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04화
104화 그해 겨울
유상현이 한설주의 집을 찾았다.
“어서 와요.”
“안녕하십니까, 유상현입니다.”
미리 언질을 받았는지, 미희는 상현의 손을 잡고 반가워했다.
“그래, 잘 왔네. 이쪽으로 오게.”
“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 기성 건설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설희와 설연이 상현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한 칸씩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설주의 자매들이 상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동안 미희가 차와 과일을 내왔다.
“상현 군.”
“네, 아버님.”
“우리 설주, 사랑하나?”
“네,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설주를 향한 상현의 눈빛에는 깊은 애정이 가득했다.
그리 경직되지 않은 분위기에서 잠시 이런저런 얘기가 오갔다.
“회사가 어렵다고 들었네만.”
회사 얘기가 나오자 집 안 공기가 갑자기 무거워지는 느낌이다.
“……네. 사실입니다.”
순간 설주의 얼굴에 수심의 빛이 보였지만 상현의 표정은 처음과 변함이 없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IMF를 예상치 못해 회사의 자산을 팔고 부채를 늘린 결과 저희 회사는 현재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다. 어쩌면 망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저는 몸 건강한 대한민국 남자입니다.”
솔직하게 고백하는 상현의 음성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자네가 솔직히 말하니, 나 역시 솔직하게 말하겠네. 우리 집안이 재벌가였다면 자네를 도와줄 수 있네. 하지만 우린 그렇지 않아. 난 공직에 있고 나랏일을 하는 사람일세.”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
한상우 역시 사람이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권력을 남용하는 것은 그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걱정 마십시오. 제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설주만큼은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습니다.”
한상우를 비롯해 그의 가족들은 상현의 당당한 말에 강한 호감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몸 하나는 꽤 튼튼해 보이는군.”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꼽자면 그중에 돈이 있다.
하지만 돈이 최고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돈이 있어도 건강이 없으면 불행할 것이요, 돈이 있어도 행복하지 않다면 그것 역시 불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한가?
한상우는 찻잔을 들어 그의 입술을 축였다.
“군대는 다녀왔나?”
“육군 병장 만기 전역했습니다.”
“바둑은 좀 두나?”
“초단입니다.”
“호오~ 그래?”
한상우는 마음에 든다는 눈빛으로 상현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곧 서로의 실력을 나눴고 상우는 바둑을 통해 상현의 됨됨이를 좀 더 파악할 수 있었다.
그날 저녁,
선우는 설연에게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조만간 큰 언니 덕에 국수를 먹게 될 것 같다는 연락이었다.
-그래? 잘됐네.
“그르니까~~”
설연은 선우가 묻지도 않은 오늘 일에 대해 구구절절이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오오~ 그랬구나. 바둑 초단?!! 아버님이 좋아하셨겠네.
“그러니까, 내 말이. 호호호호~~~”
며칠 후,
한 명의 낯선 이방인이 기성 건설을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투자회사 에서 나왔습니다.”
“투자회사 이요?”
비서는 의아한 얼굴로 남자를 봤다.
“……?!!”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아랍인이 그녀 앞에 서 있었다.
“네, 투자회사 입니다. 유상현 실장님을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자, 잠깐만요. 지금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개의 회사가 만들어지고 수백 개의 회사가 문을 닫는다.
누군가는 좋은 투자자를 만나 기사회생하고 누군가는 투자자를 찾지 못해 그대로 망하기도 한다.
투자회사 은 이미 알려진 대로 엄청난 자금을 움직이는 회사였고 동시에 굉장히 좋은 투자자이기도 했다.
이날 저녁,
설주와 만난 상현이 입에 침을 튀겨가며 오후에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와아~ 잘됐다. 정말 축하해.”
거액의 계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에 설주 역시 크게 기뻐했다.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이상해.”
“뭐가?”
상현의 말에 설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회사 일이 잘 풀렸으면 된 거 아냐?”
“잘 풀려도 너무 잘 풀려서 그래.”
“응?”
“투자회사 말이야.”
“거기가 왜?”
“우리와 이번에 계약한 공사의 수주액이 무려 500억이야.”
“헐! 무슨 공사가 그렇게 커?”
“놀라지 마. 500억이 다가 아니야. 1차 공사 가격만 500억이야. 2차, 3차 공사도 예정되어 있다고.”
“대……박!”
“그래. 정말 대박이야. 근데 이상해.”
“뭐가?”
“왜 하필 기성 건설일까? 우리보다 뛰어난 건설 회사들도 많은데 말이야. 더욱이 컨소시엄 얘기조차 없었어. 즉 기성 건설 단독이란 말이지.”
“……?”
이와 같은 시각,
윤대중 대통령은 소파에 앉아 시름에 잠겨 있었다.
1998년 2월 대한민국 대통령에 취임한 윤대중 대통령은 앞으로 몇 개월 후면 대통령직에서 퇴임을 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재임 기간 중 IMF라는 긴 터널에서 빠져 나왔고 남북 정상회담(2000년)을 가졌으며 그 공로로 인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해 세계 각국의 축전을 받기도 하였다.
“해피 그룹과 투자회사 …….”
대한민국 경제 회복에 성삼이나 대현과 같은 대기업들이 많은 노력을 했지만 민생의 안정을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의외로 해피 그룹과 외국계 투자회사 이었다.
“대통령님. 최선우 작가님이 도착하셨습니다.”
“들어오시라고 하게.”
잠시 후,
선우가 모습을 보이자 DJ가 자리를 권했다.
“안녕하세요. 대통령님.”
“최 작가, 어서 오게.”
“잘 지내셨죠?”
“물론이지. 자! 자! 어서 이쪽으로 앉게나.”
“네.”
“그래. 오늘은 무슨 일로 날 찾았나?”
“사실…….”
선우는 불필요한 탐색 대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기로 결심했다.
몇 번의 만남을 통해 이미 DJ가 선우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투자회사 과 해피 그룹이 평택시에 대규모 투자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대규모 투자?”
“네.”
선우의 직설적인 말에 DJ의 표정이 진중해졌다.
“IMF를 졸업했지만 아직 대한민국 곳곳에 실업자들이 넘치고 있습니다. 정부 차원의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아직은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더욱이 서울을 제외한 지방으로 내려가면 갈수록 더욱 그렇죠. 언제나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궁극적으로 한국의 성장에 언제인가는 커다란 벽으로 작용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옳은 말이야. 하지만 정부도 나름대로 투자를 해왔고 앞으로도 지속적인 투자를 할 것이네.”
“물론입니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한번 보시죠.”
선우는 평택에 대한 투자 계획서를 꺼내 놓기 시작했다.
종이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DJ의 얼굴에 놀란 표정이 드러났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건 정말 놀랍군. 의 역량이 이 정도였나?”
경제에 밝은 대통령답게 선우가 보인 계획서의 가치를 알아본 것 같다.
“대한민국 경제에 확실히 도움이 되겠군.”
“저희는 최선의 힘을 다해 노력할 겁니다. 대통령님. 하지만 정부와 지자체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합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여의도 면적에 이르는 도시가 사유화가 될지도 모르겠군.”
“대통령님의 걱정 역시 충분히 공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을 생각해 보십시오. 공과(功過)를 떠나 그분이 행한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지금까지도 국민들 입에 회자(膾炙)되고 있습니다.”
선우는 자신의 주장에 쐐기를 박기 위해 마지막 서류를 오픈했다.
“이것은 투자회사 이 앞으로 보유하게 될 경제 자유 구역 지분의 20%를 대한민국에 헌납하겠다는 약정서입니다.”
“……!!”
선우의 승부수가 통했음일까?
몇 가지 안전장치를 해놨지만 DJ는 선우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그를 믿겠다는 신호다. 계획서 몇 장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DJ는 자신의 안목을 믿었다.
또한 선우에 대한 믿음 역시 그만큼 확고했음이다.
“그럼 저는 물러가겠습니다!”
선우는 제안서를 제출하고 그대로 물러났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
DJ의 연락에 기획재정부 장관과 차관, 국토관리부 장관이 줄줄이 소환되었다.
* * *
-대산은행 본점.
김세윤 은행장의 방문이 벌컥 열리며 한 여인이 들어왔다.
“선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싸늘한 인상의 여인이 상현을 쏘아보며 물었다.
하지만 상현은 태연한 모습으로 반문한다.
“뭐가?”
“우리 결혼이요. 정말 취소할 건가요?”
“응.”
“그럼 기성 건설이 아주 어려워질 텐데요.”
“걱정해주는 거라면 고맙지만 방금 막 해결했어. 안 그렇습니까, 행장님?”
“……그래. 하나야. 기성 건설의 채무가 해결되었단다.”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빠!”
이때 잘생긴 아랍인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행장님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저희가 기성 건설이 가지고 있던 부채 일체를 매입했습니다. 그러니까 대산은행이 보유하고 있던 기성 건설의 부채는 지금 이 시각부터 0원이 됐죠.”
“당신은 누구죠?”
“투자회사 에서 나왔습니다.”
“펜이요? 흥!”
여인은 코웃음을 치더니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상현을 노려보았다.
“한국에서 못 빌리니까 어디 아랍까지 가서 돈을 빌려왔나 보죠?”
“뭐라고요?”
선우는 그녀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낮은 음성으로 이어진 상현의 말에 애써 화를 가라앉혔다.
“참으세요. 원래 저런 여자예요.”
“파혼하시길 잘했네요.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파혼하길 잘했다는 모욕적인 말에 하나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며 고성이 터져 나왔다.
“뭐? 야! 너 지금 뭐라고 했어?”
그러나 그녀를 만류한 것은 그의 아버지다.
김세윤 행장이 영국계 투자회사 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기름진 아랍 새끼 따위가 감히…….”
“하나야!!”
하나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의 아버지가 나서서 그녀를 만류했기 때문이다.
“아빠! 아빠도 방금 들었…….”
“그만, 그만하라니까!”
김세윤 행장의 연이은 만류에 그녀는 부르르 떨리는 몸을 애써 진정시켰다.
평소와는 다른 아버지의 모습에 그녀 역시 저 재수 없는 아랍인의 위치가 생각보다 높다고 느낀 것이다.
김하나는 성격이 개차반일 뿐이지 아예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가 직접 나서서 만류하는 상황에 상대에게 덤벼드는 것은 매우 좋지 않은 행위였다.
김하나는 결국 한 발짝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흥!!”
그녀는 고개를 휙 돌리더니 그대로 은행장실에서 나갔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초중증의 천둥벌거숭이로군.’
“상당히 표독하죠?”
상현이 김세윤 행장을 의식해 아주 낮은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네, 상당히.”
그 후,
기성 건설이 대규모 공사를 따냈다는 소식과 함께 거액의 투자를 받았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형부.”
“오~ 둘째 처제.”
밝은 웃음을 지으며 달려온 설희는 기쁜 듯 상현의 손을 잡았다.
“요즘 좋은 소식이 들리던데요?”
“어, 어떻게 알았어?”
“제가 로펌에 있잖아요. 이 동네가 원래 빨라요. 암튼 축하드려요.”
“흐흐흐~ 고마워. 둘째 처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