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69화
69화 6편의 할리우드 영화
“마, 맙소사! 어떻게 이런…….”
하나의 대본이 끝날 때마다 톰 제라즈의 입에서 감탄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3시간이 지나는 동안 톰은 처음과 같은 자세로 한 치의 미동도 없이 6편의 대본을 모두 읽어내는 기염을 토해냈다.
“내가 주인공을 맡으면 안 될까?”
“어떤 작품?”
“여섯 개, 전부!”
톰 제라즈의 욕심에 선우는 그저 미소를 지어보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장난해? 한 작품 이상은 안 돼.”
“아! 작품이 모두 맘에 들어서 그래. 두 작품은 안 될까?”
“안 돼! 하지만…… 톰, 당신이 진정으로 원한다면 감독을 맡겨 줄게.”
톰은 복잡한 표정으로 선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제작은?”
“당연히 톰과 내가 공동 제작으로 가는 거지, 대신 배급사는 브로(Bro)가 원하는 곳으로 껴줄게. 어때?”
선우는 진지한 자세로 톰과 눈을 마주쳤다.
“젠장! 알았어. 그럼 당장 찍자고!”
“몇 편?”
“6편, 모두!”
이 중 톰이 주인공으로 출연하기로 결정한 작품은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이고 감독을 맡을 작품은 <천공의 검투사>다. 조엘 깁슨 형님과 테일러 스콧 감독에게는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다. 대신 최대한 원 역사와 비슷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을 알아주기 바란다.
아무튼 이렇게 톰의 참여가 결정되자 영화와 관련된 일은 빠르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며칠 후,
할리우드가 발칵 뒤집혔다.
“이태리 작가가 대본을 썼다고? 이리 좀 줘봐.” (제임스 캐리)
“헐! 시나리오 죽이는데?” (러셀 소우)
“계약서 가지고 와. 당장 사인해야겠어.” (필 잭맨)
“이 친구 참 대단하네. 대체 못하는 게 뭐야?” (톰 뱅크스)
“톰! 나도 이 영화에 투자하고 싶은데, 가능할까?” (로버트 니드로)
톰 제라즈를 통해 대본을 전달받은 배우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영화에 출연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왔다. 그리고 그 결과 마치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영화의 주조역이 정해지게 되었다.
이제 6척의 배는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출항하게 되었고 선우는 갈퀴로 돈을 쓸어 담을 준비만 하면 됐다.
“으아아~~~”
침대에 누워 두 다리를 쭉 뻗었더니 세상 행복하다.
그런데 갑자기 허기가 느껴졌다.
선우는 바람도 쐴 겸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호텔에서 나왔다.
“음~ 저기가 좋겠네.”
호텔 주변을 살펴보니 마침 괜찮아 보이는 레스토랑이 눈에 들어왔다.
선우는 가면을 착용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 고르곤졸라 피자 한 조각이랑…… 주세요.”
바텐더는 잠시 선우의 모습을 위아래로 살펴보더니 물었다.
“음료는 무엇으로 드릴까요?”
“다이어트 콜라면 됩니다.”
선우는 팁으로 20불짜리 지폐를 바텐더에게 건넸다.
-꿀꺽!
탄산음료 특유의 짜릿함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느낌이 끝내준다.
“목이 마르셨나보군요. 한 잔 더 드릴까요?”
“네, 감사합니다.”
-꿀꺽!
“크으~~”
두 잔을 연거푸 마신 후에야 선우는 만족했다는 미소를 지었다.
이때, 한 여인이 묘한 눈빛을 보이며 선우에게 다가왔다.
“와우. 너무 터프하게 마시는 것 아니에요?”
“……?”
짙은 향수 냄새가 선우의 코끝을 자극한다.
고개를 돌리자 이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미모의 여인이 선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국인?’
서양 사람들의 관점에서 볼 때 동양인들은 다 거기서 거기로 보인다.
구분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동양인을 만나면 그들이 중국인인지 아니면 일본인인지 그것도 아니면 한국인인지 대체로 잘 구분할 수 있다.
“저도 한 잔 사줄 수 있나요?”
“훗! 그래요. 어려울 건 없죠.”
선우가 한국말로 답하자 여인은 깜짝 놀랐다는 듯 두 손을 활짝 펼쳤다.
“어머머~ 한국인이세요?”
“네. 근데 중동 사람처럼 보이죠?”
“아, 아니요. 한국분으로 보였어요.”
“훗~”
그녀의 대답에 선우는 그저 가벼운 미소를 응했다.
“뭐 마실래요?”
“정말 사주시는 거예요?”
“네.”
“그럼~~ 저는 가볍게 칵테일로 한 잔 할게요.”
여인은 바텐더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나직이 말했다.
“섹스 온 더 비치(Sex on the Beach), 플리즈~”
“……!”
남자를 유혹하는 음성인가? 아니면 몸짓인가?
그녀는 칵테일을 받자마자 아주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양팔을 이용해 가슴을 모았다. 선우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녀의 가슴골로 향했다.
탐스럽게 솟은 가슴이 주위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 같았다.
‘예술 점수 8점, 기술 점수 10점, 몸매 점수 9점.’
만약 올림픽 경기에 ‘유혹’이라는 종목이 있었다면 그녀는 아마 10점 만점에 9점을 받았을 것이다.
“뭐 하시는 분이세요? 사업가?”
“네. 비슷해요.”
“LA엔 혼자 오셨어요?”
무엇이 그리 궁금한지, 그녀는 선우를 향해 연신 질문을 토해냈다.
“단순한 여행 아니면 비즈니스?”
자신의 이름을 수진이라고 밝힌 그녀는 선우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이따금씩 대범하게 선우를 유혹했다.
그녀는 어떻게 해야 남자의 기분을 UP시킬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때 수진이 선우의 귀에다 입을 대고서 말했다.
“……같이 나갈래요?”
“…….”
그때였다.
“하이! 수(Su)~”
초대하지 않은 이들이 나타났다.
검은 가죽점퍼를 입은 덩치 좋은 백인 한 명과 흑인 한 명이다.
그들은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수진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연락이 안 되어서 계속 찾아다녔는데, 역시나 여기에 있었군.”
두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수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다.
“수(Su). 내 말이 우스워? 아님 죽고 싶은 거야?”
수진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대답했다.
“미, 미안해요. 일부러 안 받은 건 아니에요. 일단 이거라도 드릴게요. 그리고 나머지는 이번 주 안에 꼭 갚을게요.”
“50불?”
돈 관계에 엮여 있는 것 같다.
분명한 건 남자들이 그녀에게 화가 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X발! 내가 거지로 보이나? 이거 가지고 뭐 하라고!”
녀석은 그녀가 건넨 돈을 바닥에 던지는 동시에 선우를 향해 누런 이빨을 내보이며 씩 웃었다.
“이 아랍인은 뭐야? 아~~ 혹시 영업 중이었나?”
녀석은 겁도 없이 손을 뻗어 선우의 얼굴을 툭툭 쳤다.
“어이~ 이년은 말이야…… 억!”
녀석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선우가 녀석의 오른손을 잡고 그대로 힘을 주었기 때문이다.
순간 녀석은 가슴속으로부터 절로 터져 나오는 비명을 삼켜야만 했다.
너무나 아파 입 밖으로조차 내뱉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으윽’
도저히 사람의 손아귀 힘이 아닌 듯했다.
말로 표현하지 못했을 뿐이지 녀석의 얼굴에 참을 수 없는 고통의 기색이 나타나자 녀석의 동료 역시 경악했다.
“뭐, 뭐야! 그 손 놔. 당장 놓지 못해?”
급기야 녀석의 입에서 쌍욕이 튀어나오며, 거칠게 선우의 어깨를 잡아 왔다.
“퍽(F**k)!”
그 순간 선우의 왼손이 짧은 궤적을 그리며 녀석의 갈비뼈를 그대로 때렸다.
“컥!”
어딘가 부러지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녀석은 극통(極痛)을 호소하는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쓰러지고 말았다.
“버릇없는 놈 같으니, 너도 한 대 맞자.”
흑인 녀석의 손을 잡고 있는 선우의 오른팔이 팔꿈치를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자 녀석은 그대로 회전하여 바닥을 굴렀다.
-꽈당!!
부연 설명이 많았지만 거구의 사내들이 쓰러진 것은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와우! 저 아랍인, 무술의 달인이야.”
“저 큰 거구 두 사람을 순식간에 제압했어!”
“대단해, 정말 대단해~!!”
사람들의 감탄성이 이어지는 가운데 수진은 두 눈을 둥글게 뜨며 놀란 표정으로 선우를 바라보았다.
“……일단 나가죠.”
선우가 수진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녀 역시 선우의 뒤를 이내 쫒아가기 시작했다.
데이트에 대한 생각은 이미 안드로메다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빚이 있나요?”
“……!”
선우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았다.
사실 그냥 모른 척하며 사라질 수 있었지만 그러기엔 왠지 찜찜했다.
“사채를 썼나요? 빚이 얼마예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죠?”
빚에 대한 말이 나오자 그녀는 불쾌한 눈빛을 보였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요. 사람은 그 상황이 되지 않으면 모르는 거니까.”
“네?”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선우의 입에서 나온 엉뚱한 소리에 수진은 의아하다는 눈빛을 보였다.
“섣부른 판단을 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뭐라고요?”
“콜걸이 꿈인 사람은 없습니다. 말해 보세요. 당신에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선우의 직접적인 질문에 그녀의 얼굴이 점차 붉은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말해 보세요.”
수진의 눈을 다시 한 번 강력하게 쳐다보자 그녀의 눈빛이 크게 한 번 흔들렸다.
“……혹시 불 있어요?”
수진은 한 모금의 담배 연기를 천천히 들이마셨다.
“……절 도와주셨는데, 인사가 늦었어요. 짐작을 하셨겠지만 그래요. 돈을 빌렸어요.”
막힌 둑에 구멍이 뚫려 물이 흘러나오듯, 그녀의 스토리가 시작되었다.
“저는 교포 3세예요.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던 할아버지가 1977년 가족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오셨죠. 제 아버지는…….”
(중략)
“오리엔탈 콤플렉스?”
“네, 오리엔탈 콤플렉스요.”
미국에서는 한때 다운증후군을 오리엔탈 콤플렉스, 몽골리즘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다운증후군 환자의 얼굴이 동양인(몽골로이드)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동양인을 비하하는 의미였다.
미국 사회의 주류인 백인들의 눈에 비친 동양인은 장애인인 것이다.
여기에 영어 실력이 부족해 말까지 더듬는다면? 실제로 장애인으로 취급했다는 뜻이다.
“그들의 눈에 비친 아버지는 장애인이었어요.”
“……!”
그녀의 이야기는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가족을 위해 휴일을 반납하기까지 하며 밤낮없이 세탁소에서 일하던 그녀의 아버지는 사소한 실수로 인해 손님의 옷을 분실했다고 한다.
옷값 3,000불을 전액 배생하겠다고 했지만 손님은 그 제안에 거부를 표했고 그녀의 아버지는 다시 한 번 손님에게 물질적 피해 보상에 정신적 보상까지 합쳐 1만 2,000불을 배상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손님은 그것마저 거부했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를 대상으로 사기, 과실, 부당 이익 취득 혐의로 도합 1,000만 불을 배상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고 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죠?”
“결과만 이야기하자면 아버지가 승소했어요.”
“다행이네요.”
“다행이라……. 그렇게 볼 수도 있죠. 하지만 재판 과정 내내 하루가 멀다 하고 날아오던 고소장과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이 가득한 증명서! 아버지와 우리 가족들의 정신은 나날이 피폐해졌어요.”
마치 그날의 기억을 회상하듯 수진의 대답이 이어졌다.
“재판 결과가 나온 날, 저는 남자에게 물었어요. 왜 이런 소송을 벌였냐고 말이죠. 그런데 말이죠. 돌아온 답이 참으로 가관이었어요.”
“뭐라고 했는데요?”
“Ye**ow mo***y, go home!”
“……!!”
이민자들이 세운 나라 미국.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천명하는 나라 미국.
하지만 어두운 이면을 들여다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이민자들에 대한 인종적 차별이 21세기에도 존재하고 있었다.
“3년 동안 이어진 재판. 결과는 승소였지만 변호사 비용이 엄청나더군요. 아버지는 집과 가게를 잃었고 거액의 빚을 지게 됐어요. 저희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요.”
수진의 두 눈에는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선우는 문득 그녀와 그녀의 가족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지금 당장이라도 펜을 들고 원고지를 펼치고 싶었다.
“……빚이 얼마예요?”
그날 밤.
선우는 자음과 모음의 향연에 취해 수진의 이야기를 적어 나갔고 소설 <이방인>은 그렇게 탄생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