급이 승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증거 중의 하나는 바로 상위 1퍼센트의 부와 소득이 나머지 사람들에 견줘 더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배려의 시대를 생각해야만 한다.”
마침표를 찍은 선우가 수백 장의 원고지를 모은다.
그리고 두툼한 봉투에 그의 이름이 아닌 ‘아벨. K’라는 이름을 적었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라는 명성에 의존한 게 아닌, 자신의 이름을 걸지 않은 작품이 어떻게 평가되는지를 확인해 보고 싶어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으로 투고한 것이다.
하늘은 솜뭉치 같은 구름들을 고즈넉이 흘려보내며 언제나 세상 위에서 나래를 펴고 있다. 오늘도 고즈넉한 하늘이 도시를 굽어보고 있는 가운데 AT&T 페블리치 내셔널 프로암 골프 대회가 열렸다.
프로암(Pro-am)대회는 글자 그대로 프로와 아마추어가 한 조를 이뤄 경쟁하는 경기다. 흥행을 통한 기부가 목적이기에 주최 측은 유명 연예인, 스포츠 스타, 배우는 물론 다양한 분야의 저명한 명사들을 초청한다.
아마추어 선수들은 프로 골퍼를 비롯해 명사들과 함께 라운딩을 즐기기 위해 아낌없이 그들의 지갑을 열고 참가비를 낸다.
주최 측은 기부와 봉사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것이다.
참고로 초청을 받은 명사들은 참가비를 내지 않는다.
이들의 참석만으로 흥행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AT&T 페블리치 프로암 대회의 시청률은 상당히 높다고 알려져 있다.
“톰~”
“선우~~”
두 사람이 걸어온다.
그동안 꽤 잘생겼다고 자부하는 미남들을 많이 봤지만 저 둘은 특별하다.
아니! 이건 잘생겼다고 말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었다.
골프장을 찾은 갤러리들이 열광한다.
특히 여성 갤러리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환호를 보내기도 했다.
‘실프.’
[네, 마스터~~]
‘오늘은 네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
[꺄르르~ 마스터께 도움이 된다니 기뻐요. 제가 어떻게 할까요?]
‘이게 골프공인데, 저기! 깃발 아래에 있는 구멍 안에 공을 넣는 게임이야.’
[구멍이요?]
‘응. 홀컵이라고 해.’
선우는 게임의 규칙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내가 말하면 그때 홀컵 안에 공을 넣어줘. 물론 자연스럽게~~’
[네~~ 마스터.]
선우는 남모를 미소를 지으며 자신만만하게 티샷을 날렸다.
-팡!!
육체적 완성도에 걸맞게 선우가 날린 티샷이 힘차게 날아갔다.
“와우~~!!”
“굿 샷!”
“나이스, 브라보!!”
관중들의 환호 속에서 선우의 행보는 그야말로 거침이 없었다.
경기를 생중계하던 해설자들 역시 감탄을 토해낼 만큼 선우의 활약은 대단했다.
“홀컵까지 남은 거리는 135야드예요. 7번 아이언 어떠세요?”
“네. 주세요.”
선우는 캐디가 권하면 그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골프장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이들이 바로 이들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러프의 깊이나 그린 주변의 잔디 상태가 어떤지도 알고 있었다.
-따악!
선우의 공이 온 그린에 성공했지만 힘이 강해 통통 튀며 홀컵을 지나가는 모양이다.
‘실프, 지금이야. 부탁해.’
[꺄르르르~ 네. 마스터.]
그때였다.
선우가 날린 공이 강력한 백스핀을 머금고 뒤로 백(back)하는 것이 아닌가?
“와아! 대단합니다.”
“그러게요. 백스핀이 잔뜩 걸렸어요.”
백스핀(?)이 걸린 공은 결국 홀컵으로 빨려 들어가듯 자취를 감췄다.
선우의 경기는 연일 화제를 몰고 왔다.
그가 4일 동안 기록한 레코드는 라이언 우즈보다 무려 3타나 앞선 기록이었다.
이것도 적당히 눈치를 보며 조절한 결과다.
[AT&T 첫째 날 최선우 공동 4위]
[AT&T 둘째 날 라이언 우즈와 공동 1위]
[AT&T 셋째 날 라이언에게 한 타 앞선 단독 1위]
[AT&T 넷째 날 2위와 3타 차이의 단독 1위]
아쉽게도 선우의 경기는 AT&T 페블리치 내셔널 프로암 대회의 규칙 덕분에 이것으로 끝이었다. 총 5일 경기에 4일 동안 4개의 코스를 아마추어 3명과 프로 1명이 돌고 마지막 날은 프로끼리 본선을 치르기 때문이었다.
후에 선우의 캐디를 담당했던 크르스 폴은 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마치 바람을 제어하는 것만 같았어요. 공이 어떻게 휠지, 바람이 어떻게 불지 모두 알고 있는 사람 같았어요.”
* * *
구름 한 점 없는 날,
31살의 워킹 걸 에이미는 주말을 맞아 시내에 위치한 서점을 찾았다가 우연히 친구를 보게 되었다.
“엠버?”
깜짝 놀래줄 마음에 슬그머니 친구의 옆으로 다가갔는데, 독서에 집중한 탓인지 친구는 에이미의 접근을 알아채지 못한 것 같다.
결국 에이미가 엠버에게 말을 걸 수밖에 없었다.
“엠버~”
“어? 어!! 에이미.”
친구의 등장에 엠버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뭘 그렇게 읽어?”
장난기 가득한 얼굴의 에이미.
그녀는 엠버의 손에 들린 책을 가리키며 물었다.
“배려의 시대?”
“응.”
“작가가 누구야?”
“아벨. K.”
“아벨. K, 그게 누구지?”
“나도 모르겠어. 이름을 보면 신인 작가 같은데, 필력이 장난이 아니야. 식견도 매우 놀랍고!”
“그래? 어떤 내용인데?”
“아벨이라는 경제학자가 소설 형식으로 미래 사회를 예견한 책인데, 아주 재밌어. 얼마 전에 이태리 작가가 TED에서 강연했잖아. 너도 동영상 봤지?”
“응.”
“4차 산업혁명, 융복합 시대가 이 책에 서술되어 있어.”
“호오~~”
에이미는 친구의 권유에 서가에서 <배려의 시대> 한 권을 꺼내 들었다.
“경제학자 아벨이라~ 주인공 이름이 작가 이름과 같네.”
“맞아.”
<배려의 시대>를 출판한 출판사는 책을 위한 광고를 하지 않았지만 얼마 후,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서점가에 돌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참고로 약 1년 후, <배려의 시대>가 이태리 작가가 집필한 책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서 증쇄된 책에서는 이태리 작가의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재밌는 사실은 그로 인해 아벨. K라는 이름으로 인쇄된 초판본이 수집가들 사이에서 엄청난 가치를 지닌 레어 템이 되었다는 후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