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05화
105화 공쿠르상(Le Prix de Goncourt)과 협약식에서 생긴 일
기성 건설과 투자회사 의 협약식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천문학적인 공사 규모 때문인지 협약식이 열린 모비딕 호텔 연회장에는 대한민국 굴지의 재벌들이 속속 모습을 보였는데, 그중에는 대산은행의 김세윤 은행장과 김하나도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유기성 회장님.”
아랍인으로 분한 선우 역시 이번 협약식의 주인공으로 참석했다.
“반갑습니다. 존슨 부사장님.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 역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영국계 투자회사 의 대표는 여전히 베일에 감춰져있고 가면을 쓴 선우가 의 부사장이자 COO(Chief Operation Officer:최고운영책임자) 자격으로 이 자리에 섰다.
“사람들이 많이 왔네요.”
“허허허~ 모두가 의 이름 덕이지요.”
“별말씀을요.”
유기성 회장의 말에 선우는 담백한 미소를 보이며 답했다.
“유 회장, 오랜만입니다.”
“이 회장님.”
“축하드립니다. 유 회장님.”
“박 회장님~”
과 인연을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유기성 회장과의 인연을 무기로 다가왔다.
“존슨 최고운영책임자님?”
“단어가 깁니다. 존슨 부사장이라고 부르십시오.”
“반갑습니다. 존슨 부사장님. 조선 그룹의 김무혁입니다.”
“반갑습니다.”
“한국말을 잘 하시네요. 혹시 한국계?”
“네, 어머님이 한국분이셨습니다.”
마법 가면을 써서 얼굴이 변했다고 말할 수 없어서 그냥 한국계 외국인으로 설명했다.
“반갑습니다. 성삼의 이희건입니다.”
대한민국 재계의 거물이 다가왔다.
선우 역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이희건 회장님.”
“그동안 베일에 감춰져 있어서 외계인이 만든 회사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늘 이렇게 의 임원을 직접 보게 되니 기쁘군요. 게다가 아주 현양하십니다.”
“과찬이십니다.”
“과찬이라뇨. 사실을 말한 겁니다. 그리고 이 말을 해주고 싶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선우가 의아한 눈빛을 보이자 이희건 회장이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M&A의 위협에서 백기사가 되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지만 성삼 전자를 향한 M&A 시도가 있었다.
외국계 헤지 펀드에서 과의 연합을 제의했지만 선우가 거절한 것이다.
이로 인해 성삼 전자에 대한 M&A 시도는 무산되었지만 후에 절치부심(切齒腐心)한 헤지 펀드가 SSK 그룹에 대한 적대적 인수 합병을 벌이게 된다.
“지금은 반도체의 힘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가능하다면 파이를 조금 더 키워보고 싶은데, 도와주시겠습니까?”
“어느 정도까지 말씀입니까?”
선우의 반문에 수락할 용의가 있다는 뜻을 헤아린 이희건 회장은 조용히 말했다.
“일간 자리를 한번 만들 테니, 한번 만나는 게 어떨까요?”
“……초대해 주시면 기꺼이 가겠습니다.”
한 떼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희건 회장과 같은 굵직한 인물들과 인사를 나눴고 약속을 잡았다.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들과는 가볍게 인사하며 명함을 나누는 것으로 끝을 냈다. 참고로 급이 낮은 잔챙이들은 선우에게 다가오지도 못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자 선우에게도 여유가 찾아왔다.
다양한 종류의 와인을 마시고 현악 앙상블의 음악에 심취했다.
“스텔라 앙상블이라 했나?”
이 팀엔 특이하게도 하프 연주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하프.”
문득 이계(異界)에서의 추억이 떠올랐다.
선우는 앙상블 팀의 연주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그들에게 조용히 다가갔다.
“죄송하지만 하프를 한번 만져 봐도 될까요?”
“하프를요?”
“네.”
“…….”
하프는 아무나 다룰 수 있는 악기가 아니다.
평소라면 절대 들어주지 않을 부탁이었지만 그녀는 선우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정중한 부탁도 부탁이었지만 그가 이번 협약식의 주인공임을 가까이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선우는 의자에 앉아 허리를 폈다.
지구로 돌아온 이후, 한 번도 쳐보지 않았던 하프지만 손가락에서부터 느껴지는 진득한 촉감에 옛날처럼 연주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리저리 손가락을 몇 번 움직여 본 선우는 본능적으로 연주가 가능하다는 것을 느꼈다.
“응?”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하프 연주자 준경이 기이한 감정을 느꼈다.
의자에 앉은 자세를 비롯해 현을 퉁기는 모습에서 대가의 향기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시각.
불쾌한 표정으로 선우를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대산은행의 김하나다.
“……저자가 의 이사라고?”
더럽게 재수 없는 아랍인으로, 그냥 직원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의 최고운영책임자이자 이사다!
성삼의 이희건 회장을 위시해 대기업 수장들이 그와 인사를 나누었으니 생각보다 그 위치가 대단한 사람이었다.
기성 건설을 기사회생시킨 주인공이라 분노를 토해내고 싶었지만 이라는 이름은 그녀가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쳇!!”
그녀는 이솝 우화의 여우와 포도에 나오는 여우가 되기로 했다.
-띠리리링!
그 순간이었다.
선우가 하프 줄을 몇 번 튕겨보더니 이윽고 하프를 연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장내에 울려 퍼지는 아련한 하프의 소리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선우를 바라보며 귀를 기울였고 대화를 나누던 이들 역시 대화를 중단하고 선우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베테랑 하프 연주자인 준경 역시 선우의 손끝에서 펼쳐지는 음색에 눈이 휘둥그레졌을 정도다.
-따라라랑~~ 따라…… 따라라랑, 따라랑~~!!
‘이게 대체 무슨 곡이지? 헨델, 슈베르트 아니면 라이네?’
애석하지만 모두 틀렸다.
이 곡은 음유시인 달라한 오르페오가 남긴 곡이었다.
각설하고 연회장에 침묵이 찾아왔다.
하프로 저러한 소리를 낼 수 있다니, 마치 시간이 멈춘 듯했다.
대산은행의 김하나 역시 선우의 신들린(?) 연주에 푹 빠져 버린 모습이다.
그녀의 눈에 왠지 저 아랍인의 큰 코가 굉장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띠리리링!
하프에서 선우의 손가락이 떨어졌다.
선우는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하프 연주자 준경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미숙한 실력인데, 악기 빌려줘서 고마워요.”
선우의 인사에 준경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선우를 향해 박수갈채를 보내기 시작했다.
-짝짝짝!!
-휘이익~ 짝짝짝짝!!
“안녕하세요.”
김하나가 방긋 미소 지으며 선우에게 다가왔다.
“어머, 어깨에 뭐가 묻었네요.”
호감 어린 눈길을 보내며 선우의 어깨에 손을 댄다.
이상한 것은 그녀의 손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뭡니까, 그게?”
“잘생김이요.”
“……!!”
황당함을 넘어 어이가 없다.
“한국에는 언제까지 계세요?”
“이 호텔에 머물고 계시나요?”
“미스터 존슨, 애인 있어요?”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질문 세례에 선우는 말없이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본모습을 모르는 남자라면 혹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선우는 그녀의 눈동자 속에 감춰진 욕망의 더러운 찌꺼기를 볼 수 있었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실프~’
선우는 곧장 실프를 소환했다.
[까르르르, 네. 마스터~]
‘휴지가 필요해.’
그리고 잠시 후,
바람의 정령이 김하나의 엉덩이에 달라붙었다.
“어머?”
“컥! 저게 뭐야?”
-웅성웅성!!
“쟤, 대산은행의 김하나 아니야?”
“큭큭큭큭!!”
“야! 야! 대박이다. 찍어! 어서 찍어.”
자신을 향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것일까?
김하나의 표정이 바뀌었다.
‘왜들 저러지?’
잠시 후,
그녀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드레스 엉덩이 쪽에 화장실에서 쓰는 두루마리 휴지가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캬악! 이, 이게 뭐야?”
그녀는 휴지를 떼기 위해 재빨리 손을 뻗었다.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다.
하지만 휴지에 발이라도 달린 것일까?
[꺄르르르~~]
실프의 장난에 두루마리 휴지는 그녀의 손길을 요리조리 피했다.
“하하하하!”
“크하하하! 대박!!”
사람들의 웃음소리에 김하나의 기분이 최악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미친 휴지에 발이 달렸는지, 도무지 잡히지가 않았다.
선우는 볼펜으로 위장한 마법 완드를 손에 쥐었다.
‘이것만으로는 너무 간단해서 재미없지.’
-뿌~~우웅!
느닷없이 터져 나온 방귀다.
“……?”
“……?!!”
“……!!!”
너무나도 큰 방귀 소리에 순간 좌중이 조용해졌다.
-뿡, 뿌붕, 뿡뿡 뿌~~~웅!
지금까지 이런 냄새는 없었다.
이것은 방귀인가, 똥인가?
처음에는 웃었지만 방귀 소리가 계속되자 사람들이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그녀는 두 손으로 배를 움켜쥐고 화장실을 향해 달려갔지만 방귀는 그칠 줄을 몰랐다.
“캬캬캬캬!”
“아이고, 아이고 배야!”
“방귀 대장 뿡하나다. 뿡하나!!”
* * *
공쿠르상(Le Prix de Goncourt)은 프랑스의 작가 에드몽 공쿠르(Edmond de Goncourt)의 유언에 따라 1903년 제정된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으로 노벨 문학상, 맨부커상과 더불어 세계 3대 문학상 중의 하나로 꼽히는 상이다.
-문학성.
-대중성.
-예술성.
10명의 심사 위원이 각 항목마다 최저 1점에서 최고 10점의 점수를 매겨 최고점과 최저점을 뺀 후, 합산하여 그중 최고점을 받은 작품에 수여한다.
하나의 작품을 선정하기 위해 종종 심사 위원들 사이에서 뜨거운 설전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올해는 그 양상이 사뭇 달랐다.
세 개의 평가 항목에서 거의 만점에 가까운 작품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캐릭터가 살아서 움직이며 이야기 역시 매우 흥미롭다.
-때때로 무겁고 진지한 분위기가 독자들의 가슴을 무겁게 만들었지만 곳곳에 포진된 작가의 위트가 번쩍였다.
-작품의 전반적인 느낌은 오히려 희극에 가까웠다.
-올해 최고의 작품이다.
-웃음이라는 큰 틀 안에 감동과 슬픔 그리고 아픔이 있었다.
“……이견이 있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는 재미와 감동이라는 대중성뿐만 아니라 문학성과 예술성이라는 가치까지 잡았습니다.”
“내 평생 이렇게 몰입도가 높은 작품은 처음 보았습니다.”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습니다. 이태리 작가는 이 시대가 원하는 최고의 작가입니다. 벌써부터 이태리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대되네요.”
“저 역시 동감입니다.”
그의 수상 여부는 만장일치로 결정되었다.
불필요한 논쟁도, 불꽃 튀기는 설전도 없었다.
“이태리 작가의 글을 읽으면 그가 왜 이번 월드컵을 치르고 은퇴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심사 위원 주르몽이 책에서 시선을 떼며 그의 은퇴에 대해 말하자 다른 심사 위원들 역시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경기장에서 땀 흘리는 그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게 아쉽지만 저 역시 당신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땀 흘리는 모습이라면 혹시 브라질과의 경기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맞아요. 정말 섹시하지 않았나요?”
“호호호~~ 동의해요.”
“사실 전 그 장면을 녹화해놓고 매일 아침마다 보고 있답니다.”
“그게 정말이세요?”
“네~”
“그럼 제게도 그 영상 하나만 보내주실 수 있으세요?”
“호호호~ 물론이죠.”
“모닝커피를 마시며 그 장면을 보면…….”
“꺄아아~~”
이때 한 명의 여자 심사 위원이 지갑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였다.
“이 사진 보실래요?”
“꺄아아아~~”
“워~~!! 이거 어디서 구하셨어요?”
그녀가 꺼낸 사진은 바로 선우가 논산 훈련소에 입대하는 사진이었다.
“호호호~ 한국에 있는 지인이 보내줬어요. 어때요? 장난 아니죠?”
“머리카락이 굉장히 짧네요.”
“군대에 들어가기 때문에 잘랐다고 들었어요. 귀엽죠?”
“꺄아아아~ 너무 귀여워요.”
“저도 막~~ 안아주고 싶네요.”
“그니까요~~”
“호호호호~~”
지금까지 이런 작가는 없었다. 작가인가 축구 선수인가?
각설하고 여자들의 수다는 한동안 계속해서 이어졌다.
“……쩝!”
심사 위원 주드는 내심 혀를 찼다.
중년을 넘어 노년에 이른 여자들이 마치 10대 소녀와 같이 호들갑을 떨고 있으니 어이가 없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결코 내색하지 않았다.
그 역시 선우의 압도적인 축구 실력과 함께 그의 외모를 인정하고 있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