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10화
110화 TED(Technology, Entertainment, Design)
“과거 세계를 제패했던 몽골의 용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죠. 성을 쌓는 자는 망하고, 길을 내는 자는 흥한다.”
“칭기즈칸!!”
객석에 앉아 있던 누군가의 입에서 칭기즈칸의 이름이 흘러 나왔다.
“네~ 맞습니다.”
선우는 적절한 타이밍에 동작을 바꿔가며 사람들의 시선을 빨아들였다.
“3차 산업혁명의 화두인 정보화는 선택의 문제입니다. 광활한 정보의 바다에서 형성될 가상공간의 출현 속에 인간의 감성과 아름다운 속성을 차가운 디지털에서 따뜻한 디지털로 변모해 가도록 대화하고 교류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화면이 바뀌었다.
[4차 산업혁명 융복합의 시대]
마침내 오늘의 주제인 4차 산업혁명이 나왔다.
“4차 산업혁명?”
“융복합의 시대! 저, 저게 뭐지?”
-웅성웅성!!
4차 산업 혁명이 등장하자 좌중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사실 4차 산업 혁명이라는 용어는 원 역사에서 2010년이 되어야 처음으로 등장(독일이 2010년 발표한 ‘하이테크 전략 2020’의 10대 프로젝트 중 하나인 ‘인더스트리 4.0’에서 ‘제조업과 정보 통신의 융합’을 뜻하는 의미로 사용됐다.)한다. 그리고 2016년 1월 스위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 4차 산업혁명이 주요 의제로 설정돼 전 세계적인 화두로 등장하게 되었다.
[인공지능, 사물 인터넷, 데이터 집약 기술혁신]
[모든 산업 데이터화 + 연결 + 맞춤 제품 생산]
“세상은 곧 정보화 시대를 넘어 4차 산업혁명, 융복합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선우는 융복합 시대와 함께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학문, 즉 인문학의 대두를 예견하며 강의를 마무리해갔다.
“이제 제게 허락된 시간이 3분 정도 남았네요.”
선우는 책상 위로 투명한 상자를 올려놓았다.
이번 강연을 준비하면서 언젠가(그가 회귀하기 전) 인터넷에서 감명 깊게 본 어느 노교수의 강의를 떠올리게 되었다. 선우 역시 인터넷으로 읽은 것이라 이 일화가 사실인지는 모른다.
각설하고 선우는 강연장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 이게 뭐라고 생각하나요?”
“투명한 상자입니다.”
“맞습니다. 그럼 이건 뭘까요?”
“……돌멩이가 아닌가요?”
“네. 맞습니다. 이건 주먹만 한 크기의 돌멩이입니다.”
선우는 돌멩이들을 투명한 상자에 채워 넣었다.
그러고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상자가 다 찼나요?”
“네.”
“꽉 찼습니다.”
여기저기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실제로 상자에 돌멩이들이 가득 찼으니까 말이다.
그러자 선우가 희미한 미소를 보이더니 이번엔 자갈이 담긴 박스를 꺼내 상자에 쏟아부었다. 그러곤 상자를 가볍게 흔들었다.
자갈들은 당연히 돌멩이들 사이의 빈 공간으로 들어갔다.
“자, 이제 상자가 모두 채워졌나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네. 꽉 찼습니다.”
선우는 아무 말 없이 봉지 하나를 들어 보였다.
아뿔싸! 모래가 가득 찬 봉지였다.
“……?”
“……!!”
선우는 모래를 상자에 쏟아부었다.
그러자 모래의 작은 알갱이들이 상자의 빈 공간을 꽉 채웠다.
“여러분, 상자가 다 찼나요?”
“네.”
“이번에야말로 가득 찼습니다.”
선우는 환한 미소를 보이며 입술을 열었다.
“여러분. 이 상자는 여러분의 인생을 보여주는 겁니다. 돌멩이는 여러분의 가족, 배우자, 건강 그리고 자녀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들이죠. 사실 이들만 있어도 여러분의 인생은 이렇게 가득할 겁니다.”
“……!”
“……!!”
모두가 숨을 죽이고 선우에게 집중했다.
“여기에 있는 자갈들은 돌멩이보다 중요도가 낮은 것들입니다. 여러분들의 집, 자동차와 같죠. 모래는 그보다 작은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모래를 먼저 상자에 쏟아부으면 자갈이나 돌멩이가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사소한 것에 허비하지 마세요. 잘못하면 여러분들의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들이 들어갈 공간을 갖지 못하게 될지 모릅니다. 가족을 먼저 생각해 주세요. 아이들과 놀아주고 배우자를 먼저 챙겨주세요. 술 마시러 갈 시간 따윈 살다 보면 언제든 있습니다.”
“…….”
“돌멩이들부터 먼저 보살펴주세요. 그 돌멩이들이야말로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들입니다.”
선우가 좌중을 쭉 둘러보자 모두 격한 감동을 받은 얼굴이다.
“저…… 작가님.”
이때, 누군가가 선우에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손에 쥔 커피에도 무슨 의미가 있나요?”
“아! 이거요?”
“네.”
선우는 자신의 손에 들린 커피를 보았다.
사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강의가 끝났으니 목이나 축이려고 손에 쥐었을 뿐이다. 하지만 저 반짝이는 눈빛들을 보라.
저들의 기대를 무너뜨리기 싫었다.
‘……!!’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순간 멋진 생각이 선우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스르륵!!
선우는 곧 돌멩이, 자갈, 모래로 가득한 상자에 커피를 쏟아부었다.
“여러분의 인생에 커피 한 잔 마실 여유는 있어야겠죠? 이것으로 강연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짝!
-짝! 짝……짝!
“Great!”
“Wonderful~~!!”
-짝짝짝짝! 짝짝짝짝짝짝짝짝!
다양한 종류의 함성과 함께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강연에 참석한 사람들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기립했다.
여담이지만 이날 선우의 TED 강의는 역사상 손꼽히는 강의가 되었고 그가 언급한 4차 산업혁명, 융복합 시대의 도래(到來)는 전 세계에 커다란 화두를 던졌다.
“작가님~ 이태리 작가님~~”
“저희 대학에서도 강연을…….”
“사인 좀 해주세요.”
“저희들과 사진 한 장만 찍을 수 있을까요?”
“융복합 시대에 대해 연구를 진행하고 싶습니다. 저희와 같이…….”
“……우리 하버드에서도 강의를 해주십시오. 작가님.”
“인문학의 대두라니, 정말 놀라운 강연이었습니다.”
강연이 끝나자 각계각층의 명사들이 선우에게 몰려들었다.
강연 초청에서 공동 연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의를 던졌지만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몰렸기에 간단히 명함을 교환하며 인사만 나누는 정도로 끝났다.
“요~ 브로.”
“톰~~!”
톰 제라즈다.
“인사해. 여긴…….”
“조셉 포드 씨. 안녕하세요. 팬입니다.”
톰이 소개하기도 전에 선우가 말문을 열었다.
“저 역시 작가님의 팬입니다. 그리고 오늘 강의 너무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뭐야~ 큭!”
“뭐가~~”
톰은 재미있다는 표정을 숨기며 선우에게 말했다.
“바쁜 것 같은데, 자리 잡고 있을 테니까, 이따 만찬장에서 보자고.”
“오케이.”
톰과 조셉 포드는 만찬장으로 먼저 자리를 옮겼고 선우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개인 룸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의외의 손님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태리 작가님.”
TED 주최 측 관계자와 함께 미국 국무부 장관 벨린 파월이 나타난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저희 미국으로 오십시오.”
“미국이요?”
“네, 시민권을 비롯해 작가님과 작가님의 가족을 위한 최상의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그것이 글을 쓰는 이유이든 경제 활동을 하는 이유이든 말이죠.”
“……!!”
언젠가는 밝혀질 일이었지만 미국 정부가 눈치챈 모양이다.
벨린 파월 역시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서류를 내밀었다.
-에 대한 조사 보고서
특허나 세상을 바꿀 신기술과 같은 것은 없다.
단지 투자회사일 뿐이다.
하지만 그 규모가 엄청났다.
“작가님이라면 아시지 않습니까?”
“무엇을 말입니까?”
“……한국의 정경 유착.”
그의 말에 선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결코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개선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권력의 눈 밖에 나면 여전히 여러모로 힘들고 곤란한 나라였다.
“제가 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누가 또 알고 있죠?”
“언젠간 밝혀지겠지만 정보 통제로 인해 지금은 저와 백악관의 주인만 알고 있습니다. 우리 미국은 말입니다.”
“그렇군요.”
“이민이 곤란하시다면 우선 시민권부터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미국 대사관의 참사관 자격을 드리겠습니다. 이만하면 영국의 명예뿐인 남작 작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방패막이가 될 겁니다.”
“……!!”
미국 시민권에 참사관이라니!
그야말로 엄청난 조건이 아닐 수 없다.
이때였다.
-달칵!
방문이 열리며 영국 정보부 소속 요원들이 벤자민 모건 대사와 함께 들이닥쳤다.
“파월 장관님.”
“모건…… 대사님?”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뭐가요?”
미국 주재 영국의 모건 대사는 파월 장관의 뻔뻔함에 얼굴을 붉혔다.
“이태리 작가님은 엘리자베스 여왕님께 작위를 받은 우리 대영제국의 귀족입니다. 미국과 가장 가까운 우방국의 국민에게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하하하, 오해는 마십시오. 그저 이중국적에 대해 설명했을 뿐입니다.”
“뭐라고요?”
벨린 파월은 여유를 잃지 않은 채, 대답했다.
“작가님께서는 한국인이자 동시에 영국의 귀족입니다. 이미 이중국적을 가지고 있죠. 여기에 미국 시민권이 추가된다고 해서 나쁠 것이 있나요? 오히려 득이 됐으면 득이 됐지. 잃을 게 없습니다. 더욱이 이건 개인이 선택할 문제지 영국 정부가 나설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파월 장관의 말에 모건 대사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의 말이 이치에 합당했기 때문이다.
선우는 내심 미소를 지었다.
나쁠 것은 없다.
미국 시민권을 얻는다고 해서 한국 국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요, 그의 말대로 도움이 됐으면 도움이 됐지 나쁠 것이 없었다. 단지 한 가지 걸림돌이 있었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꼭 이민을 가야 하나요?”
“물론 미국으로 오시면 가장 좋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전 세계 어디든 원하시는 곳에서 미국 시민의 권리를 누리면서 사실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이중국적을 허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한적인 허용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네. 제한적인 허용이 있죠. 하지만 제 경우와는 맞지 않습니다.”
“저희 역시 그와 같은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짧고도 간결한 설명이 이어졌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미국 정부의 힘을 이용해 대한민국 정부를 압박하겠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미국을 말할 때, 전 세계를 지키는 경찰 국가라고 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깡패 국가라는 말도 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나라들 가운데 유일한 초강대국이기 때문이다.
“그게 가능한가요?”
“후후후~ 저희는 미국입니다. 한국은 유일한 분단국가고요.”
“……!”
대한민국만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미국이 가진 패가 상대적으로 많다는 뜻이었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았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죠. 혹시 지금 결정해야 하는 겁니까?”
“오~~ 아닙니다.”
콜린 장관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손을 저었다.
“시간은 많습니다. 여유를 가지시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심사숙고하겠습니다.”
“그럼 만찬장으로 가실까요?”
“좋죠.”
만찬장으로 향하는 사람들 중에서 영국의 모건 대사만이 꿀 먹은 벙어리마냥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