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54화
54화
런던 HSBK 은행.
월요일이라 그런지 객장 안은 사람들로 붐비는 모습이다.
선우는 번호표를 뽑고 자신의 차례가 오길 조용히 기다렸다
-딩동.
한 30분쯤 기다렸을까?
187번이라는 선우의 숫자가 전광판에 나타났다.
창구로 걸어가자 여직원이 그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손님. 어떻게 오셨나요?”
“계좌를 확인하고 싶어서요.”
“신분증은 가지고 오셨죠?”
“네. 여기 있습니다.”
-일십백천만십만…….
잠시 모니터를 지켜보던 여직원이 곧 화들짝 놀랐다.
“자…… 잠시만요.”
모니터에 찍힌 숫자는 58,400,374.
5,840만 파운드, 달러로 바꾸면 7,860만 달러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통장에 찍힌 숫자를 보니 그 역시 실감이 나질 않았다.
‘현재 환율이 1달러에 1,700원 정도니까 이 돈을 한화로 환산하면…….’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무려 1,300억이 넘는 금액이 그의 영국 계좌에 잠자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더욱더 놀라운 사실은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소설 <태리 포터>가 완결이 나려면 아직 반 이상이 남아 있다. 또한 완구, 문구, 게임 산업과 같은 2차 산업으로 파생될 막대한 수입도 예약되어 있었다.
선우의 예상에 따르면 현재 그의 통장에 들어온 금액의 몇 배나 되는 돈이 앞으로 들어오게 될 것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손님.”
HSBK 은행 런던 지점의 제레미 홀튼 지점장이 선우 앞에 나타났다.
“이태리 작가님이시죠?”
“어떻게 알았습니까?”
“브론즈베리 출판사에서 매달 거액의 인세가 저희 은행으로 들어오고 있는데, 그걸 모른다면 바보겠죠. 참고로 수앤 작가님의 인세 역시 저희 은행으로 들어오고 있답니다.”
“하하하~ 그렇군요.”
그의 말처럼 보낸 사람 이름에 브론즈베리 출판사의 이름이 떡하니 찍혀있으니 모르면 간첩이었다.
“제 사무실에 아주 맛있는 홍차가 있는데, 한잔하시겠습니까?”
“좋죠.”
선우는 제레미 홀튼 지점장의 사무실에서 따뜻한 홍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MBA를 받았고 PJ 모건에서 경력을 쌓아 현재 HSBK 은행 런던 제3지점을 맡고 있었다.
“투자요?”
“네.”
“기업을 설립하시겠다는 말입니까?”
선우는 한국인이다.
그가 영국에서 사업을 하게 되면 세금 문제에 있어서 자국인에 비해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을 테니 법인을 만들어 절세해야 한다.
이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선우의 대답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건 아닙니다.”
“네?”
“비슷하지만 좀 다릅니다.”
선우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에 대해 설명했다.
“……투자에 관심이 있지만 그렇다고 전문적으로 나설 생각은 없습니다. 지점장님도 아시다시피 제 본업은 글을 쓰는 작가이기 때문입니다.”
“네.”
잠시 후,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제레미 지점장이 입을 열었다.
“작가님은 이율이 높지 않아도 안전하게 자산을 불리는 동시에 작가님이 원하는 순간, 원하는 금액을 자유롭게 투자하고 싶다는 말씀이죠?”
“네.”
“투자에 대한 책임은 당연히 작가님 본인에게 있는 거고요.”
“아주 정확합니다.”
제레미 지점장은 선우가 원하는 바를 꼭 집어 말했고 선우 역시 만족했다는 표정이다.
“가능한가요?”
“물론이죠. 가능합니다.”
제레미 지점장은 HSBK 은행의 VVIP 고객만을 위한 자산 관리 프로그램을 소개했다.
고정 금리로 1년에 3%의 이율을 주지만 무엇보다 선우가 원하는 것처럼 입출금이 자유롭고 투자 관련 자문을 받을 수 있으며 수익금에 대해 전담 회계사와 세무사를 지원한다. 또한 법적인 분쟁이 있을 경우에도 HSBK 그룹 법무 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PJ 모건과 같은 투자 전문 회사에 자산을 맡기면 1년에 평균적으로 6~8%의 수익을 보장해 주는 것과 비교해 차이가 있었지만 선우는 제레미 지점장의 제안이 마음에 들었다.
“좋군요. 마음에 듭니다.”
선우는 만족했다는 듯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똑똑똑!
그때, 처음에 봤던 여직원이 사무실로 들어와 선우에게 뭔가를 건넸다.
“이게 뭐죠?”
“신용카드입니다.”
“신용카드요?”
“네.”
그녀가 가지고 온 것은 다.
이 카드는 상위 계층에서도 상위 계층만이 가질 수 있는 부의 상징이었다.
-티타늄 재질에 결제 한도는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무제한이라는 말이 있지만 사실은 한도가 있다. 2015년 중국의 금융 재벌 ‘류이첸’ 선라인그룹 회장이 1억 7,040만 달러(한화 1,948억)짜리 그림을 이 카드로 구매했다고 한다.)
-세계 주요 대도시에서 쇼핑할 경우 쇼핑 도우미가 붙는다.
(뉴욕 메이시스 백화점에 연락을 하면 모든 직원이 한 시간 먼저 출근해 단독 쇼핑을 즐길 수 있다.)
-주요 콘서트, 스포츠 이벤트 시 모든 좌석이 매진되어도 일등석에서 관람이 가능하다.
-공식 론칭은 미국, 남미, 일부 유럽 국가, 아시아는 일본, 싱가폴, 홍콩이다.
-정확한 가입 조건은 대외비지만 부와 명성을 고려해 초대해서 가입을 시킨다.
위의 설명 외에도 다양한 혜택이 있지만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처럼 작가 역시 배가 살짝 아픈(?) 관계로 생략하도록 하겠다.
각설하고 선우는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사람이었다.
를 받기에 부족한 것이 전혀 없었다.
선우는 은행에서 나온 후, 가족들과 함께 백화점을 찾았다.
여행의 백미는 쇼핑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내일이면 그를 제외하고 모두 한국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선우는 마지막 코스로 백화점 쇼핑을 선택했다.
“백화점?”
“네.”
백화점에 쇼핑하러 가자는 말에 규용은 난색을 표했지만 수연과 혜진은 쌍수(雙手)를 들고 환영했다.
“호호호~ 여행의 백미는 역시 쇼핑이지.”
“우리 오빠가 뭘 좀 아네. 쿄쿄쿄~”
두 여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호텔을 나섰다.
“아들~ 인세가 꽤 많이 들어왔나 보구나.”
“네. 생각보다 많이 들어왔네요.”
“후후후~ 그럼 난 백만장자 아들을 둔 아버지가 된 건가?”
규용의 너스레에 선우는 의미심장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백만장자가 아닌 천만장자입니다. 몇 년 안에 억만장자가 될 거고요.’
선우는 백화점에 도착하자마자 선언하듯 말했다.
“가격에 상관하지 말고 마음껏 보고 계세요. 대신 전 아버지랑 시계 좀 먼저 보고 올게요.”
“그래, 아들.”
“천천히 와도 돼. 오빠~~”
선우는 일단 규용과 함께 시계 매장에 들렀다.
여자들의 로망이 명품백이라면 남자들의 로망은 당연히 시계이기 때문이다.
수억 원의 가격을 자랑하는 명품 시계가 눈앞에 펼쳐졌다.
“휘유~~”
파텍 필립과 바쉐론 콘스탄틴이 역시나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저기요. 저기요~”
“네.”
규용의 부름에 매장 직원 제프리가 다가갔다.
그는 이미 규용과 선우가 매장에 들어올 때부터 두 사람을 스캔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이 시계 좀 볼 수 있을까요?”
“네?”
“여기 이 시계요. 좀 자세히 보고 싶어서요.”
시계를 보여 달라는 말에 제프리는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경험상 이들은 시계를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손님, 이 시계는 파텍 필립입니다.”
“그런데요?”
“……3층에 가시면 손님이 원하는 시계를 보실 수 있을 것 같네요.”
“뭐라고요?”
제프리의 대답에 규용은 물론 선우의 표정마저 굳어졌다.
“뒤에 손님이 계셔서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제프리는 어이없어하는 규용과 선우를 뒤에 놓고 자리를 옮겼다.
“뭐 저런 놈이…….”
항의를 표하려는 규용을 선우가 만류한다.
“아버지, 잠깐만요. 제가 해결할게요.”
제프리에게 걸어간 선우는 지갑에서 카드를 한 장을 꺼내 그에게 던졌다.
-툭!
“지금 이게 뭐 하는……?!”
선우의 무례한(?) 행동에 발끈하던 제프리의 얼굴이 이상하게 변하더니 이내 하얗게 질렸다.
“소, 손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프리는 연신 허리 숙여 사과했지만 선우는 무덤덤하게 한마디를 던졌을 뿐이다.
“슈퍼바이저, 플리즈!”
잠시 후,
선우를 통해 전후 사정을 전해들은 백화점 총지배인은 죽을 맛이었다.
“대체 직원 교육을 어떻게 시킨 겁니까?”
“죄송합니다. 고객님.”
“옷차림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겁니까?”
“……모두 제 불찰입니다.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점장의 계속된 사과에 옆에 있던 제프리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버렸다.
“아버지, 이쯤하면 되겠죠?”
“그래. 저 자식 놀란 것 좀 봐라. 이렇게 크게 한번 혼났으니 다음엔 그러지 않겠지. 이만하면 됐다. 이제 그만하자. 선우야.”
“네. 아버지.”
두 사람이 한국말로 대화했기에 점장과 제프리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사과를 받아들이죠.”
“정말이십니까? 가, 감사합니다. 고객님.”
“거기, 제프리라고 했나요?”
“네, 고…… 고객님.”
“다음부턴 옷차림을 가지고 손님을 판단하지 말아주세요. 알겠죠?”
“네, 고객님. 용서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때 전화기가 울렸다.
여동생 혜진이다.
“어, 혜진아. 왜?”
-오빠, 여기 헤르메스 매장인데, 빨리 좀 와줘.
“어, 알았어. 바로 갈게.”
뭔가 다급해 보이는 목소리에 선우는 바로 간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버지.”
“무슨 일이니?”
“혜진이 전화인데요, 지금 헤르메스 매장으로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저기요! 이거 지금 바로 계산해 주세요.”
“네, 고객님.”
“아~ 그리고 죄송한데, 헤르메스 매장으로 가져다 줄 수 있나요?”
“당연히 가져다 드려야죠. 예쁘게 포장한 후, 제가 직접 헤르메스 매장으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블랙 카드 소유자라 그런 건지 백화점 점장이 직접 가져다준다고 한다.
“감사합니다. 점장님.”
선우는 그 즉시 헤르메스 매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규용 역시 그런 선우의 뒤를 쫓아갔다.
“이봐요. 이건 내가 먼저 골랐다고요.”
저 멀리 매장 입구에서부터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혜진아, 무슨 일이야?”
“오빠! 아빠!!”
지원군의 등장에 목소리에 힘이 느껴진다.
“어, 혜진아. 대체 무슨 일이야?”
“글쎄 저 여자가…….”
혜진의 말에 의하면 수연이 마음에 드는 백(헤르메스 버킨백)을 골랐는데, 나중에 온 여자가 매장 매니저에게 수연이가 고른 백을 달라고 했단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라면 직원은 나중에 온 여인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당연히 수연이에게 백을 줘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상식이다.
그런데 상식 밖의 일이 벌어졌다.
매장 매니저는 수연이가 아닌 나중에 온 여인에게 백을 팔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봐요, 당신들이 이쪽 보호자인가요?”
“네, 그런데 누구시죠?”
“난 이 백화점 VIP예요. 그리고 이건 내 당연한 권리라고요.”
“VIP? 그리고 이게 VIP의 권리라고요?”
“그럼요.”
여자의 말에 선우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아요. 전 이 백화점 VVIP인데, 그럼 이 백은 이제부터 제 것이겠네요.”
“뭐, 뭐라고요?”
“점장님, 제 말이 틀렸나요?”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고객님.”
적당한 타이밍에 파텍 필립 시계를 들고 등장한 백화점 점장이 선우의 질문에 공손히 고개를 끄덕였다.
“……V……VIP?!!”
그와 동시에 점장의 행동을 목격한 매니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오늘 참~~ 얼굴 하얘지는 사람이 많네요.”
담당 매니저는 선우가 매장을 나가기 전까지 고개를 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