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02화
102화 한설주의 사랑
“설주야. 한설주~~”
“어머~ 언니.”
“너 휴가 내고 미국에 갔었다며, 언제 들어왔어?”
“들어온 지 며칠 됐어요.”
-흠칫!
익숙한 음성에 뒤를 돌아본 기성 건설의 유상현 실장은 하마터면 손에 쥔 샴페인 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설주?!”
표정 관리를 하려고 애썼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한편 상현과 눈이 마주친 설주는 단번에 고개를 돌렸다.
하필 여기서 만나다니!!
신경이 쓰였지만 이미 헤어진 사이다.
설주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설주야, 이거 먹어봤니?”
“……마카롱이네요.”
“어머~ 알고 있었어?”
“네. 예전에 프랑스에 여행 갔다가 먹어 봤어요.”
“맛있지? 이거 진짜 맛있지 않니? 호호호호~”
“…….”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던 상현은 그녀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모두 그의 잘못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대놓고 비난한다 해도,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휴우……!”
그는 몇 번의 망설임 끝에 설주에게 걸어갔다.
“……오랜만이네.”
“그래.”
“누구? 아는 분이니?”
“네, 언니.”
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다는 것을 느꼈을까?
언니라는 여자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조용히 자리를 피해줬다.
“설주야, 다음에 연락해. 밥 한번 먹자.”
“네. 언니. 고마워요.”
“뭘~~”
그녀가 사라지자 설주는 상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이야?”
“머리 스타일이…….”
“응. 잘랐어.”
“혹시 나 때문에…….”
“상현 씨, 오버하지 마!”
“…….”
단답형으로 대답하는 그녀의 음성에서 한겨울의 냉랭함이 느껴졌다.
사실 두 사람은 얼마 전까지 사귀는 사이였다.
그런데 얼마 전, 유상현이 그녀에게 일방적인 이별을 통보한 것이다.
“헤어지자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미안해.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연인의 갑작스런 이별 통보에 그녀는 목이 잠겼다.
“뭐가 미안해? 장난하지 마.”
-장난 아니야.
“뭐?”
-장난 아니라고! 우리 이만 끝내자.
“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왜 그래, 상현 씨. 무슨 일 있어?”
유상현 실장은 이빨을 꽉 깨물며 그녀에게 폭언을 던졌다.
-사실을 원해? 그래, 좋아. 그렇다면 사실을 말해주지. 네게 질렸어. 그래서 다른 여자를 만났고. 이제 됐어?
“……나쁜 놈.”
집에 돌아온 설주는 그날 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잠시 소름끼치는 적막이 흐르고 설주가 입을 열었다.
“솔직하게 말할게. 아직 상현 씨. 얼굴 보는 게 편하지 않네.”
“……!”
불쾌한 감정을 담아 노려보는 모습에 상현의 마음이 아파온다.
마치 날카로운 비수가 그의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날 밤,
약속을 어긴 미안함에 설주의 방을 찾은 설연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설주의 모습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상현을 봤다는 말에 설연의 얼굴색이 변했다.
“뭐? 미친 거 아냐?!!”
더욱이 설주에게 말을 걸었다는 사실에 그녀는 격한 반응을 내보이기도 했는데, 얼마나 화가 나고 억울했는지 선우에게 그녀의 분노를 토로하기까지 했다.
“그게 정말이야?”
“어. 그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나쁘지 않아?”
“…….”
남녀 사이의 일은 한쪽 말만 들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설주 누나의 일이었다.
“이름이 뭐라고?”
“유상현.”
“뭐 하는 사람이야? 누나랑은 어디서, 어떻게 만난 거고?”
“자세히는 모르지만 건설 회사 임원이라고 들었어.”
선우는 관심을 가지고 설연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며칠 후,
기성 건설 유상현 실장에 대한 보고서를 살펴본 선우의 눈에 모종의 빛이 일어났다.
‘이상하네. 이 사람, 나쁜 사람이 아니야. 오히려 괜찮은 사람 같은데?’
그는 재벌 3세답지 않게 평판이 꽤 좋았다.
‘근데 왜 그렇게 모질게 끝낸 거지? 응! 이건?’
보고서 말미에 기성 건설의 현 상황이 간략하게 설명되어 있었는데, 그것을 확인한 선우의 미간이 살짝 움직였다.
‘설마?’
다음 날,
기성 건설의 유상현 실장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아!”
낯선 이는 자신을 투자회사 의 임원이라 밝혔다.
“네, 알겠습니다. 좋습니다. 모비딕 호텔이요?”
-김포 공항 근처에 신축된 호텔입니다. 주소는…….
“네, 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저녁에 뵙죠.”
호텔 모비딕은 에서 인수한 호텔로 몇 년 전 신축 공사 중에 IMF가 터져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주인이 바뀌고 나서야 완공되었다.
객실 200개의 5성급 호텔이다.
선우는 한 층 전체를 그의 집무실로 꾸며 놓았다.
다음 날 저녁,
유상현 실장이 호텔에 도착했다.
“유상현 실장님?”
“네.”
호텔에 도착한 상현은 자신을 맞이하는 아랍인을 보고 살짝 당황했다.
통화했을 땐 완벽한 한국인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한국말을 잘해서 놀라셨죠? 어머니가 한국 사람이에요.”
‘아버지도 한국 사람이지만요. 후후후~’
“네? 아…… 네!”
내심을 들켰다고 생각한 건지, 유상현 실장의 얼굴이 순간 붉어졌다.
“들어오시죠.”
선우는 그를 거실로 인도했다.
“이쪽으로 앉으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거실 중앙에 위치한 고급스러운 테이블.
상현은 별다른 특이점을 발견하지 못한 채, 선우의 말에 따라 의자에 앉았다.
“저희가 요청한 자료는 가지고 오셨습니까?”
“네, 여기 있습니다.”
“좋군요. 이건 저희 측이 준비한 투자 의향서입니다. 차 한잔하시면서 천천히 검토해 보시죠.”
“네.”
“무슨 차로 드릴까요? 보이차와 허브티가 있습니다.”
“……허브티로 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선우는 그를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현재 이 방에는 두 사람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다.
하지만 이 방에는 숨겨진 비밀이 있다.
양탄자 밑에 거대한 마법진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설주 누나. 내가 누나 때문에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초등학교 다닐 때 누나가 사준 통닭은 이걸로 갚은 거다.’
주방으로 들어간 선우는 상현에게 수면 마법을 펼쳤다.
-우우우웅!!
잠시 후,
의자에 앉아 서류를 살피고 있던 상현의 얼굴에 당혹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참을 수 없는 졸음이 밀물처럼 쏟아졌기 때문이다.
“저기요. 이봐요.”
“…….”
“유상현 씨?”
“…….”
“좋아.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선우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우우우웅!
“진실만을 말할지어다.”
마나를 가득 품은 고즈넉한 음성이 선우의 입에서 터져 나오자 상현의 눈이 떠졌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저 먼 산을 바라보듯 멍하니 그리고 묵묵히 앉아있을 뿐이다.
놀람, 분노, 의혹과 같은 감정이 떠오를 법도 한데 그는 어떠한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한설주와 왜 헤어졌지?”
“……그, 그건.”
상현은 잠시 말을 떠듬거렸지만 이내 마음속에 담아놓았던 진실을 토해내기 시작했고 이야기를 들은 선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회사가 어렵다고 해도 어떻게 사랑하는 여인과 헤어질 수 있는가?
“이해할 수 없군.”
“뭐가 이해할 수 없다는 거지?”
상현의 변명이 시작되었다.
“우리 가족은 둘째 치더라도 나만 희생하면 우리 회사에 적을 둔 3,000명의 직원이 살 수 있어. 그들의 가족 역시 살 수 있다고. 나 하나만 희생하면 모두가 살 수 있단 말이야.”
“…….”
그의 절규 섞인 대답에 선우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회사가 그렇게 어려운가?”
“IMF를 돌파하기 위해 발행했던 회사채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어. 우호 지분이라 생각했던 이들 역시 우리에게 등을 돌렸고 말이야. 독사와 같은 새끼들.”
“…….”
불행은 누가 진정한 친구가 아닌지를 보여준다는 말이 있다.
상현은 이번 불행을 통해 이 같은 말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 상황이 어때?”
“대산은행에서 어음을 연장해 주지 않는다면 올해가 가기 전에 문을 닫게 될 거야.”
“대산은행?”
“그래. 그곳이 기성 건설의 주거래은행이야.”
그의 이야기가 한참이나 이어졌다.
“그럼 그녀가?”
“그래. 대학 후배이자 대산은행 김세윤 은행장의 외동딸이 바로 그녀야. 작년부터 연락이 오더니 나와 결혼하자고 하더군.”
“……!!”
결혼을 말하는 그의 얼굴이 왠지 처연해 보였다.
선우가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그녀를 사랑하나?”
“그녀를 사랑……하냐고?”
그의 표정이 갑자기 험악해졌다.
“내가 그 빌어먹을 년을 왜 사랑하겠어!!”
“빌어먹을 년?!”
“그래.”
“……?!!”
선우는 상현의 심리 상태를 뭐라고 규정지어 설명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뭔가 특별한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그녀와 무슨 일이 있었지?”
“예전에 나와 사귀었지. 그러면서 동시에 내 후배를 만났어. 그뿐만이 아니야. 어느 날이었어. 외국에서 친구가 와 새벽까지 술을 마셨지. 난 그 친구를 위해 시내 중심에 있는 호텔 방을 잡아줬는데, 호텔에서 내가 누굴 봤는지 알아?”
“……그녀를 봤군.”
“그래. X발!! 내 후배와 호텔 방에서 나오더군.”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그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그년은 바람 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마자 내게 달려와 울면서 거짓말을 했어. 내 후배가 술에 취한 자길 겁탈했고 그것을 빌미로 협박까지 했다고 말이야. 난 바보같이 그 거짓말에 속았고…….”
“……!”
“하지만 그녀의 거짓말은 오래가지 못했어. 똥물에 튀겨 죽일 년 같으니…….”
욕설과 함께 이어지는 한 편의 막장 드라마와 같은 이야기에 오히려 선우가 당황했을 정도다.
이대로 듣다간 날이 샐지도 모르겠다.
선우는 급히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한설주는 어때? 그녀를 정말로 사랑하나?”
“그래. 사랑해. 여전히 그녀를 사랑해. 미치도록 보고 싶다고!!”
선우는 마법진 위에서 한설주에 대한 사랑을 외치고 있는 상현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제 상현에 대한 모든 의혹이 풀렸다.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던 선우가 시선을 상현에게 돌렸다.
한편으론 회사와 직원들을 살리기 위한 그의 선택이 이해되기도 했지만 애정이 없는 결혼은 결국 파멸이라는 것이 선우의 결론이다.
또한 설주 누나를 위해서라도 이렇게 끝낼 순 없었다.
‘쩝! 통닭값, 이자까지 쳐서 제대로 받겠네.’
무언가를 결정한 선우가 그의 입술을 꽉 깨물었다.
비록 선우가 3서클 마스터라고 하지만 이 마법을 펼친다면 그 역시 엄청난 심력과 마나를 소모해야 한다. 그것도 극도로 말이다.
“좋아. 그렇다면 이제부터 너의 미래를 보여주도록 하지.”
-우우우웅!!!
“인큐버스(Incubus) 소환.”
선우의 말에 완드가 빛나기 시작한다.
선우의 마법이 펼쳐지기가 무섭게 상현을 중심으로 희끄무레한 안개가 생성되며 몽마(夢魔)라 불리는 인큐버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편 상현은 머리털이 송두리째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선우가 만들어낸 환상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스크루지의 환상 마법!”
잠시 뒤,
상현이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