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98화
98화 투 매니 토커
선우는 자신을 흔드는 누군가의 손길에 눈을 떴다.
“선우야. 일어나.”
“……?”
“불침번, 교대해야지.”
“아!!”
그랬다.
이곳은 군대, 정확히 말하면 훈련소 내무반이다.
“일 년 같은 하루가 또다시 시작되겠군.”
선우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좀 적응이 되자 다른 것에 관심을 돌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새벽을 깨우는 나팔 소리가 시작됐다.
-빰빰빠라밤! 빰빰빠라밤!
“기상! 기상!”
곤하게 잠자던 훈련병들은 나팔 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났고 또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었다.
“선우야! 같이 가자.”
뒤쪽에서 들려오는 외침에 선우가 고개를 돌렸다.
동기 훈련생 찬우 형이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찬우 형은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하고 있는 야구 선수로 9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땄는데 그동안 선수 생활을 지속하다가 이번에 선우와 함께 훈련소에 입소했다.
“오늘 밥은 좀 맛있더라.”
“네, 괜찮더라고요.”
1주일 만에 군대 입맛이 된 것 같다.
돌도 씹어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왕성한 식욕을 보였고 심지어 뭐든 다 맛이 있어 보였다.
“오늘은 누구 안 오나?”
“……아침부터 조용한 걸 보니, 오늘은 그냥 훈련할 것 같은데요?”
“그렇구나.”
참고로 이 형은 정말로 말이 많았다.
첫날 같은 내무반 동기들에게 자기소개를 할 때에도 자신의 일대기와 근황은 물론 친구 자랑까지 끊임없이 늘어놓았는데, 소대장의 제재에 강제 퇴장 당하고 말았다.
“그…… 그만!”
“네? 아직 할 말이…….”
“됐어. 됐으니까 그만 들어가.”
“……네.”
후에 들어 보니 형은 그날 자신이 준비한 이야기의 10%도 말하지 못했다고 했다. 또한 가족에게 편지를 쓰는 시간에도 할 얘기가 너무 많다며 편지를 빽빽하게 채워 나갔는데, 나중에는 빈 공간이 없어 선우의 편지지 반을 가져가기도 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훈련소 동기 중의 한 명이 찬우 형의 사인을 받으려고 대기 중이었는데, 그 친구의 말에 따르면 5번째라고 했다. 암튼 계속 기다리고 있는데 무슨 이유인지 줄이 줄어들지 않았다고 했다. 나중에 보니 찬우 형이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인을 해주면서 도대체 무슨 말을 그렇게나 오래 하는지, 결국 시간이 없어서 그냥 자기 내무반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며칠 전이었던 같다.
야구를 좋아하는 삼성 장군이 훈련소를 찾았다.
“가장 아끼는 야구공이 있나?”
장군님의 질문에 형은,
“100개 이상의 메이저리그 야구공을 전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마다 스토리가 제각각입니다.”
“그래?”
“네. 간격이 큰 공일수록 사연이 많은데, 한 경기에 만루 홈런을 두 번 맞고 깨진 다음에도 버텨서 승리한 공이 수십 개…….”
(중략)
얼마나 말이 많았는지, 후에 자신의 부대로 돌아가는 삼성 장군의 표정이 매우 지쳐보였다고 한다.
투 매니 토커!
이때부터 훈련소 동기들은 찬우 형을 투 매니 토커(too many talker)라 부르기 시작했다.
여담이지만 찬우 형이 야구계에서 은퇴한 후,
한 인터뷰에서 ‘투 매니 토커’라고 불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밝혔다.
원래 자신의 별명은 코리안 특급이었는데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투 매니 토커’라고 부른다고 했다면서 말이다.
형은 ‘방송에서 그렇게 편집해서 그런 것이지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라고 말하면서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것에 대해 말했다고 한다.
“참~ 선우야. 이번에 형이 팀을 바꾸게 될 것 같아.”
“어디로 가시는데요?”
“아직 결정되진 않았지만 텍사스 레인브라더스, 토론토 그린제이스, 콜로라도 로켓츠가 유력한 후보야.”
“텍사스, 토론토, 콜로라도요?”
“응. 선우야. 넌 이 세 팀 중에서 나랑 가장 어울리는 팀이 어디라고 생각해?”
“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중, 뒤쪽에서 제법 덩치가 큰 한 명의 훈련생이 나타났다.
“여기에 있었네.”
그는 아시안게임 태권도 금메달리스트 조우종 선수다.
두 사람, 아니! 선우를 쳐다보는 그의 시선에서 비릿한 적의가 느껴졌다
“무슨 일이지?”
“아니, 그냥~ 니가 부러워서.”
조소가 잔뜩 담긴 표정이다.
“부러워, 뭐가?”
“X발, 부럽다는데, 뭔 이유가 있냐? 그냥 부러워서 그러지.”
분위기가 살벌해지자 박찬우가 나섰다.
“우종아. 너 왜 그래?”
“찬우 형은 빠져요.”
“뭐?”
“X발! 나도 금메달 받았는데, 누구 땜에 맨날 작업이나 하고…… 아우 씨! 내가 훈련소에 훈련 받으러 왔지, 삽질하러 왔나?!”
“야, 그게 선우 잘못이냐?”
박찬우는 그의 서운한 마음을 달래주려 했다.
“X발, 부러워서 그래요. 부러워서!”
“……?!”
조우종의 욕설에 박찬우는 잠시 그를 노려보았다.
“휴우! 됐다. 그만하자.”
“뭐가 돼요? 형은 좀 빠지세요.”
“뭐 인마?”
조우종은 박찬우를 무시하며 또다시 선우를 도발했다.
“야! 최선우, 니 여자가 설연이라며?”
“니 여자?”
“후후후~ 그래. 니 여자. 왜? 여친님이라 해야 되나? 좋아. 알았어. 그럼 니 여친님과 해봤냐? 해봤어?
“……!!”
선우의 눈빛이 강렬해지자 조우종은 순간 이상한 한기를 느꼈지만 이내 무시했다.
“야, 이 새끼야.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박찬우가 주먹을 쥐고 위협하듯 다가왔다.
“지금 당장 선우에게 사과해. 사과 안 해?”
“사과는 무슨!!”
조우종은 사과 대신 그 자리에서 뛰어올라 현란한 발차기를 선보였다.
-파파팡!
가만히 서 있는 자세에서 그대로 뛰어올라 선보인 540도 발차기다.
“뭐야?!”
갑작스런 발차기에 깜짝 놀란 박찬우가 뒤로 튕겨나듯 물러섰지만 선우는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은 채 조우종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야! 인마,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야?”
“형한테 그런 게 아니잖아요. 형은 빠지세요.”
“뭐 인마?”
그는 박찬우의 말을 무시한 채 선우를 도발했다.
“다음 교육이 태권도인 것 알지? 불만 있으면 한판 붙자고.”
조우종은 선우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이내 자리를 떠났다.
그로부터 30분 뒤,
태권도 훈련이 실시되었다.
단증이 있는 훈련병들은 수업에서 열외(列外)되었지만 선우는 참가했다.
“조교, 앞으로.”
“조교! 앞으로!!”
교관과 미리 얘기가 되었는지 태권도 금메달리스트 조우종이 시범 조교 역할로 앞에 섰는데, 후에 알게 되었는데 훈련 교관이 바로 조우종과 사촌 관계라고 했다.
이어진 태권도 수업 내내, 그는 선우를 끊임없이 도발했다.
-웅성웅성!!
“아무리 봐도 저건 일부러 그러는 것 같은데?”
“금메달리스트와 겨루기라니, 이건 말이 안 되잖아.”
“그건 그래. 하지만 상대가 받아들였으니 이젠 어쩔 수 없지 뭐.”
몇몇 훈련생들이 선우를 향해 걱정 어린 시선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럼 두 사람의 대련을 시작하겠습니다.”
교관의 외침에 선우가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최선우 파이팅!”
박찬우가 선우를 향해 주먹을 들어 보이며 응원했다.
선우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그에게 답례를 보낸 후, 정면을 바라보았다.
“어이, 원한다면 받아줄 테니까, 지금이라도 기권하지 그래?”
“내가 네게 해주고 싶은 말인데.”
“뭐?”
선우의 대답에 조우종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못 들었냐? X신아.”
조우종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미친 새끼. 니가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꼴에 공 좀 찼다고…….”
-땡!
그 순간, 대련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훈련병들은 모두 시선을 집중하며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슥. 스슥.
조우종은 선우를 정면으로 마주 본 상태에서 자세를 잡았고 선우 역시 베르하젤 체술을 준비했다.
저런 놈에겐 흑마법도 아깝다. 손맛을 제대로 보여줘야 했다.
“크아압!”
조우종의 발이 매트를 밟고 날아오르고 그의 쪽 뻗은 다리가 허공을 갈랐다.
“이 녀석이?”
조우종은 잽싸게 선우의 안쪽으로 파고들어 재차 발차기를 날렸다. 하지만 선우의 털끝조차 건드리지 못했다.
순간 조우종이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자 선우가 조소를 날렸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춤춰?”
비아냥이 섞인 조롱에 조우종의 얼굴은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그는 거친 숨을 내뿜으며 씩씩거렸다.
“저, 저 새끼가!!”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조우종이 다시 한 번 선우에게 달려들었다.
-휘이익! 휙휙휙!!
-팍, 팍팍팍! 파파파팍!!!
공격이 성공했음인가?
조우종의 발차기가 매섭게 들어갔지만 그렇다고 그의 공격이 성공하진 않았다.
선우의 손과 팔이 그의 공격을 죄다 방어한 것이다.
오히려 놀란 것은 조우종이었다.
마치 쇳덩이를 찬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무슨 놈의 팔이…….’
하지만 기회를 잡은 이상, 허무하게 날려 버릴 수 없었다.
조우종은 온 힘을 다해 맹공을 퍼붓기 시작했다.
‘몸을 뒤로 빼도 이번만큼은 내 발차기를 피할 수 없다.’
-휘이익!!
“헉?!”
회심의 일격이었는데, 선우가 갑자기 안쪽으로 달려들어 조우종의 가슴을 그대로 때렸다.
“악!”
딱 한 대를 맞았을 뿐인데, 온몸에 힘이 빠지는 느낌이다.
비웃는 듯한 선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계, 이게 끝이야?”
“이이익!!”
선우의 도발에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조우종이 발차기를 날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의 공격은 선우의 옷자락조차 건드리지 못했다.
오히려 머리부터 발끝까지 두들겨 맞았다.
고작 몇 번의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었지만 선우는 복날 개 패듯 신나게 두들겼다.
“그, 그만!”
놀란 교관이 서둘러 대련을 중지시켰지만 이미 늦은 감이 있다.
조우종은 서 있는 모습 그대로 정신을 잃었고 그의 얼굴은 이미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푼 상태였다.
“우종아. 조우종!”
당황한 교관이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묵묵부답이다.
“의무병, 어서 의무병 불러!!”
대련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저럴 수가?”
“조우종이 진 거야?”
“헐!! 금메달리스트가 저렇게 지다니!”
“완전 떡실신이네.”
주변에서 지켜보던 훈련병들이 입을 벌리며 경악했고 그중 한 명이 러시아의 특공 무술이라 알려진 시스테마를 언급했다.
“……시스테마?”
-웅성웅성!!
시스테마는 상대의 허점을 파고드는 동시에 손과 발을 사용해 상대를 공격하는 무술로 정통적인 무술과는 상이하며 그 공격 방식 역시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바뀐다.
어찌 보면 선우가 보인 무술의 형태와 매우 흡사했다.
“선우야.”
가슴 졸이며 지켜보던 찬우 형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이야~~ 최선우! 너 정말 대단한데!!”
그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선우를 칭찬했다.
선우 역시 박찬우를 향해 ‘씩’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단하긴요, 저 녀석이 허약한 거예요. 형.”
“뭐?! 하하, 하하. 하하하하!”
선우의 대답에 잠시 놀란 기색을 보였던 박찬우가 곧 큰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