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63화
63화 영국 왕립 학술원 정회원
“마, 맙소사. 정말 찾아냈어.”
선우를 믿어 객원 연구원의 자리를 내줬지만 사실 세바스찬 램지 경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가 그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를 찾아내고야 만 것이다.
얼마 후,
영국 문학계에서 명망이 높은 이들이 학술원에 속속히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여긴 내 자리요.”
“저기요. 내가 다리가 불편해서 앞으로 가야 하니 좀 비켜주세요.”
“어허! 밀지 마세요.”
영국 문학계에서 방귀 좀 뀐다고 알려진 사람은 죄다 모인 것 같다.
수용 인원을 진즉 넘긴 까닭에 학술원 직원들의 움직임이 굉장히 분주했다.
“다들 뒤의 사람 가리지 않게 잘 앉아주세요.”
“에반 작가님. 그쪽에 앉으시면 됩니다.”
“홀리번 작가님. 미리 좌석을 예약하지 않으셨네요. 죄송하지만 계단에 앉으셔야 해요.”
-웅성웅성!!
마치 도떼기시장에 온 것처럼 질서가 없다.
한마디로 좀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시끌벅적한 상황이었다.
앳된 인상의 동양인 청년, 최선우가 강단에 섰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주변이 조용해졌다.
“안녕하세요. 이태리 작가입니다. 저는 오늘 영국 왕립 학술원의 객원 연구원 자격으로 셰익스피어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고자 합니다.”
단순한 인사말에 불과했지만 모두가 선우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정확히 1시간이 지나자 선우의 발표가 마무리되었다.
“……그러므로 셰익스피어가 동양철학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짝짝짝짝!!!
-짝짝짝짝짝짝!!!
“지금부터 논문과 관련해 질문을 받겠습니다.”
질문을 받겠다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람들의 질문 세례가 시작됐다.
“저는 셰익스피어 학회의 도널드 멀린입니다. 오늘 작가님의 발표를 매우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희 학회가 가지고 있는 자료에…….”
“저는 디킨스 학회 무어 작가입니다. 오늘 작가님께서 주장하신…….”
웬만한 작가들은 명함도 내놓지 못할 영국 문학계의 저명한 작가들이 질문을 쏟아 부었다.
“도널드 작가님과 무어 작가님이 해주신 질문에 대한 답은 나눠드린 자료 87페이지와 102페이지를 보시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웅성웅성!!!!
“흥미로운 발표입니다. 저 역시 한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네. 질문하십시오.”
“작가님께서는 베니스의 개성상인에 대해 말씀하셨는데요. 먼저 그가 과연 실존했던 인물인지 아니면 작가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인물인지 알고 싶습니다.”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이탈리아 작가 엔조 테이의 <베니스 연대기> 162페이지와 안토니오 다 레초의 <라 베리타> 221페이지를 보면 개성상인에 대한 글이 있습니다. 같은 시기를 살았던 몬테 클라우디오 주교의 자서전을 보면 161페이지에는 그와 개성상인과의 만남이 쓰여 있죠.”
선우의 대답은 막힘이 없었다.
“또한 그들과 동시대를 살았던 화가 카바라도시의 그림을 살펴보십시오. 이와 같은 복식과 복장은 조선 시대의 복식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관련 자료 251페이지를 보면 한눈에 알 수 있을 겁니다.”
“……?!!”
“흐음!!”
사람들은 선우의 답변과 그가 내놓은 증거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셰익스피어에 관해서라면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의 질문에도 불구하고 선우는 한 치의 주눅도 들지 않고 당당히 대답했다. 일말의 긴장감도 보이지 않았다.
“좋습니다. 작가님의 주장처럼 두 사람이 만났다고 칩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셰익스피어가 동양철학에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모두가 선우를 바라보았다.
선우는 기분 좋은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이건 셰익스피어가 그의 사촌 동생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
“……?!!”
“왕립 학술원에서 이번 연구를 진행하다가 발견했는데요. 이 편지를 보면 꼬레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나는 베니스에서 꼬레를 만났고 그에게 동양의 오행 사상에 대해…….’”
좌중은 깊은 침묵에 잠겼다.
선우의 음성만이 오롯이 학술원 강당 안에 울려 퍼졌다.
모두가 반박조차 하기 힘든 증거를 제시한 결과다.
“또 다른 질문이 있습니까?”
“……!!”
“……!!”
모두들 아무 말이 없다.
그저 충격에 빠진 표정이었다.
‘후후후~ 질문이 있을 리가 없지. 모두 본인에게 직접 확인한 사항이니까.’
장장 세 시간 동안 이어진 질의가 마침내 그 끝을 보였다.
“더 이상의 질문이 없으시다면……. 그럼 이만 마치겠습니다.”
선우는 너무나도 당당한 걸음으로 강단에서 내려왔다.
때마침 터져 나온 박수 소리가 아니었다면 이 기나긴 침묵과 충격은 아주 오랫동안 유지되었을 것이다.
-짝!
-짝……짝짝…….
-짝짝짝짝짝짝짝!!!
학술회 발표가 끝나자, 사람들이 세바스찬 램지에게 몰려 들었다.
그중에는 왕립 학술원 원장을 비롯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의 질문은 모두 동일했다.
“대체 이태리 작가가 누굽니까?”
다음 날,
영국 문학계가 발칵 뒤집혔다.
-<셰익스피어를 말하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세계관 속, 동양의 철학>
-<셰익스피어를 말하다: 베니스의 개성상인과 오행설(五行說)>
전날 학술원에 참석치 못한 일부 학자들이 거센 반발을 보였지만 선우가 학술원 측에 제시한 반박할 수 없는 증거들이 속속히 공개되자 언론의 호평 속에서 학자들의 반발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학 관련 세계 유수의 학회와 잡지에서 영국 왕립 학술원으로 빗발치듯 문의가 쇄도했다.
-이태리 작가가 누굽니까?
-대체 누구냐고요!!
앞서 영국의 작가들이 세바스찬 램지 경에게 던졌던 질문과 비슷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세계 문학사에서 셰익스피어가 가지고 있는 위상을 생각해 보라.
그의 논문은 발표와 동시에 크나큰 화제를 몰고 왔고 동시에 세계 문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네, 이태리 작가님이 그분입니다.”
“<태리 포터>아시죠? 네. 맞습니다.”
“‘Terry Lee’, ‘Lee Terry’, ‘Lee Taeri’ 모두 같은 분입니다.”
“작가님의 본명이요? 최선우가 작가님의 본명입니다.”
이 일을 통해 이태리 작가(최선우)의 이름이 세계 문학계를 흔들었고 그가 가지고 있는 위상 역시 껑충 뛰어올랐다.
그리고 얼마 후,
이태리 작가의 신작, 추리 소설 <셰익스피어 코드>가 세상에 선을 보였다.
* * *
“조쉬, 너도 읽어 봤어?”
“뭘?”
“셰익스피어 코드.”
“……셰익스피어 코드? 그게 뭔데?”
-툭!
“이태리 작가의 신작이야. 장르는 추리 소설이고.”
“추리 소설? 이태리 작가가 추리 소설을 썼어?”
“응. 한번 읽어봐.”
그 말을 끝으로 미국의 촉망받는 작가 에이미는 밖으로 나갔다.
조쉬는 고개를 갸웃하며 책장을 넘겼다.
-주인공 토마스는 과거 작가를 꿈꿨지만 현재 고서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서점상이다. 어느 날 그는 휴가차 떠난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누군가의 장례식에 참석하게 된다. 그는 과거 토마스와 교류를 나눴던 작가였다. 우여곡절 끝에 토마스는 고인이 남긴 유품 중에서 한 권의 고서를 구입하게 되는데 그 고서 안에는 오랫동안 숨겨져 있던 한 장의 편지가 있었다.
“……!!”
첫 장을 넘기는 순간 조쉬는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흠! 이건 뉴턴의 사과군요.
-이 글은 인간의 작품이 아니라 신의 작품일세. 광기의 시대, 격동의 시기에 인간들이 만들어낸 꿈의 산물이자 기적처럼 떨어진 신의 선물이야.
-토마스. 어서 가야 해요. 놈이 왔어요. 놈이 왔다고요.
그리고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서도 그는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태리 작가의 신작이자 그의 첫 번째 추리 소설 <셰익스피어 코드>는 공상과 추리의 향연이다.” -작가 에이미 에일린.
“셰익스피어에 대해 확인된 사실들과 함께 소설 곳곳에서는 이번에 새롭게 밝혀진 사실들이 날카로운 송곳처럼 날아와 독자들의 마음을 파고든다.” -작가 그리핀 몰리앙.
“그의 글은 내 심장을 뛰게 한다.” -작가 수앤 캐슬린 롤링.
“단언하건데 그는 이 시대의 문호(文豪)다.” -작가 세바스찬 램지.
이와 같은 시각,
모종의 회의가 왕립 학술원 내부에서 열렸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세바스찬 램지가 윌리엄 원장을 향해 미소를 보이며 물었다.
“그래요. 충분하다 못해 넘치네요. 해박한 지식은 물론 우아함마저 느껴지는 글이었습니다. 저 역시 램지 경의 의견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윌리엄 원장은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다른 분들은 어떠십니까?”
“동의합니다.”
“저 역시 찬성합니다.”
대다수가 찬성의 뜻을 밝혔지만 입을 꼭 다문 이도 있었다.
“딜런 작가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세바스찬 램지의 질문에 그는 잠시 눈썹을 꿈틀했다.
이미 대세는 찬성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인정하기에 그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그의 실력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동양인이고요. 왕립 학술원은 영국뿐만이 아니라 전 유럽을 대표하는 곳입니다.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저 역시 딜런 작가님의 말에 동의합니다. 그는 너무 어립니다. 조금 더 지켜보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베일런의 동조에 딜런은 고맙다는 시선을 그에게 던졌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대세는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허허허! 여러분.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물론 우리의 선배들도 알아내지 못한 것을 저 어린 친구가 해내지 않았습니까? 이런 인재를 놓친다면 분명 후회할 겁니다.”
“세바스찬 작가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저 역시 이태리 작가를 우리 왕립 학술원의 정회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학술원 회원 중에서 가장 연배가 높은 찰스 에든버러 경이 말문을 열었다.
“사실 학술원에 오기 전, 이태리 작가의 단편 <지평선이 보일 무렵>과 장편 <아빠를 부탁해>를 읽어보았습니다. 단언컨대 그는 이 시대가 낳은 최고의 작가가 될 겁니다. 기회가 왔을 때, 우리는 이러한 인재를 잡아야 합니다.”
에든버러 경의 극찬에 좌중은 조용해졌고 딜런의 표정은 냉랭하게 굳어졌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자 윌리엄 학술 원장이 사람들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어느 정도 중지(衆志)가 모인 것 같으니 오랜 전통에 의거해 이 자리에서 거수로 결정하겠습니다. 찬성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주십시오.”
윌리엄 원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바스찬 램지가 손을 들었다.
-슥!
-스윽, 스윽! 슥!!
그의 뒤를 따라 다수의 사람들 역시 거수했다.
과반이 훌쩍 넘자 부정적인 의견을 제시한 사람들마저 결국 손을 들었다.
이것은 과반이 넘으면 모두가 손을 들어 만장일치로 귀결시키는 학술원의 전통에 따른 행위였다.
“만장일치(滿場一致)로군요. 모두들 감사합니다. 그럼 이태리 작가를 영국 왕립 학술원의 정회원으로 영입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날 이태리 작가(본명 최선우)는 영국 왕립 학술원 정회원으로 추대되었다.
동양인 출신 회원이 학술원 내부에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모두 객원 회원일 뿐, 정회원이 된 것은 학술원 역사상 그가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