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00화
100화 <살인 약속>
기상과 함께 시작되는 구보.
다양한 체력 강화 훈련과 태권도, 사격, 유격, 화생방 등의 교육 훈련이 한 달 동안 이어졌다. 물론 스타들의 잦은 등장으로 인해 그리 많은 훈련을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번 기수 훈련병들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추적추적, 아침부터 내린 장대비가 저녁까지 이어지자 훈련소 전체가 고요했다.
물론 예정되어 있던 야외 훈련 역시 모두 취소되었다.
“얘들아. 오늘 날씨도 꾸리한데 뭐 좀 재미난 얘기 없냐?”
“형이 하나 해줄까?”
“아, 아니. 형은 됐어.”
“그래. 형은 나중에 해. 원래 주인공은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거잖아.”
“그런가?”
훈련병 박찬우는 만족한다는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야. 내가 먼저 할게. 이건 우리 사촌 형에게 들은 얘긴데…….”
훈련병 경민혁이 가장 먼저 썰을 풀기 시작했다.
행여나 투 매니 토커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안 된다는 무언의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옛날 여기 군부대에서 야간 근무를 서던 박 이병이 있었어. 어느 날 초소 경계를 나갔는데 문득 타인의 시선을 감지한 거야. 왜! 그럴 때 있잖아. 인간의 육감. 고개를 돌리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박 이병은 재빨리 쫓아가봤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어. 박 이병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다음날 근무하는 선임을 위해 초소에 간식을 두고 부대에 복귀를 했지. 그런데 말이야…….”
-꿀꺽!
날씨 탓이었을까?
훈련병들은 각기 자신이 알고 있는 혹은 자신이 겪은 무서운 이야기, 기묘한 이야기, 소름 돋는 이야기를 시작했고 다음 순간 육만수 훈련병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재판이 열렸어. 계모는 살인죄로 기소가 되었지. 하지만 1심과 2심에서 무죄를 받았어. 계모의 뒷모습이 찍힌 사진을 봤을 땐 계모가 절벽에서 소녀를 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떨어지려는 소녀를 잡으려는 사진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이었거든. 하지만 마지막 판결에서 재판의 결과가 마침내 뒤집히고 말았어. 계모는 소녀를 죽인 죄로 무기징역을 받았지.”
“어, 어떻게요?”
“사진을 엄청나게 크게 확대한 거야. 계모의 뒷모습이 아닌 절벽에서 떨어지고 있는 소녀의 얼굴을 말이야.”
-꿀꺽!!!
“이리 와서 내 눈을 봐 봐. 내 눈동자에 네 모습이 비치지?”
“……네.”
“확대된 사진 속, 소녀의 눈동자에 계모의 얼굴이 비춰졌는데, 계모가…… 웃고 있었어.”
“헉!”
“……헐!!!”
허복영 훈련병의 이야기에 내무반 동기들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거 진짜 실화예요?”
“나도 들은 얘긴데, 실제 외국에서 있었던 일이래.”
“와…… 대박!!”
“소름 돋았어요.”
“나도! 나도!!”
그 후로 오랫동안 훈련병들의 이야기가 계속되었는데, 어느 한 순간 선우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서스펜스 소설의 플롯이 떠올랐다.
-IMF로 인해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면서 우리 가족은 해체되었다.
아버지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행방조차 모르고 아버지와 이혼한 어머니는 지방으로 내려가셨다. 진실로 사랑했노라 믿었던 여자 친구는 망해버린 날 조소하며 돈 많은 선배에게 다가갔고 난 미쳐 돌아버리기 직전 군대를 도피처로 삼아 도망쳤다.
고된 훈련은 세상과 날 단절시켜 줬다.
정신을 차려보니 난 어느새 제대를 코앞에 둔 말년 병장이 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태풍으로 피해를 입은 마을에 대민 지원을 나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할머니 한 분을 만나게 되었다.
장장 일주일 동안 이어진 대민 지원, 난 할머니와 꽤 친해질 수 있었다.
“내 소원이 무엇인지 아나요?”
어느 날, 할머니가 내게 자신의 소원에 대해 고백했다.
“내 손녀보다 하루만 더 살다가 죽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몹쓸 병에 걸렸어요. 의사 선생님 말씀이 한 달을 넘기지 못할 거라고 하네요.”
문제는 다음이었다.
“그래서 손녀랑 같이 죽으려고 해요. 걔는 나 말고 가족이 없거든요.”
“……!!”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
한 남자가 8세 여아를 납치해 유린하고 잔인하게 폭행했다.
비록 여아의 목숨은 구했지만 여아는 심각한 장애를 입어 평생 불구로 살게 되었다.
“고 병장님. 제 손녀의 인생을 망가뜨린 놈을 20년 후에 죽여주세요. 그러면 내가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을 당신에게 줄게요.”
“할머니의 전 재산을요?”
“땅도 있고 읍내에 번듯한 건물도 가지고 있어요.”
“……!!”
난 무언가에 홀린 듯,
할머니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다.
난 군에서 만기 전역을 했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런데 은행을 찾은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거액의 돈이 내 통장에 입금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은행 직원의 도움을 받아 알아보았더니 얼마 전 할머니와 손녀가 세상을 떠났고 할머니의 유언에 따라 내가 거액을 상속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난 새롭게 태어났다.
할머니가 남긴 유산을 통해 해체되었던 우리 가족이 재결합되었다.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지나 나 역시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다.
그런데 할머니가 죽은 지 정확히 20년이 되는 날이다.
내게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되었다.
[놈이 출소했어요. 가서 놈을 죽여주세요.]
처음엔 장난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얼마 후,
두 번째 편지가 도착했다.
[조*순, 경기도 안*시…….]
죽일 놈의 이름과 주소가 적혀 있었다.
심장이 떨리기 시작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손과 발이 흔들렸다.
(중략)
-The End.
휴일 오후,
선우는 소설의 마지막 장을 집필한 후 조용히 손에서 펜을 놨다.
훈련병들의 무서운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얻어 완성한 그의 신작 <살인 약속>은 야쿠마루 가쿠의 추리 소설 <돌이킬 수 없는 약속>의 내용을 차용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살인 약속’이 마침내 완성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
마침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시간이 흘러 퇴소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오늘 밤이 지나고 내일이 오면 훈련병 모두가 사회로 돌아가게 된다.
훈련병들의 얼굴은 오전부터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로 가득했다.
교관들 역시 보고도 못 본 척, 마지막 날의 소소한 자유를 누리게 해주었다.
“26번 훈련병.”
“네, 훈병 최선우.”
“내일이면 나가지?”
“네, 그렇습니다.”
“기분 좋겠다.”
“네. 아주 좋습니다.”
“마지막까지 훈련에 성실히 임해서 본 교관 역시 기쁘다. 우리 기념으로 사진 한 장 찍을까?”
“네, 알겠습니다.”
-찰칵!
“26번 훈병.”
“네, 훈병 최선우.”
“사인 한 장 부탁해도 될까?”
“물론입니다.”
“고맙다.”
“19번 훈병~~”
“네, 훈병 윤성환.”
여기저기서 훈련병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우야.”
“네, 찬우 형.”
“이게 형 한국 번호고 이건 형이 미국에서 있을 때 사용하는 개인 번호야. 이 번호는 사실 형 친구 도노반이, 아! 도노반 알지? 형이랑 같이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선순데 그 친구가 무척 가정적이고…….”
“…….”
또 시작했다.
이럴 땐 빨리 말을 끊고 자리를 피해야 한다.
“어?! 중대장님. 저랑 사진 한 장 같이 찍어요.”
“서, 선우야?”
“찬우 형, 퇴소하고 연락드릴게요. 조만간 봐요.”
“어…… 어. 그래.”
선우가 훈련소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자가 혜진의 앞을 막아섰다.
“저기요.”
“네?”
“혼자 왔어요?”
남자는 실실 쪼개며 물었다.
“혼자 왔냐고요?”
“친구들과 왔는데요. 누구시죠?”
“여기, 신촌 대학에 다니는 학생이에요.”
남자는 손가락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쪽에, 친구예요?”
“그런데요.”
“저희도 마침 둘인데, 우리 합석하지 않을래요?”
“아뇨, 고맙지만 됐어요.”
“에이~ 그러지 말고 같이 마셔요.”
“미안해요. 이제 막 나갈 참이었거든요.”
혜진은 다시 한 번 거절하며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진영아.”
“응~ 혜진아.”
“이제 그만 가자.”
“옹옹옹~~”
혜진은 친구 진영에게 나가자고 했다.
그러나 남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저기여.”
“야, 야!! 이야기 좀 하자니까.”
자그만 실랑이가 벌어졌다.
“지금 하고 계시잖아요.”
“여기서 말고, 분위기 좋은 데 가서 한잔 더 하자. 얘기도 나누고 말이야.”
남자는 팔을 뻗어 해외 고급 승용차의 로고가 박힌 자동차 열쇠를 선보였다.
그의 손목에 걸린 고급 시계 역시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왠지 자신이 지닌 재력을 자랑하는 것 같다.
“오늘 오빠가 완전 뿅 가게 해줄게. 같이 가자~”
남자는 혜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만요.”
“뭐?”
“제 어깨 위에 놓인 손, 제자리에 돌려놔 주세요.”
“뭐라고? 너 지금 튕기는 거야?”
남자는 혜진을 향해 빙긋 웃었다.
“진수야, 얘 좀 봐라. 이거 완전 선순데?”
“후후후~ 명신아. 오랜만에 맘에 드는 애들이다.”
진수는 지갑에서 수표를 꺼냈다.
그것은 0이 7개 인쇄된, 1천만 원짜리 수표였다.
“오늘 나랑 놀아주면 이건 네 거야. 어때?”
“좋아! 그럼 나도 내 파트너에게 한 장 쏴주지. 하하하~”
“……하아.”
혜진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부자 부모를 만난 덕에 부(富)를 가졌지만 저렇게 돈의 가치를 모르는 녀석들이 있다.
“생각 없네요. 진영아, 가자.”
혜진과 진영은 빠른 걸음으로 클럽을 빠져 나갔다.
“야! 야! 거기 안 서.”
“야. 거기 서라고!!”
진수와 명신이 따라 나왔지만 클럽의 출구가 붐볐던 관계로 한 발짝 늦었다.
“아이 씨, 어디 갔지?”
“어?! 저기다. 지금 저쪽 편의점 골목으로 들어갔어.”
“빨리 쫒아가자.”
두 사람은 편의점까지 재빨리 달린 후 골목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이때 건장한 남자들이 나타나 두 사람의 앞을 막아섰다.
짧은 스포츠머리에 검은색 정장을 입은 사내들이다.
“이봐, 너희들.”
“……?”
“우리 잠깐 얘기 좀 할까?”
“니들은 뭐야? 우리가 누군지 알아?”
“몰라. 알고 싶지도 않고 알 필요도 없고~”
“뭐?”
“선택해. 조용히 갈래? 아님 한 대 맞고 갈래?”
“……!!”
남자의 말에 진수와 명신은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감을 잡지 못한 채 눈알만 굴렸다.
-씨익!
“어서 결정해~”
이현재 부팀장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와 그의 팀원들은 대한민국 특수부대 출신으로 사격과 격투에서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다. 원래는 별도의 경호 회사 소속이었는데 IMF의 여파로 회사가 어려움에 처하자 흑기사를 자처한 해피 그룹에 회사가 통째로 매각되었다. 물론 모든 직원의 고용 역시 100% 승계되었다. 대기업 수준의 임금과 최고의 기업 복지를 경험한 그들은 깊은 애사심과 함께 해피 그룹 소속이라는 일종의 자긍심을 가지게 되었다.
현재 해피 그룹에 소속된 보디가드들의 숫자는 물경 800명에 이른다.
이들이 관리하고 있는 사업장이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는 추세여서 연내에는 1,000명을 가뿐하게 돌파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저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남자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경호 3팀장, 용태석입니다.”
-아가씨는?
“방금 클럽에서 나왔습니다.”
-특이 사항은 없었나?
“파리 두 마리가 꼬였는데, 이현재 부팀장이 잘 해결했습니다.”
-수고했다.
“감사합니다. 이사님.”
혜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의 경호를 받고 있었다.
이것은 비단 혜진뿐만이 아니다.
선우의 지시에 의해 규용과 수연 역시 원거리에서 비밀 경호를 받고 있었다.
*<살인 약속>은 야쿠마루 가쿠의 추리 소설 <돌이킬 수 없는 약속>의 내용을 차용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