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87화
87화 바람의 정령
며칠이 지났다.
평소처럼 수련을 마친 선우는 모닥불을 피우며 야영을 준비했다.
“참 멋진 곳이네.”
황혼에 물든 옐로스톤 국립공원은 광활함과 풍성함 그리고 자연의 위대함을 느끼게 했다.
선우는 간단히 요기만 하고 숲속을 좀 걸었다.
어제보다 구름이 많아 달빛이 흐릿했지만 선우는 자연이 주는 풍경에서 눈을 거두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언제 기회가 되면 설연과 한번 같이 와야겠다.”
한참을 걸은 선우가 다시 몸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몇몇 사람들이 실랑이를 벌이는 것 같았다.
“이 시간에 누구지?”
이곳은 인적이 없는 곳, 게다가 관광객들이 있을 시간도 아니었다.
“아무래도 뭔가 일이 난 것 같은데?”
선우는 은밀하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선우의 시야에 한 떼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사내, 사냥꾼들이다.’
선우는 기척을 숨기며 좀 더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꺄아아악~ 이것 놔!”
“이년아. 조용히 있어.”
“아저씨가 좋은 것 가르쳐 줄게. 가만히 있으면 다치지 않을 거야. 용돈도 줄게.”
사내들의 대화를 들은 선우의 얼굴이 한순간에 일그러졌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던 탓이다.
“그만둬.”
원주민(인디언)으로 보이는 남자가 소리쳤지만 사냥꾼들은 그를 향해 비웃음을 날릴 뿐이다.
“하하하~ 벤자민에게 이렇게 예쁜 조카가 있을 줄이야.”
“이봐. 벤자민. 죽고 싶지 않으면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야.”
가만히 보니 벤자민이라는 사내의 팔과 다리는 밧줄에 묶여 있었다.
“호, 고년 나이도 어린데, 제법 튼실하네.”
“이제 열다섯에 불과한데 이렇게 예쁘다니, 타고난 계집이야.”
“달빛 아래에서 즐긴다. 꺄! 분위기 죽이는데? 케케케케!”
“자자! 다들 이리 와. 어서 빨리 순번이나 정하자고.”
원주민 소녀를 바라보고 있는 사냥꾼의 눈은 음탕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러지 마세요. 제발 부탁이에요. 아저씨.”
“가만히 있어.”
“그래. 우리가 재미나게 해준다니까~~”
“시, 싫어요.”
소녀는 이리저리 반항했지만 남자들의 강압적인 손길을 소녀가 막을 수 있을 리 없다.
“꺄악!”
“흐흐흐흐~~”
녀석은 비릿한 웃음소리를 내며 소녀에게 접근했다.
-부욱!!
“꺄아아악~”
소녀의 비명 소리에 중년 사내가 얼굴을 붉히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만! 제발 그만둬! 부탁이야. 혼타스를 놔 줘.”
“하하하~ 어쩌지? 그건 힘들 것 같은데~~”
남자는 고개를 좌우를 흔드는 동시에 상의를 풀었다.
거무튀튀한 가슴 털이 잔뜩 성을 낸 듯 보인다.
“아, 안 돼. 안 돼. 제발 부탁이야. 혼타스를 놔 줘.”
“아우, 시끄러. 겐트! 저 새끼 좀 조용히 시켜.”
“오케이!”
-퍼억!
개머리판으로 뒤통수를 갈기자 벤자민은 그대로 쓰러졌다.
“삼촌, 벤자민 삼촌!!!”
사냥꾼들이 다가와 소녀의 몸을 붙잡았다.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는 소녀의 몸짓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사, 살려 주세요!”
소녀는 필사의 힘으로 몸을 틀었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손톱이 사냥꾼의 얼굴에 깊은 상처를 냈다.
“이런 X!”
-짜악!
“악!”
사냥꾼의 분노가 담긴 무자비한 따귀에 소녀 역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현장을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던 선우의 눈에서 마침내 불길이 폭발했다.
“인간이길 포기한 놈들에게 자비는 없다.”
-우우우웅!!!
“핸드 오브 데스.”
다음 순간,
어둠의 마나가 그들을 덮쳤다.
“허억!”
“아악! 누구야?”
삽시간에 비명과 고함 소리로 가득했다.
피하려 해도 막으려 해도 소용이 없다.
이미 어둠과 동화된 죽음의 손이 혼타스를 제외하고 저들의 몸 구석구석을 유린하며 생명력 빼앗았기 때문이다.
“일어나라, 나이트메어여. 저들에게 끔찍한 악몽을 보여줘라.”
선우는 악몽을 소환했다.
“아악!”
“으아아아악.”
“사, 살려줘.”
지옥문이 열리며 악마가 이 땅에 강림했다.
사냥꾼들은 공포에 질렸다.
-펑! 펑펑!!
한 놈이 악마를 향해 총을 쐈지만 악마가 내뿜는 붉은 안광에 총알이 흔적도 없이 녹아내리자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으으으……으.”
“으어…… 어어어…… 어!!”
악마와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리고 솜털이 곤두섰다.
-기**부쉬@알흘##우만*@%사우$소@##스칼헬츠푸…….
악마의 입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치 성대를 쇠로 긁는 것 같은 소리였는데, 그것이 흘러나오자 놈들은 죽어가기 시작했다.
죽음의 손이 놈들의 몸을 통과할 때마다 생명력이 눈에 띄게 사라졌다.
생기가 소멸돼 급격한 노화가 진행되었고 더 이상 호흡이 쉬어지지 않았다.
곧 그들의 눈과 코 그리고 귀에서 핏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잠시 후, 숲속은 침묵에 잠기고 말았다.
-우우우웅!!!
선우가 손짓하자 흙바닥이 들썩이며 한순간에 푹 꺼졌다.
이미 시체가 되어버린 사냥꾼들의 몸은 땅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Capo…… vol…… gi…… il…… terre…… no.”
흑마법이 다시 펼쳐지자 대지가 한 번 더 크게 요동을 치더니 그들을 땅속 깊은 곳까지 끌어내렸다.
-쓰쓰쓰.
심지어 흥건한 핏물마저 분해되듯 땅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그들을 삼킨 땅은 곧 단단하게 굳었다.
‘벤자민과 혼타스라고 했나?’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두 사람을 보며 선우는 잠시 고민에 사로잡혔다.
사냥꾼들은 모두 제거되었지만 이대로 떠날 수가 없었다.
숲속의 밤은 생각보다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모닥불의 온기 덕인지 벤자민과 혼타스가 깨어났다.
두 사람은 사냥꾼들이 세상과 이별을 했다는 사실을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선우는 자초지종을 대충(?) 설명해 주었다.
당신의 조카가 험악한 일을 당하기 전에 자신이 개입하게 되었고 그 결과 사냥꾼들이 물러갔다고 말이다.
벤자민은 내심 깜짝 놀랐다.
자세한 설명은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총을 소유한 여러 명의 사내를 저 남자가 물리쳤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전 벤자민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제 조카입니다.”
“혼타스라고 해요. 덕분에 위험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드려요.”
다음 날부터 세 사람의 기묘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선우는 당분간 이곳에서 수련을 계속 이어갈 생각이었는데, 두 사람이 선우에게 은혜를 갚는다며 종종 음식을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마주하는 시간이 많아지자 세 사람은 자연히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선우의 기준에서 혼타스는 꽤나 똑똑한 소녀였다.
문학과 예술에 관심이 많았지만 특히 수학에 아주 뛰어난 소질을 보였다.
옐로스톤에서의 마지막 날,
선우가 혼타스에게 물었다.
“혼타스, 너 혹시 대학에 가고 싶니?”
“네?”
그녀는 대학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 되물었다.
“대학이요?”
“응.”
“……가고는 싶지만…….”
대답을 주저하는 것을 보아하니 분위기를 알 수 있었다.
선우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눈치를 보내자 벤자민이 입을 열었다.
“만약 옥스퍼드에 공짜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어떻게 하겠니?”
“공짜로요? 그게 정말이세요. 삼촌?”
“그래.”
이미 선우와 벤자민이 말을 맞춰놓은 상황,
벤자민은 혼타스에게 그녀가 받을 수 있는 장학금에 대해 설명했다.
‘어쩌면 선우는 대단한 사람일지도…….’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면 가고 싶어요. 삼촌.”
“좋아. 그럼 이걸 받아.”
“이게 뭐예요?”
눈을 반짝이며 미소 짓는 혼타스.
“추천장이야.”
“추천장이요?”
선우는 작위를 받은 영국 귀족이며 동시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다.
그의 추천장이 가지고 있는 힘은 생각보다 매우 컸다.
그녀가 받게 될 장학금 역시 투자회사 펜의 이름으로 학교 측에 전달될 것이다.
“선우 오빠, 정말 감사해요.”
“뭘~~”
“오빠에게 받기만 하고…….”
혼타스는 잠시 뭔가를 고민하더니 이내 결심했는지 목에 걸고 있던 뭔가를 꺼냈다.
‘뭐지?’
자세히 보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드림캐처?”
드림캐처는 버드나무로 만든 고리에 끈을 그물처럼 엮고 깃털 등으로 꾸며 만드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전통 장식물이다. 깃털 이외에도 구슬이나 신성한 물건으로 장식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일종의 부적으로 악몽을 잡아(catch) 좋은 꿈을 꾸도록 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 드림캐처는 엄마의 엄마, 그리고 그 위의 엄마. 바람의 일족이라 불렸던 할머니가 물려주신 거예요. 오빠에게 선물로 드리고 싶어요. 받아주세요.”
“…….”
뭔가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다.
연이 닿아 도와주었고 재능이 보여 작은 도움을 준 것뿐이다.
선우는 거절하려 했지만 꼭 받아달라는 간곡한 눈빛에 결국 받을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앞으로 악몽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
“헤헤헤~~”
선우의 농담 섞인 말에 혼타스가 환하게 웃었다.
“자~ 여기요. 목에 걸면 돼요.”
“고마워.”
손바닥만 한 크기의 드림캐처를 받는 순간, 선우는 경악할 만큼 놀랐다.
그것은 마치 미지의 생명체가 그를 지켜보는 듯 신선하고 기이한 감각이었는데, 드림캐처의 중앙에 박힌 보석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뭐지? 서, 설마 정령석?!!’
이 세상을 형성하는 네 가지 원소는 물과 불 그리고 흙과 바람이다.
우리는 이것을 흔히 사대 원소라 부르고 이것을 관장하는 정령을 사대 정령이라 부른다. 물론 사대 정령 외에도 다양한 정령들이 있지만 앞서 언급한 사대 정령이 세상을 구성하는 기본이라 할 수 있다.
마법은 심장에 새긴 서클, 즉 자신이 보유한 마나를 이용해 펼치지만 정령 마법은 일반 마법과 그 궤를 달리한다.
마나의 양과 깨달음에 따라 마법은 점차 위력이 강한 고위 마법을 펼칠 수 있지만 정령 마법은 정령과의 친화력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이디.
혹자는 정령 마법이 일종의 소환 마법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그날 저녁,
두 사람을 배웅하고 홀로 남게 된 선우는 그제야 드림캐처를 손에 쥐고 마나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일단 정령과 계약이란 절차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우우웅!!
처음에는 그 어떤 변화도 느낄 수 없었지만 잠시 후 정령석에 마나의 기운이 합쳐지는 것을 느꼈다.
그와 함께 정령석에도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꺄르…… 르…… 르~~]
“……?!”
[……안…… 녕. 이제야 내…… 소리…… 가 들리…… 는 거야?]
희끄무레한 형태에서 벗어나 뭔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안녕.”
[안녕.]
“넌 누구니?”
[꺄르르르~ 난 바람의 정령이야.]
예상은 했지만 역시 바람의 정령이 맞았다.
“바람의 정령아, 나와 계약하지 않을래?”
[호호호~~ 좋아. 어서 내 이름을 지어줘.]
‘이름이라. 바람의 정령이니 실프가 좋겠지?’
“실프. 어때? 네 이름은 실프야. 어때?”
[꺄르르르~ 좋아.]
태초에 맺어진 언약에 따라 선우가 정령의 이름을 지어주며 계약을 맺자 하얀 광채가 터져 나왔다.
“실프~”
[응.]
“실프~~”
[응~~!]
선우는 하루에 몇 번씩 실프를 소환했다.
아직은 미약한 친화력 때문에 하루에 30분 정도밖에 소환하지 못했지만 이것은 시간이 지나면 늘어날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