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51화
51화 독수리와 아이(1)
“수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수앤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일행이 있었네.”
위아래로 살피는 눈초리가 왠지 무례하게 느껴졌다.
“그쪽은 누구시죠?”
“오! 영어를 할 줄 아시네요.”
남자는 가식적인 미소를 보이며 자신을 밝혔다.
“반갑습니다. 전 조셉 애거시라고 합니다.”
“그렇군요. 애거~시 씨. 최선우입니다.”
상대가 웃는 낯으로 인사를 하면 웃는 낯으로 받아주는 것이 예의.
선우는 가식적인 미소를 보이며 씨를 강조했다.
마치 욕하듯 말이다.
“……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의문의 1패를 당한 조셉은 선우의 인사에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는 저따위 동양인에게 더 이상의 관심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수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합석해도 될까? 보다시피 자리가 없어서 말이야. 같은 업종에 있는 사람들끼리 사정 좀 봐주지 그래.”
“……미안하지만 손님이 있어서요.”
“최선우 씨라고 했죠? 죄송하지만 사정 좀 봐주시죠. 보시다시피 자리가 없어서요. 토미, 알랭!”
“……?”
저건 또 뭐 하는 짓인가?
조셉이란 녀석은 선우의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그의 일행을 불러들였다.
“이쪽으로 와.”
선우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 문학 협회, 재수 없는 녀석들이에요.”
“네. 그런 것 같네요.”
그녀는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고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 조셉 축하해.”
“뭘?”
“이 자식!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그래, 그런 어설픈 연극은 집어치우라고! 나 역시 자네 논문이 통과되었다고 들었어.”
“아~~! 그거?”
조셉은 마치 이제야 알았다는 듯, 능글맞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이제 영국 문학 협회 정회원이 되신 건가? 축하해.”
“하하~ 그만해. 그게 뭐 축하할 일이라고.”
“그럼 축하할 일이지. 당연한 것 아닌가?”
“에이~ 정회원이 되면 뭐 하나? 앞에 계신 판타지 소설 작가보다 돈도 못 버는데 말이야.”
“어?”
“……어…… 어!”
조셉의 말에 토미와 알랭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재미있군.’
상황이 묘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수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
“뭔데요?”
“대체 수입이 얼마야?”
“그러게, 나도 궁금하네. 영화도 대박 났잖아.”
“…….”
칭찬인가, 아니면 칭찬을 가장한 비꼼인가.
묘하게도 듣는 이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투였다.
“하아~ 누구는 뼈 빠지게 자료 조사하고 한 글자 한 글자에 심혈을 기울여 글을 써도 겨우 입에 풀칠하는데, 누구는 애들 장난 같은 글을 써서 대박이 났네. 참 좋은 세상이야. 안 그런가, 친구들?”
이 중의 백미는 조셉 애거시라 밝힌 녀석의 넋두리다.
아주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저런 싸가지 없는 녀석!!’
선우는 이런 속내와는 다르게 빙긋 미소를 지었다.
“죄송하지만 뭐 하시는 분들이시죠?”
이미 저들의 정체에 대해 알고 눈치채고 있었지만 선우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질문을 던졌다.
“저희들이요?”
“네.”
선우의 질문에 조셉은 피식하며 답했다.
“저희는 글을 쓰는 사람들입니다. 작가라 불리는 사람들이죠.”
“아~ 작가요?”
“네. 저희 셋 모두 영국 문학 협회 소속 작가입니다. 아주 영광스러운 자리죠.”
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작정하고 말했다.
“저희는 누구와는 다르게 진정한 문학의 가치를 탐구하는 동시에 언어를 예술적 가치로 승화시키는 마술사들이죠.”
“마술사요?”
“네.”
-피식!
지들이 언어의 마술사란 말에 선우는 어이가 없어 실소를 토해냈다.
‘뭐, 뭐야?’
‘감히 웃어? 이런 냄새나는 동양인 따위가!!’
선우의 실소에 조셉과 그의 일행들의 안색이 굳어졌다.
“수앤과 동행하신 걸 보니 평범한 분은 아닌 것 같은데, 그쪽은 뭐 하는 분인가요?”
“네, 저도 글을 쓰는 작가입니다.”
“작……가요?”
상대가 작가라는 말에 조셉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그것은 마치 맛있는 먹잇감을 찾았다는 듯한 눈빛이었고 그의 동료들은 그런 그를 향해 재밌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호오~ 그럼 어떤 글을 주로 쓰시나요?”
“뭐 이것저것, 느낌 가는 대로 씁니다.”
“느낌이 가는 대로 글을 쓴다고요?”
“네.”
선우의 부연 설명이 이어졌다.
“가끔은 제가 글을 쓰고 있는 건지, 아니면 글이 제 손을 움직이고 있는 건지 모르겠더라고요.”
“우와~~ 그것참 끝내주네요.”
선우의 말에 조셉은 과장된 표정을 보이며 입을 열었다.
“Regarde ça. Les amis. Vous venez d'entendre parler de cet asiatique?”
(이것 봐, 친구들. 방금 이 동양인의 얘기를 들었어?)
뜬금없이 프랑스어가 튀어 나왔다.
“L’ecriture dit de bouger sa propre main. N'est-ce pas génial?”
(글이 자신의 손을 움직인다고 하네. 정말 대단하지 않아?)
“Fou! Est-ce que cela a du sens?”
(미친! 그게 말이 돼?)
“왜~~ 약을 빨고 썼나 보지!”
“내 평생 글이 손을 움직인다는 소리는 처음 들어보네. 하하하~~”
“크크크큭!”
뭐가 그리 재밌는지, 저들은 손뼉까지 치며 웃는다.
하지만 그들의 웃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선우의 입에서 그것도 원어민에 가까운 완벽한 발음의 불어가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Qu'est-ce que vous etes si drôle les gars? Laisse moi rire ensemble.”
(너희들, 뭐가 그렇게 재밌니? 나도 같이 웃자.)
“헉?”
“……이, 이런 젠장!!”
묘한 긴장감이 감도는 순간, 선우가 조셉을 향해 말했다.
“영국 문학 협회 회원이라는 자들이 셰익스피어를 모른다니 황당하군.”
“뭐? 그게 무슨 말이지?”
“우리가 왜 셰익스피어를 몰라?”
영국 작가에게 셰익스피어를 모른다고 도발하자 저들의 얼굴이 모두 굳어졌다.
“방금 전에 너희들이 그랬잖아.”
“우리가 뭘?”
“글이 손을 움직인다는 말. 처음 들어봤다고 했잖아. 그리고 그렇게 구린 불어 발음으로 감히 날 비웃었고 말이야.”
“……!!”
선우는 냉기가 풀풀 넘치는 음성으로 선언하듯 말했다.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작가 셰익스피어는 번뜩이는 발상이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의 손을 자유롭게 움직였다고 말했지.”
“지금 뭐라고?”
“자, 잠깐! 셰익스피어가 그런 말을 했다고? 난 믿을 수 없어.”
“이봐! 증거도 없으면서 어디서 감히 사기를 쳐?”
그들의 행동과 목소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 정도였다.
하지만 선우는 저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에드워드 놀란과 M. J. 로빈슨의 논문을 읽어봐.”
“에, 에드워드 놀란?”
“M. J. 로빈슨이라면…….”
에드워드 놀란과 M. J. 로빈슨은 각각 1852년과 1901년에 작고한 영국의 문학가이자 비평가다. 그런데 낯선 동양인의 입에서 두 사람의 이름이 흘러나온 것이다.
“왜, 믿기가 힘들어? 그럼 좀 더 정확하게 설명해 줄까? 1849년 에드워드 놀란이 발표한 논문 136페이지와 M. J. 로빈슨이 1899년 가디언지를 통해 발표한 서평을 살펴봐.”
“……!!”
선우의 목소리에서 확실한 자신감이 배어 나오는 것을 주변 사람들 모두가 알 수 있었다.
한편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마냥 아무 답변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어느새 정신을 차린 조셉의 반론이 이어졌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에드워드 놀란이 셰익스피어에 대해 말한 것은 그의 페미니즘적 논점에서…….”
“잠깐!”
선우는 손을 들어 그의 답변을 제지했다.
“페미니즘을 말하는 것을 보아하니 어디서 그의 글을 읽어 보긴 한 모양이네. 그것도 수박의 겉핥기식이지만 말이야.”
“뭐?”
“방금 네가 말한 것은 놀란이 1839년 발표한 글이야. 빅토리아조의 철학적 사상을 얘기하면서 페미니즘을 섞은 거지. 하지만 내가 지금 말하는 건 1849년에 발표한 그의 논문이야!”
조셉의 얼굴이 점차 창백하게 변해갔다.
“처, 천만에 셰익스피어는 철저한 계획과 조사에 따라…….”
“그래, 셰익스피어는 다수의 작품에서 그런 경향을 보였지. 하지만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로미오와 줄리엣이나 십오야를 분석해봐. 니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찰스 디킨스 경의 논문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아주 명백하게 나와 있어. 어디 페이지까지 얘기해 줄까?”
충격과 부끄러움 그리고 견디기 힘든 수치심에 세 사람의 몸이 마치 북풍을 마주한 나뭇가지처럼 흔들렸다.
“거, 거짓말. 거짓말이야.”
“198페이지.”
“……!!”
“논문 198페이지를 봐봐! 그럼 알 수 있을 거야. 대신 내 말이 전부 사실로 밝혀진다면 그 거지 같은 발음을 가지고 프랑스로 떠나는 게 좋을 거야. 나 같으면 쪽팔려서 얼굴을 들지 못할 테니까.”
저들은 극도의 모멸감에 사로잡혔다.
특히 선우를 노려보고 있는 조셉 애거시의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 그의 입술은 이미 하얗게 변해 있었다.
“왜! 또 할 말이 있는 건가? 너희들이 영국 문학 협회 소속이면 그렇게 교만해도 되는 건가? 대체 그 이름이 뭐길래?!”
“……!!”
그들은 감히 선우의 시선을 맞받지 못했다.
“펜은 칼보다 강하고 작가의 글은 만인 앞에 평등하지. 그런데 너희들의 모습은 어떻지? 쥐꼬리만 한 타이틀을 앞세워 동료 작가의 글을 폄하하고 자기만족, 자아도취에 빠져 있지 않은가?”
선우의 외침에 그들은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했다.
그냥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얼굴이다.
“서글픈 일이지만 너희 같은 녀석들은 평생 글다운 글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문단에서 사라지게 될 거야. 그리고 하루 종일 불만을 토해내겠지. 이렇게 유서 깊은 곳이 아닌, 싸구려 선술집에서 말이야. 혹시 또 모르겠네. 사람들에게 수앤과 아는 사이라고 자랑할지도 말이야. ‘위대한 작가 수앤 캐슬린 롤링과 난 과거 <태리 포터>에 대해 서로 의견을 교환했었지. 그 유명한 <독수리와 아이>에서 말이야. 우리는 석양이 지고 새벽이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서로를 향해 열변을 토해냈어. 하하하.’ 이렇게 말이야.”
선우의 말은 마지막 남은 조셉의 자존심마저 무너뜨렸다.
이성의 끈이 끊어지며 분노가 폭발했다.
“개자식아, 죽어!”
분노한 조셉의 주먹이 선우를 향해 날아왔다.
-퍼억!
“조셉!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수앤의 외침과 함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선우, 괜찮아?”
“응. 수앤. 괜찮아.”
선우는 내심 미소를 지었다.
한 대 맞아준 덕에 이제부터 정당방위이기 때문이다.
“조셉. 지금 당장 선우에게 사과해.”
“사과? 미쳤어? 저 빌어먹을 동양인 새끼가 날 모욕했다고.”
“모욕은 당신이 먼저 했어. 폭력도 당신이 먼저 했고 말이야.”
수앤은 주변 반응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큰 소리로 말했다.
“어서 사과하라고.”
“풉~ 사과하기 싫다면 어떻게 할 건데?”
“뭐?! 조셉, 당신 정말!!”
이때,
선우의 입에서 박장대소가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