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07화
107화 기묘한 동물 백과사전
“조르미온느!”
“왜, 태리?”
“방금 내가 지금껏 본 여자 중에 가장 예쁜 여자애를 본 것 같아.”
“……!”
태리의 말에 조르미온느는 당황했지만 내색치 않으려는 표정이 역력하다.
“어디?”
“오른쪽.”
“오른쪽?”
그녀가 고개를 돌리려 하자 태리가 다급히 말했다.
“잠깐만, 지금 고개를 돌리면 안 돼.”
“왜?”
“그녀가 눈치챌 것 같아.”
“…….”
태리의 말에 조르미온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씩, 그래, 지금처럼 천천히…… 천천히 고개를 돌리면 돼.”
태리의 표정에 묘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한다.
“……?!!”
조르미온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의 오른쪽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있었다면 사람이 아닌 사물, 큰 거울이 하나 있었는데, 거울 안에는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가 있었다.
“태리?”
“…….”
태리는 조르미온느의 손을 잡으며 애정이 넘치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조르미온느, 널 사랑해.”
“……정말 못됐어.”
영상이 끝나자마자 엄청난 반응이 터져 나왔다.
“꺄아악~”
“엄마야. 멋있다.”
“태리~ 태리~ 태리~~!!”
선우는 방청객들의 환호에 미소를 지었다.
“그럼 돈은요?”
“그러게요. 돈은 어떻게 되는 거죠?”
패널들의 이어진 질문에도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잠시 흔들리지만 돈은 결국 두 사람의 친구이자 조력자로 남게 됩니다.”
“아……!”
“하지만 아쉬워하지 마세요. 돈 역시 다른 사랑을 하게 되니까요.”
그때까지 조용히 지켜보던 엠마 바르통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그러면 태리와 돈, 조르미온느는 모두 자신들의 첫 사랑과 연결되지 않은 거네요.”
“어?!!”
“……!!”
-웅성웅성!
예리한 분석이다.
“네. 의도하진 않았지만 그렇게 됐네요. 하하하~”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지적에 선우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이때, 담당 PD가 엠마를 향해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태리 포터에 대한 얘기는 이제 그만하도록 하고 이번에는 시청자들이 보내 주신 질문을 물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괜찮으시죠?”
“그럼요~”
패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밤에 잘 때 버릇이 있나요?”
“특별한 버릇은 없는 걸로 아는데…… 사실 잘 모르겠네요.”
“왜요?”
“자면서 제 모습을 볼 수 없잖아요.”
“아~~ 그렇군요. 호호호!”
“다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작가님은 잠을 잘 때 잠옷을 입고 자나요? 아니면 벗고 자나요?”
“겨울엔 입고 여름엔 벗습니다.”
“꺄아아아~~”
“잠자는 사진을 공개해 주세요.”
방청석에서 터져 나온 갑작스런 질문에도 선우는 여유를 잃지 않으며 대답했다.
“어쩌죠? 지금은 사진이 없는데…… 다음에 기회가 되면 공개해 드릴게요.”
“꺄악!”
“엄마야~~ 어쩜 좋아~~!!”
선우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엄마가 좋아요? 아빠가 좋아요?”
“두 분 모두요. 두 분 모두 좋아하고 가슴속 깊이 존경합니다.”
“애인이 있나요?”
“애인이요? 그 질문은 60초 후에…….”
질문의 숫자만 무려 30개에 달했다.
선우는 시청자들이 보내온 질문 중에서 대답하기 민감한 것들은 60초 후에 알려주겠다는 멘트로 넘겼고, 그가 대답해 줄 수 있는 질문에는 적절한 위트를 가미해 재미를 선사해 주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당신은 무인도에 난파를 당했습니다. 만약 이곳에 있는 여인들 중에서 한 명만 당신과 함께할 수 있다면 당신은 누구와 무인도에 가겠습니까?”
“오우~ 당연히 엠마 바르통, 당신이죠.”
“꺄아아~~”
선우의 답변에 질문을 던진 엠마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더니 아이처럼 좋아했다.
“왜 저죠? 제가 제일 아름다운가요?”
“아니요~ 한국에 노인 공경이란 사상이 있어서요.”
“노인 공경이요?”
“네. 나이가 많은 연장자를 대우해주고 공경해주는 사상이죠.”
“뭐, 뭐라고요?”
선우의 답변에 엠마는 잠시 휘청거렸다.
“하하하~ 농담이에요.”
“히잉~ 정말 못됐어.”
얼마 후,
생방송이 끝난 뒤, 방송국이 난리가 나버렸다.
프로그램 역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기 때문이었다.
선우의 얼굴은 수많은 팬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고 삽시간에 수백 개에 이르는 팬클럽이 프랑스에 만들어졌다.
상황이 여기에까지 이르자 담당 PD는 물론 방송국 사장조차 직접 찾아와 선우에게 또 한 번의 출연을 요청했다. 하지만 선우 역시 나름대로의 일정이 있었기에 정중히 거절하고 말았다.
그들은 한국에서 온 한 명의 스타가 세계 최고의 문화 강국이라는 프랑스를 이처럼 송두리째 흔들어버릴 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프로그램 후 이어진 간단한 식사 자리,
선우와 함께 방송을 마친 여성 패널들이 은근슬쩍 그에게 종이를 건넸다.
“……?”
-연락해요. 0**53*03**90. (엠바 바르통)
-당신에게 세느강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네요. 연락주세요. (비노쉬)
-호텔 파리지엥 스위트 룸 비밀번호 1004. (줄리엣)
심지어 자신이 묵고 있는 호텔 이름과 비밀번호를 알려주는 여인도 있었다.
* * *
르느와르 호텔.
영국 출신의 세계적인 여류 작가 수앤 캐슬린 롤링이 호텔 1층 로비에 와있었다.
선우가 프랑스에 왔다는 소식에 그녀 역시 도버 해협을 건넌 것이다.
“선우~!”
“수앤~~!!”
자신을 보며 반가워하며 한걸음에 달려오고 있는 선우의 모습에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우와의 만남이 마치 꿈인 것만 같았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무일푼이었던 그녀는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귀족 작위를 받았고 작년 기준으로 영국 부호 순위 30위 안에 들었으며 현재 10억 달러에 이르는 막대한 부를 소유하게 되었다.
매달 정산되고 있는 태리 포터 시리즈의 인세도 인세지만 무엇보다 제작에 투자한 영화의 흥행이 그녀의 재산을 크게 증가시켰다.
하지만 그런 그녀조차 선우에 비할 수 없다.
그가 받는 인세만 해도 자신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들었다.
‘도대체 재산이 얼마야?’
돈이면 돈, 명예면 명예. 거기다 저 얼굴까지!!
선우는 그녀가 본 남자들 중 가장 완벽한 남자였다.
“오랜만이에요. 수앤.”
“그러게~ 얼굴 잊어버리겠다.”
“헤헷~”
두 사람은 가벼운 포옹과 함께 이탈리아식 인사(bacio)로 친분을 과시했는데, 세계 최고 작가들의 만남이라 그런지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참! 세바스찬 램지 경이 안부 전해달라고 하더라.”
“아! 램지 경은 건강하시죠?”
“응. 여전하셔.”
“조만간 연락 한번 드려야겠네요.”
“오오~~ 완전 좋아하시겠는걸.”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회의실로 이동했다.
“자~ 여기.”
수앤의 가방에서 한눈에 봐도 꽤나 두꺼워 보이는 A4 용지가 나오자 선우의 입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설마?”
“훗~ 호그캐슬에 진정한 평화가 찾아왔답니다.”
“드디어 끝이 났군요.”
“응.”
선우가 주먹을 힘껏 쥐었다.
“축하해요. 수앤.”
“나도 축하해. 선우.”
다음 달쯤 시리즈 8부가 발매될 예정인데 두 사람의 부지런한 노력으로 말미암아 시리즈의 마지막 완결인 11부 <태리 포터와 최후의 전쟁과 그 후 10년>이 완성된 것이었다.
“책도 완결이 됐고, 지금부터 뭐 할 거예요?”
“그러게. 나 이제 뭐 하지?”
수앤이 잔뜩 인상을 쓰며 말했다.
“젠장! 드디어 완결을 했는데,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르다니!”
“여행은 어때요?”
“여행?”
“전 세계 여행. 최소 3개월에서 최대 1년 정도로다가!”
“괜찮은데, 그러고 나선?”
“뭐가 그러고 나선이에요? 글쟁이가 푹 쉬고 여행을 다녀왔으면 당연히 글을 써야죠.”
“쳇~~”
“왜요?”
“누가 그걸 몰라? 좋은 소재가 없어서 그러지.”
수앤은 잔뜩 실망한 표정이다.
“소재가 없긴 왜 없어요?”
“응? 뭐, 좋은 게 있어?”
잠시 후,
선우의 말을 경청하던 수앤의 눈이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태리 포터의 스핀 오프?”
“네.”
“스핀 오프라 하면…….”
수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우리가 만든 태리 포터의 세계관은 매우 방대하잖아요. 이 얘긴 다시 말해 세계관을 공유해서 쓸 수 있는 소재가 많다는 뜻이에요.”
수앤의 눈에서 기묘한 광채가 번뜩였다가 사라졌다고 선우의 본격적인 설명이 이어졌다.
“……그렇게 해서 같은 세계관, 같은 등장인물이 나오는 거예요. 대신 사람들이 쉽게 예상할 수 없도록 미래가 아닌 과거로 돌아가는 거죠. 대략 태리가 태어나기 70년 전쯤?”
“그럼 덤앤두어가 살아 있겠네?”
“네. 맞아요. 그래야 태리 포터와 연관이 있죠.”
“십 대의 덤앤두어라, 재밌을 것 같아. 그럼 덤앤두어가 주인공인 거지?”
“아니요.”
“응?”
“수앤. 이건 아이들을 위한 판타지 소설이에요. 덤앤두어와 어울리지 않아요. 게다가 반지의 제사장에 나오는 건덜프와 비슷한 이미지도 있고요.”
선우의 말에 수앤 역시 건덜프를 떠올리며 상황을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이런 건 어때요?”
“뭔데?”
“동물을 다루는 마법사의 이야기예요.”
“동물을 다루는 마법사?”
“네.”
수앤의 눈빛이 강하게 반짝였다.
“……재밌겠는데? 태리 포터와 같은 세계관. 70년 전이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1920년.”
“맞아요. 우리가 만든 세계관에 따르면 아직은 마법사들이 숨어 지내던 시대죠.”
수앤은 뭔가에 홀린 듯,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마법 동물을 수집하고 연구하는 학자 스타일의 마법사가 뉴욕에 도착했는데…….”
“공항에서 가방이 바뀌는 해프닝과 함께…….”
“범죄에 휘말리게 되면서…….”
선우와 주거니 받거니 소설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그때,
두 사람의 머릿속에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린킹왈드?”
“그린킹왈드!”
“……!!”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내뱉은 이름 그린킹왈드.
깜짝 놀란 수앤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선우, 넌 정말…… 천재야.”
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몇 번 흔들더니 이내 자신의 소지품을 챙기기 시작했다.
“어디 가려고요?”
“집에.”
“네? 어디요?”
선우가 다시 묻자 그녀는 환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집에 간다고.”
“갑자기 왜요?”
“왜긴~ 좋은 소재가 생겼잖아. 영감이 떠올라 못 참겠어. 내 손 좀 봐봐! 손가락이 근질근질거리고 있잖아. 안 보여?”
“와우~!!”
역시 수앤이다.
선우 역시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이번 작품도 같이 하는 거지?”
“아니요. 이건 수앤만의 작품이에요.”
“정말?”
“그럼요. 제가 한 일이 뭐가 있어요? 그냥 이러면 좋겠다. 저러면 좋겠다, 의견만 개진한 거지~”
“……!!”
수앤은 아직 자신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녀의 실력은 이미 완성형에 가까웠고 선우는 그녀의 차기작이 분명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어휴~ 넌 왜 매번 날 감동시키는 거니?”
수앤이 한 걸음 다가와 선우를 꽉 안아주었다.
‘수앤. 오히려 내가 감사해요. 당신과의 만남이 제게 날개를 달아주었어요.’
선우 역시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마워. 선우. 아주 멋진 작품을 써볼게.”
“네~ 기대할게요.”
“그래. 기대해도 좋아. 방금 적당한 제목도 떠올랐거든.”
“오~ 그래요? 제목이 뭐예요?”
“기묘한 동물 백과사전과 그린킹왈드?”
선우와 수앤은 잠시 말없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선우다.
“……좋은데요?”
“휴우~~”
좋다는 말에 그제야 가슴을 쓰다듬는다.
어지간히 긴장했던 모양이다.
“몇 부작이에요?”
“지금 예상은 3~5부작?”
“영화는요?”
“당연히 만들어야지.”
“호오~ 그럼 저도 투자할 수 있어요?”
“훗! 당연하지. 넌 나의 영원한 파트너잖아. 언제라도 환영이야.”
그로부터 얼마 후,
수앤은 프랑스 땅을 밟은 지 3시간 만에 프랑스를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뜻하지 않은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했다.
-수앤 캐슬린 롤링과 이태리 작가의 만남.
-두 사람의 불화설.
-수앤 3시간 만에 호텔을 박차고 나와…….
파파라치들에 의해 찍힌 사진과 특종에 목이 마른 기자들의 합작품이다.
그런데 정작 더 황당한 것은 가짜 뉴스였다.
불과 한 시간 사이에 두 사람과 관련된 기사 수십 개가 인터넷에 뿌려졌는데 아주 황당한 가짜 뉴스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기 때문이었다.
-이태리 작가와 엠마 바르통의 밀회 장면을 수앤 작가가…….
-호텔 관계자에 따르면 이태리 작가가 조루…….
-그날 르느와르 호텔에 무슨 일이 있었나?
사람들의 클릭을 유도하는 가십성 기사였지만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황당함의 극치를 달리는 기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