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53화
53화 London night, with blood
“놈이다.”
호텔 주위에서 며칠을 잠복한 결과, 마침내 기회를 잡았다.
알렉산더가 무전기를 켜자 곧이어 반응이 왔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목표물은 산책로를 따라 인적이 드문 곳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목표물이 B지점으로 이동 중이다. 모두 대기하도록.”
그들은 서둘러 마스크를 쓰고 초승달 모양으로 굽은 칼을 착용했다.
한편 런던의 변덕스런 날씨 탓인지 이날따라 산책로에는 평소보다 인적이 드물었다.
“날씨 한번 죽이네.”
오늘 하루, 사계절의 날씨를 전부 경험한 것 같다.
영국의 날씨가 개떡 같다는 말을 들었지만 역시 사람은 직접 경험을 해봐야 안다.
그런데 다음 순간이었다.
가죽점퍼를 입은 덩치 좋은 히스패닉 세 명이 선우를 향해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슬그머니 시선을 뒤로 돌리자 뒤쪽에서도 세 명의 건장한 사내가 선우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뭔가 좋지 않은 냄새가 난다.
겉으로는 태연한 모습을 유지했지만 만일을 대비해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어이~ 이봐.”
“무슨 일이죠?”
“널 보고 싶어 하는 분이 계셔서 말이야. 우리랑 잠깐 같이 가지 않을래?”
“절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요?”
“그래. 어때? 조용히 따라오면 다치지 않을 거야.”
허술해 보이지만 쉽게 도망칠 수 없도록 교묘히 위치를 선정했다.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은 이들이 분명했다.
“어디로 가는 거죠?”
“저쪽. 그리 멀지 않아.”
그들의 눈길이 닿는 곳에 붉은빛이 감도는 폐건물이 보였다.
“……그러죠.”
선우는 일단 저들이 마스크를 착용했다는 점에 주목하며 저들과 동행하기로 마음먹었다. 만약 저들이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면 실험실에 끌려가 해부를 당하더라도 마법을 펼쳤을 것이다. 살인에 대한 가능성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선우는 이와 같은 점을 간과하지 않았다.
더욱이 폐건물에 따위에 CCTV 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럼 가지.”
선우는 그들을 따라 정리되지 않은 풀밭을 넘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알렉산더의 표정이 묘하다.
그가 보기에 선우는 겁을 먹은 것 같지 않았고 자신들을 그리 신경 쓰는 기색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잠시 후,
폐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낯익은 인물이 보였다.
“조셉…… 애거시?”
“그래. 나다. 이 X발 놈아.”
득의만만한 표정의 조셉을 보는 순간, 이 상황이 전부 이해됐다.
저놈이 사주한 것이다.
“날 보자고 한 게 당신인가?”
“그래. 이 새끼야.”
“왜지?”
“헐!”
조셉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알렉산더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거야?
너무 친절하게 모셔온 것 아냐?
교육 좀 시켜주면서 데리고 왔어야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지금 몰라서 묻는 거야? 넌 내게 모욕감을 줬어.”
조셉이 손짓하자 거구의 남자들이 선우의 무릎을 바닥에 꿇렸다.
-짜악!!
조셉은 선우의 얼굴을 향해 따귀를 날렸다.
“사람들 앞에서 날 이렇게 때렸지? 흐흐흐흐! 넌 오늘 죽었어!”
비릿한 웃음이 그의 얼굴에 가득하다.
-휘익!
녀석은 족히 30cm는 되어 보이는 도검을 꺼내 들고는 허공에 대고 두어 차례 그어 보였다.
“살려달라고 빌어봐. 그럼 또 알아? 내가 널 살려줄지 말이야.”
독한 눈빛을 발산하며 마치 겁을 주려는 것 같았지만 당하는 입장에서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스윽!
조셉은 도검을 들어 선우의 목에 가져다 댔다
한 치만 더 앞으로 들이민다면 그대로 성대를 꿰뚫을 것 같았다.
“왜 이렇게 조용해? 뭐라고 말 좀 해봐.”
“…….”
미동조차 하지 않는 선우의 모습을 보며 조셉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크크크~ 저항조차 하지 않는 것을 보니 별수 없다는 것을 느꼈나보지? 어이, 이봐. 살고 싶어? 그럼 개처럼 한번 짖어봐. 멍! 멍!! 살려달라고 짐승처럼 울어보라고! 그럼 또 알아? 내가 널 불쌍히 여겨 살려줄지도 모르잖아? 하하하하~~”
‘……아무래도 오늘 피를 보겠군.’
저들의 불순한 의도가 어디까지인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십중팔구 무사히 보내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일단 수인을 맺을 시간이 필요했다.
선우는 곧 흐느끼기 시작했다.
“미, 미안해…… 흑흑……. 내가 잘못했어. 흑흑흑.”
선우가 거짓 울음을 토해내며 두 손 모아 잘못을 빌자 조셉의 입에서 박장대소가 터져 나왔다.
“케케케케~ 그래. 그래야지. 그럼 어디 한번 최선을 다해서 빌어봐. 목숨만은 살려줄게. 병신은 되겠지만 말이야. 캬캬캬캬~~”
역시 몸성히 보낼 생각은 없었다.
“이번엔 개처럼 한번 짖어봐.”
“왈~ 왈왈, 왈~!!”
“하하하하하~~~”
조셉은 아주 자지러지게 웃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뭔가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몸을 바짝 수그린 채 개처럼 짖어대던 선우의 손이 기이한 형상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었다.
수인을 완성한 선우의 눈매가 가라앉았다.
“……피를 보기에 참 좋은 밤이야. Una-Paura-Orribile(감당할 수 없는 공포).”
차가운 눈빛과 함께 흑마법이 펼쳐졌다.
곧 어둠의 군세가 일어나 그들을 덮쳤다
“어, 어?!!”
조셉은 물론 위협적으로 다가오던 남자들의 움직임이 그대로 멈춰졌다.
마치 장승처럼 서 있는 그들의 이마 위로 어느새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처음은 눈이다.
저들의 시선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더니 이내 어깨와 무릎 그리고 몸 전체가 숙여졌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무서운 기운이 그들의 심령을 강타한 덕이다.
어둠의 마나는 눈에 보이지 않았기에 그들은 어떤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그르륵, 그르르르륵…….
성대를 쇠로 긁는 듯한 울음소리와 함께 거대한 실루엣이 그들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핏빛을 머금은 세 개의 눈동자, 그것은 꿈에서라도 보고 싶지 않은 괴물이었다.
“어, 어어!!”
“으, 으으으…….”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누구 하나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사…… 살려 줘.”
“거, 거기 아…… 아무도 없……는 거야?”
그들의 어깨는 감당할 수 없는 공포에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고, 몇 명의 바지춤은 이미 축축이 젖어가고 있었다. 선우의 마법이 그들의 자율신경마저 마비시켜 버린 탓이다.
다음 순간,
살육의 시간이 고개를 들었다.
괴물이 움직일 때마다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팔과 다리가 찢겨 나갔다.
“사, 살려줘.”
“괴물이야. 괴물이 나타났어.”
귀청을 때리는 비명 소리가 난무했다.
하지만 이미 환상에 사로잡힌 그들은 괴물이 아닌 서로를 향해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말처럼 살기 위해 발악하는 쥐새끼들의 모습이었다.
“죽어. 죽으라고!!”
“으아악!!”
손에 잡히는 것이면 그 어느 것도 상관없다.
아수라장이 따로 없다.
선우는 물끄러미 그들의 모습을 무표정하게 지켜보기만 했다.
“아악!!”
“끄아아악!”
조셉의 입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알렉산더의 단검에 난자당했기 때문이다.
그는 두 눈이 뒤집힌 모습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며칠 후,
참을 수 없는 악취가 난다는 신고에 경찰이 출동했다.
-런던 경시청 부검실.
“사인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단검, 손도끼, 몽둥이와 같은 무기를 들고 패싸움을 벌인 것으로 파악됩니다. 사진을 보시면 알겠지만 여기저기 찔리고 부러지고 완전히 으스러졌습니다.”
“사망자들의 신원은 파악했나?”
“네. 모두 파악했습니다. 전과들이 아주 화려하더라고요.”
런던 경시청 소속 카일 경감은 부하 직원이 내민 서류를 보고 사망자들의 신원을 살펴봤다.
-알렉산더 스미스, 에드워드 쉰, 테일러 숀, 아담 폭스, 조셉 애거시…….
“조셉 애거시? 여기에 작가가 왜 있어?”
카일 경감이 고개를 갸우뚱하자 벤자민 경사가 대답했다.
“저도 그게 의문입니다. 혹시 납치를 당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흐음!”
충분히 가능한 추론이었다.
이와 같은 시각,
선우는 영국 왕립 학술원의 공식적인 요청을 받고 왕립 학술원에 들어갔다.
세바스찬 램지가 따스한 눈길로 선우를 맞이했다.
“어서 오게!”
“안녕하세요.”
“그동안 잘 지냈나?”
“네.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허허허~ 그렇군.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 어서 들어가세.”
“네.”
접견실 내부에는 세월의 흔적을 숨길 수 없는 노작가들이 앉아 있었는데, 생김새로만 본다면 대부분 옆집 할아버지, 인상 좋은 할머니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 깊숙한 곳에서 일종의 현기(玄機)와 같은 빛이 엿보였다.
아마 평생을 학자로, 작가로 살아온 인생의 결과물일 것이다.
“자네가 그 유명한 <태리 포터>의 공동 작가로군. 만나서 반갑네.”
“호호호~ <아빠를 부탁해> 잘 읽었어요.”
“일단 사인부터 해주게.”
“램지에게 들었네. 아주 재밌는 주장을 했더군.”
무슨 놈의 호기심이 그렇게나 많은지, 파도처럼 밀려드는 질문에 답하느라 장장 한 시간 이상을 허비했다.
그 후,
선우는 그들과 다양한 주제를 놓고 문답을 주고받았다.
경험과 연륜이 쌓인, 그리고 평생을 연구한 학자들의 공격적인 질문이 이어졌다.
하지만 선우는 그들의 공격을 가볍게(?) 방어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선우는 그의 얼굴이 찍혀 있는 한 장의 출입 카드를 발급받게 되었다.
이것은 영국 왕립 학술원의 객원 연구원을 뜻하는 신분증이었다.
* * *
-힐튼 호텔, 스위트 룸.
“흠…… 프라자 호텔도 좋았지만 여기도 좋네. 없는 게 없어. 자! 그럼 다시 작업을 하러 갈까?”
왕립 학술원 객원 연구원이 된 후,
선우가 가장 먼저 한 것은 호텔을 바꾼 것이다.
힐튼 호텔이 프라자 호텔보다 학술원에 가까이 인접해 있어서 그렇게 결정했다.
“혹시 이태리 작가님 아니세요?”
인터넷의 발달에 따라 변장을 하지 않으면 선우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영국에도 있었다.
“아, 아닌데요. 사람을 잘못 보신 모양입니다.”
선우는 시선을 돌리면서 그녀들을 피했다.
혹자는 유명해졌다고 좋아할지도 모르지만, 선우의 경우에는 정확히 반반이었다.
어떨 땐 좋기도 했지만 어떨 땐 정말 귀찮기도 했다.
각설하고 그로부터 약 10분 후,
선우는 유서 깊은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 왕립 학술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안녕! 우리 천재 작가님!”
뒤에서 들려온 인사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기네스 연구원이 서 있다.
그녀는 영국 왕립 예술원 소속의 연구원으로 예술학 박사 학위를 소지한 미모의 여성이다. 무엇보다 종종 대놓고 들이댄다는 점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안녕하세요. 기네스.”
“호호호~ 뒷모습 보고 찍었는데 맞았네.”
“응,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매번 그렇게 변장을 하니까, 혹시나 하고 불러본 거야.”
“아~!!”
한 가지 사실을 배웠다.
변장을 해도 매번 스타일이 비슷하다면 이렇게 들통이 날 수 있다.
“쳇! 세상이 참 불공평하네요.”
“뭐가?”
“얼굴도 그렇게나 예쁜데, 눈썰미조차 뛰어나잖아요.”
“뭐? 호호호호!!”
그녀의 얼굴이 대번 환해지는 것을 보니 역시 여자들에게 예쁘다는 말은 만고의 진리다.
“어머머~~ 얘는~~”
-꽈악~~~
기분이 무척이나 좋아진 그녀는 평소 그녀의 성격처럼 저 큰 가슴에 선우의 얼굴을 감쌌다.
‘흐흐흐~ 오늘도 감사.’
선우는 음흉한 미소를 날리며 그렇게 하루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