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80화
80화 은혜 갚은 까치
“얌마! 최선우. 너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던 원석의 목소리는 심히 불안했다.
“지금 어디야?”
-…….
“……알았다. 바로 갈게.”
-달칵!
“오빠, 선우 오빠랑 연락됐어요?”
“어. 방금 통화했어.”
“다행이네요. 그동안 어디에 있었대요?”
“…….”
원석은 아내의 물음에 답하지 않은 채, 옷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어디 가세요?”
“연세 중앙 병원.”
“병원이요?!!”
원석의 말에 그녀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바뀌었다.
“아버님이랑 어머님이 교통사고를 당해 중환자실에 계시대. 두 분 모두 위중하신 것 같아.”
“아!!”
“여보. 나 지금 가봐야 할 것 같으니까, 당신은 애들 좀 챙기고 이따 와.”
“그, 그래요. 그렇게 할게요.”
“……그리고 여보!”
“네?”
“혹시 여윳돈이 있을까?”
“여윳돈이요?”
“응. 당신도 선우 사정 알잖아.”
“……30만 원 정도밖에 없어요.”
“30만원? 그것밖에 없어?”
“저번 달에 부모님 환갑이었잖아요.”
“아! 그, 그랬었지.”
원석은 난감한 표정이다.
“일단 이거라도 가지고 가세요. 전당포에 맡기면 그래도 좀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여, 여보!!”
그녀가 원석에게 건넨 것은 결혼 예물로 받은 반지와 목걸이였다.
중환자실에 들어간 아버지 규용과 어머니 수연은 만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하지만 선우는 슬퍼할 시간도 없었다.
여동생 혜진 역시 식물인간인 상태로 그의 도움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연세 중앙 병원 원무과]
부모님의 장례식이 끝나고 원무과에 들렀다.
“계산이 끝났다고요?”
“네. 가족분이 대신 하셨어요.”
“가족, 가족 누구요?”
“삼 일 내내 같이 계셨던 분이요.”
“아!!!!”
삼 일 내내 함께 있었던 사람이라면 원석이가 유일했다.
녀석이 장례 비용을 계산한 것이다.
처음엔 난감했다.
원석의 사정을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 미안하고 고마운 감정이 들었다.
선우는 즉시 원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전화기가 꺼져 있습니다.
이상한 일이다.
원석의 전화기가 계속 꺼져 있다고 한다.
“참! 핸드폰이 고장 나서 며칠 통화가 힘들 거라고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
원무과 직원의 말에 선우는 애써 참아왔던 눈물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친구의 우정과 배려가 너무나 감사했기 때문이었다.
“보조 출연자를 했었다는 말이 사실이었네.”
인연은 인연이라는 건가?
안 그래도 찾아보려고 했는데, 결국 이렇게 만나게 되었다.
그것도 손만 뻗으면 닿을 지척의 거리에 있었다.
“자자! 5분 후에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식사 다 하셨으면 이쪽으로 모여 주세요.”
이때, 멀리서 촬영을 재개한다는 AD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석 씨, 지금 촬영 재개한다는 말, 못 들었어?”
“……!!”
어느새 다가온 오진규 반장이 원석을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그만 처먹고 빨리빨리 움직여.”
“네, 반장님.”
오 반장의 핀잔에 원석은 촬영장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이동했다.
잠시 후,
촬영이 재개되었다.
모자를 눌러쓴 선우는 이인학 PD의 옆자리에 앉아 배우들을 바라보았다.
‘석이는 어떤 식으로 연기할까?’
선우는 친구의 연기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원석은 비중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보조 출연에 불과했지만 눈빛 하나는 살아있었다.
‘흐음! 열정이 보이네. 재능도 있어 보이고, 일단 합격.’
이미 주역과 조역에 대한 캐스팅이 모두 완료된 상황이다.
하지만 그가 누군가? 이 드라마의 메인 작가가 아닌가?
드라마에 있어서 메인 작가의 힘은 그야말로 무소불위(無所不爲)다.
하루아침에 주인공을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며 왕자에서 거지로 만들기도 했다.
‘그래! 그냥 이참에 하나 만들어 주자! 드라마 중반부터 등장하는 인물이지만 비중도 좀 있고 이왕이면 멋진 역할로~~’
선우는 촬영이 이어지는 동안 원석에게 맞는 역할이 뭐가 있을지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선우의 이 같은 결정에 드라마 담당 PD인 이인학 역시 난감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어쩌랴!! 앞서 언급했듯 드라마에서 작가는 소위 말해 갑이다. 더욱이 이번 드라마는 노벨상을 수상한 이태리 작가의 작품이지 않은가? 그 누구도 반대를 표명하지 못했다.
그날 밤,
촬영을 마친 원석이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삐삐삑!
-철컥!
행여 가족들이 잠에서 깰까 봐 까치발을 하고 방에 들어온 원석은 곧장 쓰러지듯 침대에 몸을 눕혔다.
“하아.”
내 집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느낌에 폐부 깊은 곳에서부터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18평 남짓한 다세대 주택.
원석에겐 쌍둥이 여동생과 어머니 한 분이 있다.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삼남매를 키우고 계신 어머니.
어머니의 수입으로는 생활비와 동생들의 학비를 대기에도 빠듯했다.
원석이 고등학생 때부터 각종 아르바이트를 한 덕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지만 대학 등록금을 해결하기엔 많이 부족했다.
“……좀 더 힘내자, 원석아.”
원석은 통장에 찍힌 잔고를 보며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때였다.
얼마 전, 보조 출연자를 하려면 꼭 필요하다는 말에 장만한 PCS폰이 울렸다.
“밤늦게 누구지?”
원석은 행여나 가족들이 깰까 봐 얼른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원석 씨?
“네, 전데요. 누구시죠?”
-어. 나 박문규야.
“네?!!”
캐스팅 디렉터의 전화를 받은 원석은 곧이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제, 제가 캐스팅되었다고요?”
-그래. 원석 씨. 축하해.
“……!!”
통화를 끝낸 원석은 자신의 볼을 꼬집어보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보조 출연자에 불과한 그가 <도깨비의 신부>에 캐스팅되었다고 한다!
얼핏 들었지만 그가 맡은 역은 드라마 중반부터 고정으로 출연하는, 비중 있는 조연이라고 했다.
-원석 씨, 대본 가지고 있지?
“대본이요?”
-응.
그 순간 원석의 시선에 닳고 닳은 <도깨비의 신부>의 대본이 들어왔다.
보조 출연자지만 저 대본을 얼마나 읽고 또 읽어보았는가!!
그 덕에 드라마의 지문 전체를 통째로 외울 수 있었지만 말이다.
-이번에 추가된 부분은 원석 씨 메일로 보냈으니까 읽어보고 잘 준비해.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축하해.
“감사합니다. 감독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원석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만큼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음이다.
‘대체 누가 날 추천한 거지? 조순애 AD, 유진규 FD, 설마 이인학 PD님?’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며칠 후,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원석이 서둘러 몸을 씻고 옷을 챙겨 입는다.
“벌써 나가니?”
“네, 엄마.”
아들의 이른 외출 준비에 원석의 어머니는 고무장갑을 착용한 상태로 그대로 나왔다.
“어머?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니?”
원석의 얼굴에 그려진 미소에 그녀가 물었다.
“다녀와서 말씀드릴게요.”
어머니에겐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혹시 뭔가 착오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그래, 알았다. 궁금하지만 일단 참아볼게. 대신 이따 저녁에 얘기해 줘야 해.”
“네. 엄마.”
“암튼 우리 아들 참 멋있네.”
그녀는 원석의 옷매무새를 다시 한 번 정리해줬다.
“아들. 엄마가 아들한테 늘 고마워하는 것 알고 있지?”
“아유~ 제가 뭘 한다고 또 고마워하세요. 다들 하는 거예요.”
엄마의 고맙다는 말에 원석은 쑥스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
“암튼 고마워. 오늘도 일 열심히 하고 차 조심하고.”
“어머니, 어머니의 아들은 다섯 살 먹은 애가 아닙니다. 이제 성인이라고요.”
“그래도 엄마 눈엔 애 같아.”
“큭큭큭! 알겠어요. 엄마. 차 조심할게요. 그러니 이제 들어가세요. 장갑에서 물 떨어져요.”
“어머머~ 그래. 알았다.”
그때였다.
원석의 쌍둥이 여동생 미라와 세라가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왔다.
“오빠~”
“벌써 나가?”
둘은 현재 고등학교 1학년이다.
“좀 더 자지. 오빠 때문에 깼구나.”
“아잉~ 미라는 괜찮아.”
“세라도 괜찮아. 막 일어나려고 했어.”
“훗~~!”
보기만 해도 절로 흐뭇한 광경이다.
이런 게 가족이 아닐까?
원석은 미라와 세라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오늘 저녁에 오빠가 통닭 사올게. 공부들 열심히 하고, 이따 학교 잘 다녀와. 알았지?”
“통닭? 치느님?”
“그래. 치느님.”
통닭을 사다준다는 말에 미라와 세라의 눈이 번쩍였다.
“미라는 양념이 쪼아요!”
“오라버니. 세라는 프라이드요.”
“야! 최세라. 양념이 맛있거든.”
“그건 아니지. 맛은 오리지널이 최고란다. 미라야.”
“야! 아니라니까.”
“됐거든요.”
“이게~~~!!”
치킨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원석의 중재가 필요했다.
“어여쁜 동생들아. 오라버니의 말을 좀 들어볼래?”
평소보다 굵은 저음의 목소리다.
이것은 후에 연기자 원석의 트레이드마크가 된다.
각설하고 원석은 잠시 텀을 두었다가 다시 물었다.
“양념 한 마리 그리고 프라이드 한 마리. 오늘은 통닭 파티! 오케이?”
“Good!”
“I agree~”
미라와 세라 역시 만족했다는 미소를 지었다.
-[스튜디오 One]
현재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도깨비의 신부>의 출연 배우들이 스튜디오에 속속히 모습을 보이고 있다.
‘최원석이 누구지? 아이돌 출신인가? 아니면?’
6화 이후, 거의 매회 등장하게 되는 조연.
철부지 도련님의 모습이지만 반전의 비밀을 감추고 있다.
드라마 말미에 그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상당한 비중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이, 낙하산.”
“……?!!”
“너 말이야. 너!”
두리번거리는 원석을 향해 남자 배우의 날카로운 시선이 쏟아졌다.
그는 이번 드라마에서 주인공 도깨비 역을 맡은 배우 공윤이었다.
“네? 네. 선배님.”
“너 누구 백으로 들어왔니?”
“…….”
목소리에 날이 서 있다.
그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는 따끔한 적의였다.
“들어보니 소속사도 없고 연기 경험도 없다면서.”
‘하긴, 나였어도…….’
원석은 공윤의 지적에 말없이 그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말처럼 소속사도 없고 그렇다고 눈에 띄는 경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수십 회의 보조 출연이 경력의 전부였다.
“너 작가님이랑 무슨 관계냐?”
“작가님이요?”
“그래. 널 이 자리에 꽂은 게 작가님이라고 하던데?”
“……아!!”
원석은 작은 탄성을 터트렸다.
이제야 그의 캐스팅에 관련된 사정을 알아차린 덕이다.
한편 공윤 역시 이와 같은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연예계라는 정글과도 같은 세상에서 이런 일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드라마 중간에, 그것도 연기 경력도 없는 생판 초짜가 난입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야…… 이…… 개…….”
한마디 욕설이라도 퍼부어주려고 했는데, 그 순간 원석이 손에 들고 있는 대본에 눈길이 갔다.
얼마나 읽었는지, 너덜너덜해진 대본이다.
“그거 네 대본이냐?”
“네. 선배님.”
“이리 줘봐.”
-스윽!
한두 번 읽어 해진 게 아니었다.
적어도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은 읽은 대본이었다.
‘……노력은 했다는 건가?’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원석은 공윤의 침묵이 길어지자 긴장이 되는 듯했다.
“내 앞에서 발연기 하지 마라. 알겠냐?”
“네, 선배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지켜보지.”
원석을 바라보고 있는 공윤의 표정이 조금 전과 다르다.
하지만 긴장한 나머지 원석은 그런 공윤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