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85화
85화 할아버지가 매우 위독한 러셀
“만나 뵙게 돼서 영광이에요. 이태리 작가님.”
“어! 절 아세요?”
“당연하죠. 본명은 최선우. 맨 아시아 문학상에 이어 세계 최연소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이 시대 최고의 작가. 참고로 제가 출연한 영화의 대본도 써주셨죠. 헤헷~”
리즈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선우를 쳐다보았다.
“작가님. 저도 반가워요.”
한발 늦었지만 엘리스 역시 선우에게 인사를 건넸고 두 배우의 발랄하고 생기 넘치는 모습에 선우는 기분이 좋아졌다.
“저 역시 차세대 할리우드를 이끌 두 분의 여배우를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어머머! 저희를 아세요?”
“그럼요. <룰루랄라>, <사랑보다 아름다운 애증>에 나왔잖아요. 두 작품 모두 재밌게 잘 봤어요.”
두 여배우는 선우에게 강한 호감을 보였고 그래서인지 네 사람은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작가님, 사실 저도 글을 쓰고 싶은데, 항상 어렵게 느껴져요.”
“글을 쓰고 싶다고요?”
“네. 물론 영화배우라는 제 직업을 좋아해요. 하지만 작가도 되고 싶어요.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습작을 쓰기도 하는데, 늘 제 맘에 들지 않더라고요. 혹시 글을 잘 쓰는 방법이 있을까요? 있으면 좀 가르쳐 주세요.”
결국 글을 잘 쓰는 방법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원론적인 얘기겠지만 무엇보다 많이 읽고 많이 써야 해요.”
“많이 읽고 많이 쓰기.”
“그래요. 독서와 습작이 아주 중요하답니다.”
“또요, 또 다른 건 없나요?”
“…….”
선우는 그녀의 눈빛에 나타난 진실성을 보고 그 역시 진정성을 담아 말했다.
“첫째, 첫 줄을 쓰기 전에 결말을 정해보세요.”
“결말을요?”
“네.”
“선택받은 몇몇을 제외하면 글쓰기 역시 정교한 기획이 필요하거든요.”
“……!”
선우의 말이 이어졌다.
“두 번째, 길이를 짧게 하세요. 글이 길면 길수록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에서 멀어질 수 있어요.”
“……글의 길이를 짧게 하라. 글이 길면…… 멀어질 수 있다.”
그녀는 선우의 말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종이를 꺼내 메모했다.
“세 번째, 이제 당신은 첫 줄을 시작했습니다. 그럼 클라이맥스를 구성해 보세요.”
“벌써요?”
“네. 영화를 한번 상상해 보세요. 클라이맥스가 여기저기서 터지면 될까요?”
“아!!”
영화를 예로 들어주자 확실히 인지한 모양이다.
“이 세 가지만 기억하면 저보다 더 뛰어난 작가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에이~ 설마요. 호호호~!!”
“하하하하~~”
이와 같은 시간,
운동 기구에서 몸을 일으키던 러셀이 선우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는 현재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며 인기를 얻고 있는 근육질의 액션 배우다.
“쳇! 저 자식은 뭐야?”
엘리스 실버스톤에게 연정을 품고 있어 일부러 그녀와 같은 헬스장에 다니며 열심히 작업을 걸고 있었는데, 오늘따라 자신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톰 제라즈와 같이 온 동양인 따위에게 관심을 보이자 그의 질투심이 불같이 끓어올랐다.
“호호호호~”
“깔깔깔깔~~~”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그의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젠장! 대체 뭐 때문에 저렇게 웃는 거야?”
불만이 폭주할 찰나, 러셀의 눈이 커졌다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향하는 톰을 목격한 것이다.
그는 눈엣가시 같던 톰이 사라지자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며 세 사람 앞으로 다가갔다.
“어이, 이봐.”
세 사람의 시선이 러셀에게 향했다.
“헬스장에 왔으면 운동을 해야지. 여자들과 노닥거리고 있나?”
“지금 제게 하신 말씀인가요?”
“그래.”
선우는 순간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운동을 하든 여자들과 노닥거리든 그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러셀,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
“그래요. 무례하네요.”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의 등장에 두 여인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뭐라고요?”
“못 들었어요? 어서 사과하세요.”
“헐!”
엘리스의 낮은 말소리에 러셀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미모의 할리우드 여배우가 동양인의 편을 들다니, 선우의 정체에 대해 알 리가 없던 러셀은 지금의 상황이 당최 이해되지 않았다.
‘뭐야? 어디 돈 많은 나라의 왕족인가?’
하지만 기차는 이미 떠났다.
이대로 물러나기에는 그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뒤로 물러나지 그래요. 이건 남자들의 대화니까.”
“뭐라고요?”
러셀은 더 이상 엘리스를 상대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돌려 선우를 응시했다.
“왜! 내 말이 틀렸나? 칭크(Chink)!”
“칭크?!”
“그래. 칭크. 여자를 만나고 싶으면 당장 클럽으로 꺼지라고.”
이번에는 리즈가 끼어들었다.
“러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작가님께 어서 사과하세요.”
“……작가?”
저 조그만 년이 뭐라고 계속해서 조잘대는 탓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지만 그래도 얻은 것이 있다.
동양인의 직업이 바로 작가라는 사실이었다.
‘훗~ 작가라면 내 상대가 될 수 없지.’
“사과라니, 무슨 사과? 먹는 사과?”
“뭐, 뭐라고요?”
이때, 뒤쪽에서 낮은 음성이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이지?”
톰이다.
그가 다시 등장하자 좌중은 조용해졌다
“이봐, 러셀. 이 친구는 내가 초대한 손님이야.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 네. 그렇군요. 톰의 손님이었군요.”
러셀은 두 손을 들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이것은 톰과 싸우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톰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쳇! 톰이 오기 전에 혼쭐을 내줬어야 했는데.’
러셀은 사과하는 척, 고개를 살짝 숙였지만 선우에게 조소를 날렸다.
“톰의 손님. 만약 제가 무례했다면 사과드리죠. 후후후.”
러셀이 불쑥하고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청하는 것이다.
근육질의 할리우드 액션 배우답게 러셀의 손은 매우 크고 단단해 보였다.
조금 과장하면 숫제 솥뚜껑과 비슷했다.
‘호오, 그래서 이렇게 자신만만했군.’
그의 의중을 짐작한 선우는 태연하게 손을 내밀었다.
‘큭!’
선우의 손을 잡은 러셀은 실소했다.
‘이게 뭐야? 애기 손이야?’
그가 잡은 손은 너무나 말랑하고 부드러웠다.
액션 배우인 러셀은 상대의 손을 잡아 보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의 힘을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역시 작가로군.’
묘한 미소와 함께 러셀은 맞잡은 손에 슬며시 힘을 가했다.
선우의 손 전체를 거의 감싸 쥐다시피 한 러셀의 커다란 손아귀가 조여 들기 시작했다.
“……!!”
그의 악력은 일반인의 기준에서 보면 굉장했다.
‘헤헤, 이 자식아. 아파 죽겠지? 어서 소리쳐 봐. 아프다고 외쳐 봐. 그럼 또 알아? 내가 바로 놔줄지? 헤헤헤헤~’
이 정도의 힘이라면 상대는 지금 손가락이 으스러지는 고통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그의 예상과 다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응?’
부드럽고 말랑했던 상대방의 손에서 갑작스럽게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어, 어! 이것 봐라.’
러셀은 온몸의 힘을 쥐어짜 그의 손아귀로 밀어 넣었다. 그러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말았다.
“윽!”
-우두두둑!!
선우의 강력한 손아귀 힘에 러셀의 손가락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제야 사람들은 선우와 러셀이 악수를 빙자한 힘겨루기를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으아……아…… 윽!”
괴성과 함께 러셀의 얼굴에 진땀이 번져 나오자 선우는 손에서 힘을 뺐다.
여기서 조금만 더 힘을 주면 그의 손가락뼈가 전부 부서질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후우!”
러셀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 나왔다.
그는 방금 자신이 겪은 일이 믿기 힘든 듯, 그의 손과 선우의 손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개자식,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은 게 분명해.’
좀 전의 고통은 그의 기억에서 사라졌고 그 자리에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이 들어왔다. 더욱이 연모하는 여인 앞에서 그런 수모를 당한 것이다.
러셀은 이대로 끝낼 수 없었다.
“이봐, 자신 있으면 한번 해보지 않겠어?”
러셀은 선우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곧바로 바벨 기구에 몸을 실었다.
그러고는 단숨에 기구를 들어 올렸다.
-탕!
“어때?”
“……원한다면!”
선우의 입가에 절로 피식거리는 웃음이 머금어졌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는 놈들이 저렇게 있었다.
‘가소로운 녀석.’
선우는 그 즉시 봉이 휘어질 만큼 두툼한 원판을 무지막지하게 끼웠다.
“선우?”
톰 제라즈는 놀란 얼굴로 선우를 바라보았다.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니야? 그러다 다칠 수…… 헐!!!”
바벨의 무게를 보고 선우를 만류하려던 톰의 음성이 순간 멈추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바벨을 들어 올렸기 때문이다.
더욱이 선우는 매우 평온한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엘리스와 리즈 역시 깜짝 놀랐다.
작가의 지성미(知性美)가 사라진 곳에 무리를 이끄는 강력한 수컷의 향기가 배어 나왔기 때문이다.
-두근두근.
‘너, 너무 멋있는 것 아니야?’
‘꿀꺽! 저기요. 오빠라 불러도 되죠? 오늘부터 오빠 팬 할래요.’
선우의 힘이 미모의 할리우드 여배우들을 황홀경에 빠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와는 반대로 러셀의 표정은 굳어지고 있었다.
잠시 후,
헬스장이 발칵 뒤집혔다.
선우의 무자비한 힘에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몰려든 것이다.
-웅성웅성!!
“뭐야! 저기서 더?”
“저, 저게 대체 얼마야?”
“양쪽 합쳐서 300Kg은 되는 듯.”
“저 몸에 데드리프트 300을 저렇게 쉽게 한다고? 저거 사기 아냐?”
“사기는 무슨, 저기 봉 휘어진 것 안 보이냐?”
선우의 팔에서부터 시작된 미세한 근육들의 움직임이 마치 하나의 예술품을 보는 것 같다. 그리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데드리프트 300을 든 러셀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와! 대박. 4, 400이야.”
“우워워!! 자세 예술이다.”
사람들이 토해내는 감탄 섞인 탄성에 기분이 업 된 선우는 좀 더 피치를 올렸다.
“한 번 더~”
“한 번 더~~ 한 번 더~~”
“와아아아아!!!”
선우는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그렇게 그의 마지막 데드리프트를 끝냈다.
“톰.”
“어? 어.”
“아까 그 자식은 어디 갔어요?”
“할아버지가 위독하다고 문자가 왔대. 내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그래서요?”
“데드리프트 400kg을 할 때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사라졌어.”
“…….”
액션 스타 러셀이 꼬리를 말고 도망쳤다는 사실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할리우드 전체에 알려졌다.
사람들은 그런 러셀을 두고 ‘할아버지가 매우 위독한 러셀’이라 불렀는데, 선우와의 악연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은근히 뒤끝 있는 선우로 인해 그는 할리우드에서 조기 은퇴를 경험하게 되었고 후에 *르노 배우로 전향했다는 소문만이 무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