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9화
49화 무아지경(無我地境)
사람들의 격한 관심 속에서 이태리 작가의 세 번째, 네 번째 소설이 연달아 세상에 나왔다.
먼저 어린이를 위한 판타지 동화 <아즈라엘 마젤란>이다.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는 강아지 나라, 아즈라엘 마젤란.
이곳의 왕자는 호기심이 많은 강아지다.
왕자는 인간 세상이 궁금해 홀로 여행을 나왔다가 위기에 빠지게 되는데 착한 소녀의 도움으로 위험에서 벗어난다. 그날 밤 소녀는 강아지 왕자의 초대로 아즈라엘 마젤란을 향해 여행을 떠나게 된다.
신나는 세계, 멋진 세상. 그러나 소녀는 그만 악당 루뽀에게 잡혀가고 만다.
신탁을 받은 왕자는 아즈라엘 마젤란의 용사들과 함께 소녀를 구하기 위해 모험을 떠나게 되고 마침내 루뽀를 물리치고 소녀를 구하게 된다.
<아즈라엘 마젤란>은 동화 작가로 문단에 데뷔한 그의 정체성을 상기시켜주는 작품으로 후에 어린이 뮤지컬로 제작되어 전 세계 아이들의 큰 사랑을 받게 된다.
다음으로 선우는 네 번째 주제어를 사용해 <의심>이란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초등학생인 주인공은 단 한 번도 작곡을 배우지 못한 천재 작곡가다.
어른들은 사회적 관념과 통념에 빠져 진실을 알아보지 못하고 주인공을 의심하고 또 의심한다.
이 글은 현재 선우를 의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메시지였다.
* * *
“오~ 대박. 두 편이 새로 올라왔네. 음! 아즈라엘 마젤란은 동화 같으니 일단 패스하고 좋아. 의심! 너부터 읽어주겠어.”
올해 29세의 직장인 방성욱 씨는 오늘 아침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인터넷에 접속했다.
그는 재빨리 마우스를 움직여 다운로드 폴더를 열었다.
-괜찮다고 말했던 것뿐이지. 정말 괜찮았던 적은 없었어.
“……!!”
천재 작곡가 지민은 자조적인 미소를 보이며 뛰어내렸다.
-아악!
-사람이 뛰어내렸어요.
지민의 자살로 소설은 끝이 난다.
<의심>은 읽은 방성욱은 마지막 장면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사회의 통념에 희생당한 주인공의 선택이 창과 칼이 되어 그의 가슴을 후벼 팠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안했다.
단순히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천재를 의심하고 시기하고 모함한 어른들.
지민을 죽음으로 몬 것은 바로 그들이었다.
짧은 단편이었지만 <의심>이 주는 감정의 이입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놀라웠다.
이와 같은 시각,
이른 아침부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어두운 신색으로 오현국 선생의 자택을 찾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그게…… 저희도 잘…….”
“4편이네. 4편!!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오현국 선생이 좌중을 향해 침통하게 물었다.
“혹시 제시어가 미리 유출된 건 아닐까요?”
“미리 유출되었다고?”
“네.”
“그래서?”
“네?”
오현국 선생의 반문에 김진우의 표정이 굳어졌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지금 몰라서 묻나? 우리가 만나서 이야기한 게 일주일 전이네. 만약 이 자리에 스파이가 있어서 내가 준비한 주제가 유출되었다고 해도 고작 일주일이야. 그런데 일주일 만에 저런 글을 썼다고?”
“서, 선생님. 뭔가 부정행위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쾅!
“조용히 하게. 자넨 지금 저 카메라가 안 보이나?”
“……?!”
오현국 선생은 탁자 위에 뽑아 놓은 A4 용지를 손에 쥐었다.
“어느 누구는 한평생 작가질을 해도 쓰지 못할 글을 만들어 냈어. 고작 이틀 만에 말이야.”
‘젠장. 이태리 작가의 실력이 진짜였잖아?’
‘……지금 즉시 칼럼 내리라고 문자를 보내야겠다.’
‘김진우 저 새끼는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일을 벌여가지고.’
‘태양 로펌에서 고소 들어오면 어쩌지? 일단 최 대표부터 만나서 사과해야겠다.’
자신을 향한 매서운 분위기를 느꼈는지 김진우가 좌중을 향해 외쳤다.
“아닙니다. 선생님. 이건 잘못된 겁니다. 저 녀석이 뭔가 비겁한 술수를 쓴 게 분명합니다. 제가 당장…….”
“그만하게!”
김진우의 변명 같지 않은 변명에 오현국 선생이 고함을 질렀다.
“서, 선생님!!”
“자넨 눈이 없나?”
오현국 선생의 미간이 크게 꿈틀거렸다.
“지금도 실시간으로 방송되고 있잖아. 대체 무슨 술수를 부렸다는 건가?”
이때, 우연히도 화면에 선우가 수인을 잡는 모습이 비춰졌다.
“설마 저 괴상한 손동작으로 무슨 마법이라도 부리고 있다는 말인가?”
“그, 그게!”
“그만하라니까!”
“음!”
“저 녀석이 지금까지 쓴 분량이 얼마나 되는 줄 아나? 50만 자야. 50만 자!! 그 어떤 천재가 와도 외워서 쓸 수 있는 분량이 아니란 말이네. 에잉!! 더 이상 자네와 할 말이 없으니 이만 나가보게.”
“서, 선생님!”
“내 말 못 들었나? 나가라고 하지 않나!”
“……!!”
오현국 선생은 그가 꼴도 보기 싫다는 듯 그 모습 그대로 등을 돌렸다.
명백한 축객령(逐客令)이었다.
김진우는 싸늘한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그대로 나갔다.
한편 오현국 선생의 심사(心思) 역시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지금까지 쌓아왔던 자신의 명성에 이번 일로 인해 금이 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희석되겠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녀석의 실력은 진짜였어.”
오현국 선생은 허탈해진 표정으로 읊조리듯 말했다.
* * *
“……딱 한 시간 잤네.”
간이침대에서 일어난 선우는 간단한 스트레칭 후, 손을 움직여 수인을 잡았다.
남들이 보기엔 아마도 괴상한 손가락 운동처럼 보일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스트레칭 비슷한 동작을 넣기도 했다.
“저 새끼 또 시작했네.”
“대체 저게 뭐지? 일종의 버릇 같은 건가?”
처음엔 미심쩍은 표정이었지만 몇 번을 보다 보니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한편 선우는 수인이 완성되자마자 혼자만이 들을 수 있는 작은 음성으로 주문을 외웠다.
“힐, 리커버리.”
-우우웅!!
2서클, 그것도 저주 계열에 특화된 흑마법사가 펼친 회복 계열의 마법이다.
효과의 80% 이상이 날아갔지만 그래도 마법은 마법이었다.
어느새 바닥으로 떨어진 체력이 완만한 상승 곡선을 그리며 올라오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컨디션 역시 깔끔하게 회복되는 느낌이다.
한 시간을 잤지만 마치 하루를 휴식한 것 같았다.
-뚜벅뚜벅!
선우는 커피 머신을 향해 유유히 걸어갔다.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와는 달리 아주 편안한 표정이다. 하지만 그런 선우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금정호, 최한열 작가의 얼굴은 퍽이나 심각했다.
“흐음~~”
방금 내린 원두의 향기가 코끝을 자극한다.
선우는 100만 불짜리 미소를 보이며 커피 맛을 음미했다.
참고로 선우의 이와 같은 모습은 방송을 지켜보던 커피 회사 관계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아 버렸다.
‘……다시 한 번 달려볼까?’
네 편의 소설을 끝냈고 이제 마지막 제시어 ‘권좌’만이 남은 상황.
선우는 <태리 포터> 시리즈를 이을 후속 판타지를 조심스레 떠올려 보았다.
대하 역사 판타지 소설 <권좌의 길>.
<권좌의 길>은 <태리 포터>와 다르게 정통 판타지 소설을 표방하는 작품이다.
사실 정통 판타지 소설에서 세계관을 설정하는 일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수많은 작가들이 세계관 설정에 실패해 펜을 꺾는 일이 다반사일 정도로 어렵다. 하지만 선우는 달랐다.
그가 경험한 세상이 바로 그 방대한 세계관을 자랑하는 세계가 아니었던가?
그냥 그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적어내려가기만 하면 세계관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었다.
“일단 세계관 문제는 바로 해결됐네.”
더욱이 4편의 소설마저 완성한 상태였다.
선우는 편안한 마음으로 <권좌의 길> 1부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슥슥슥.
평민의 아들로 태어나 영웅의 길을 걷게 된 지크프리드.
그는 모험을 통해 친구라 부를 수 있는 동료들을 만난다.
사랑과 우정, 정의와 욕망, 음모와 배신의 그림자 속에 전란에 휩싸인 왕국에서 일개 용병이었던 지크프리드는 서서히 영웅의 풍모를 갖춰나간다.
1부 아르메니아 제국의 탄생(10권)
2부 제국의 분열(10권)
3부 제국의 검과 방패(10권)
4부 7개의 가문(10권)
5부 군웅할거의 시대(10권)
6부 제국의 역습(10권)
7부 왕관의 무게(10권)
8부 권좌의 길(10권)
9부 최후의 승자(10권)
10부 영원한 제국(10권)
10부작, 총 100권에 이르는 목록만 봐도 입이 떡하니 벌어진다.
완벽한 세계관 속에서 저마다의 독특한 개성을 가진 수많은 인간군상이 등장해 소설에 활력과 생명력을 불어넣을 것이다.
이와 같은 시각,
인터넷을 통해 선우의 모습을 지켜보던 설연이 무척이나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였다. 조금 전 눈을 감은 것 같은데 벌써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시간을 확인해 보니 선우는 고작 1시간밖에 자지 않은 것 같았다.
‘저래도 몸에 무리가 없을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응원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선우야. 힘내.’
한편 선우가 마지막 스퍼트를 올리자 인터넷을 통해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조차 혀를 내둘렀다.
“마, 맙소사.”
“저러다 큰일이 나는 것 아닙니까?”
“어, 어떻게 할까요?”
주최 측 역시 당황한 상태다.
하지만 선우는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글쓰기에 집중했다.
어느 순간이 되자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손가락이 움직이는 형상을 이루었다.
-타타다탁!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진 바다를 유영하는 기분이다.
거대한 자음으로 만들어진 물고기가 다가와 그의 손을 물고 모음으로 만들어진 소용돌이가 그를 삼켰다.
선우의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듯 무섭게 요동쳤고 뇌가 고통을 호소했다.
-이제 그만해.
-이제 포기하라고!
-그만 써!!
얼마나 그렇게 악을 썼을까.
어느 순간 묘하고 이상한 감각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황홀감!
황홀감을 확인하는 순간 그의 가슴을 채운 것은 아주 신선한 감정이었다.
손가락이 찢기는 격통과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던 그의 심신이 안정되었다.
무아지경에 빠진 선우는 그저 손이 가는 대로 미친 듯이 자판을 두들겼다.
“그만!”
선우는 어느 순간 자신의 몸이 타인에 의해 강제로 멈추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눈을 크게 떴다.
사회자인 임선한이 그의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다음 날,
사람들의 마음은 참으로 간사한 것 같다.
선우를 향한 수많은 비난과 조롱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어 버렸고 대신 감탄과 경탄만이 그 자리를 채웠다.
수많은 기자들이 천재 작가를 취재하기 위해 그의 집 앞으로 몰려들었다.
아파트 앞이 그야말로 시장판 같았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
선우의 아파트 경비실 앞에 굵은 글씨의 플랜 카드가 걸렸다.
-[기자 사절, 인터뷰 사절, 방송 절대 사절!]
기자들의 집요함은 참으로 끈질겼다.
플랜 카드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돌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기자라는 직업이 원래 그렇지 않은가?
선우는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인물 중의 하나였다.
그가 한 일을 보라.
72시간 동안 총 다섯 편의 소설을 집필했다.
더욱이 그의 마지막 소설은 글자 수가 무려 90만 자에 달했다.
대한민국 문학계의 저명한 인사들은 선우의 글을 읽고 그 작품성에 혀를 내둘렀다.
일부는 선우를 가리켜 문호(文豪)의 반열에 올랐다고 피력(披瀝)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