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5화
45화 성추행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새 토요일이 되었다.
선우는 지하철을 탔다.
사람들이 다수 있었지만 변장을 톡톡히 한 덕에 다행히도 선우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아주 가끔 선우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해 보이는 소수의 사람들만 있었을 뿐이다.
약 45분 후,
화려한 네온사인과 함께 드넓게 펼쳐진 고층 빌딩 사이로 발걸음을 옮기자 조그만 골목길과 함께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한옥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골목골목을 따라 걷고 구경하는 재미가 있어 데이트 코스로도 좋은 한옥 마을을 뚜벅뚜벅 걷다 보니 엣 추억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민아 선배는 잘살고 있을까?”
그녀는 과거 선우가 대학에 다닐 때 짝사랑했던 동아리 선배다.
좋아한다는 고백조차 하지 못해 시작도 해보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것마저 풋풋했던 젊은 날의 추억이다.
각설하고 옛 추억을 곱씹으며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 앞에 당도해 있었다.
-기와집.
한 남자가 기와집 입구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서서 담배를 피워 대고 있다.
선우가 다가가자 그가 말했다.
“죄송한데, 오늘 예약이 있어서 빈자리 없습니다.”
“아, 저는 오현국 선생님 초대로 왔는데요.”
선우의 답변에 남자의 시선이 움직였다.
뿔테 안경에 마스크까지 착용한 덕에 선우의 얼굴을 확인하기 힘들었지만 말이다.
“……선생님께서 초대하셨다고요?”
“네.”
“그럼 혹시 작가?”
“네. 그렇습니다.”
작가라는 말에 의심 섞인 눈초리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관찰 모드다.
“보아하니 신인 작가 같은데, 맞지?”
“……네.”
데뷔한 지 꽤 됐지만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으니, 신인 작가라는 말 역시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반가워. 난 88년 한경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조요섭 작가야.”
그는 한껏 거만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보아하니 심부름 온 것 같은데, 누가 보냈나?”
“네?”
선우의 반문에 그는 고개를 살짝 틀어 선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 슬쩍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자네 같은 신인들은 오늘 모임에 대해 잘 모르겠군. 이름은 들어 봤나? 오현국 선생님과 그분을…….”
그때였다.
“어이, 이 작가~”
골목 어귀에서 막 모습을 드러낸 한 남자가 선우를 향해 아는 척을 했다.
“먼저 왔군.”
그는 재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는데, 그의 정체는 규용의 선배이자 초록별 출판사와 계약을 맺고 있는 중견 작가 김정웅이다.
“김정웅 선생님?”
김정웅 작가의 얼굴을 확인한 조요섭이 재빨리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어~ 그래. 조 작가구만. 반갑네.”
그는 조요섭의 인사를 건성으로 받으며 선우를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안 그래도 오늘 모임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여기서 만났네.”
“안녕하세요.”
“흐흐흐~ 정말이지 대단해. 아니! 대견해.”
김정웅 작가는 선우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자신의 놀람과 대견함을 표시했다.
‘김정웅 선생님이 왜 저러시지? 신인 작가에게 저럴 분이 아닌데?’
조요섭은 김정웅 작가의 반응에 당황했다.
신인 작가 따위를 저렇게 존중하는 모습이라니!!
하지만 김정웅 작가의 눈에는 조금의 장난도 들어 있지 않았다.
“얼마 전에 자네의 모습을 보지 않았다면 나 역시 몰라봤을 거야. 다음부턴 마스크는 몰라도 그 안경은 좀 바꾸게. 알겠지?”
“……네.”
조요섭은 두 사람의 대화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저…… 김정웅 선생님.”
“어~ 그래. 조 작가.”
“이분이 누구…….”
“하하하~ 자넨 모르겠군. 하긴 저렇게 안경을 뒤집어썼으니 정체를 알면 그게 더 용하지.”
조요섭을 향해 입술 주위를 씰룩거린 김정웅 작가가 선우를 가리키며 말했다.
“인사하게. 이쪽은 태리 포터의 작가이자 아시아 최초로 맨 아시아 문학상을 수상한 이태리 작가라네.”
“네? 네?!! 누, 누구요?”
그는 김정웅 작가의 말에 깜짝 놀라 말까지 더듬었고 선우는 그저 가벼운 미소만 보였다.
잠시 후,
기와집 안으로 들어간 선우는 문인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상석을 차지한 오현국 선생과 대면할 수 있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뭘~ 늙은이의 초대에 젊은이가 응해 줘서 오히려 내가 고맙지. 이쪽으로 앉게.”
“네.”
선우는 오현국 선생이 권하는, 그의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맛있어 보이는 고갈비를 중심으로 소주, 맥주 그리고 막걸리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자네 글을 모두 읽어 보았네. 대단하더군.”
“모두 말입니까?”
“그래.”
“……감사합니다.”
“문장에 깊은 안정감이 있어. 인생의 흔적도 느껴졌고 말이야.”
“……!”
과연 문단의 전설답게 예리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않나? 자네 나이에 그런 글이라니, 후후후~”
“……!”
아마 일전에 자신이 한 말 때문에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이리라.
선우는 오현국 선생의 질문에 흠칫했지만 그냥 모르는 척, 아무런 티도 내지 않았다.
“그래. 저녁은 먹었나?”
“네. 가볍게 먹고 왔습니다.”
“잘했네.”
선우에 대한 오현국 선생의 깊은 관심과 함께 극찬이 이어졌다.
“자네는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이야. 강약 조절에 기승전결이 아주 뚜렷해.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적인 색채까지 가지고 있어.”
-웅성웅성!
“한국적인 색채요? 그게 무엇입니까? 선생님.”
조요섭 작가가 궁금함을 참지 못해 질문을 던졌다.
“여백의 미!”
“여백의 미요?!!”
“그래, 이 작가의 글에는 여백의 미가 내재되어 있어.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필력이 아주 좋아. 하하하하~~”
“……!”
“……!”
“……!!”
오현국 선생의 극찬이 이어지자 몇몇 기성작가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만약 선생이 아닌 다른 이의 말이었다면 그 즉시 발끈하며 반박했겠지만 이 자리에서만큼은 어느 누구도 그렇게 행동하지 못했다.
그저 묵묵히 술잔만 비울 뿐이다.
“과찬이십니다. 아직 많이 보고 많이 읽고 배워야 합니다.”
“어이쿠 이런, 겸손하기까지 하네, 좋구나, 좋아~~”
오현국 선생은 선우의 겸손한 태도에 더욱더 흡족하다는 표정이다.
사실 그는 김진우의 사주(使嗾)를 받고 선우를 몰락시키려 했다.
그런데 그의 책을 정독한 결과, 그의 마음속에 몰락이 아닌 소유의 욕심이 고개를 들고 말았다.
그는 문학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비록 한국이라는 조그만 땅덩어리에 국한되었지만 돈이면 돈, 명예면 명예, 그는 모든 것을 가졌고 누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선우가 가진 필력이라면 노벨 문학상이 꿈이 아니라 생각했다.
어쩌면 살아생전 톨스토이나 괴테에 버금가는 대문호의 반열에 오를지도 몰랐다.
‘……이 아이라면 가능해.’
대한민국 출신의 세계적인 대문호와 그를 가르친 스승.
오현국 선생은 선우의 유일한 스승이라는 명예를 가지고 싶었다.
“선우 군~~”
“네, 선생님.”
“……자네만 좋다면 내가 직접 자네에게 도움을 좀 주고 싶은데?”
“도움이요?”
“그래.”
“혹시 문하생이 되라는 말씀이십니까?”
“하하하~ 문하생이라니, 내 뜻이 잘못 전달된 것 같군.”
오현국 선생은 친할아버지처럼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문하생이 아니라, 자네가 내 계보를 이었으면 하네.”
“헙!!”
“……?!!”
“쿠, 쿨럭!”
오현국 선생의 파격적인 제안에 좌중에 모인 작가들의 안색이 변했다.
심지어 한 기성작가는 사레가 들려 헛기침을 했다.
“자네의 작품 세계가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이 늙은이가 도움을 주고 싶네.”
“……!”
예상치 못한 제안에 선우 역시 잠시 동안 말을 잃었다.
사실 그는 오현국 선생에 대해 단편적인 지식만 가지고 있었다.
문학계에 속해 있다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그의 작품 목록과 그에 따른 평가 말이다.
대한민국 문학계에서 오현국 선생이 가지고 있는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모두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선우의 입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그것은 긍정의 의미도 부정의 의미도 아니다.
그저 오랜 세월 살아온 경험이 그를 침묵하게 한 것이다.
“허허허~ 갑작스런 제안에 놀란 것 같군. 지금 바로 대답하지 않아도 되네. 허허허~~”
오현국 선생은 마치 옆집 할아버지처럼 친근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흐흐흐, 녀석~ 내 제안에 엄청 놀랐겠지? 이해할 수 있어.’
기분이 좋아진 오현국 선생은 잔을 들었다.
“자~ 기분도 좋은데, 다들 한 잔씩 하지.”
“네. 선생님.”
“이 시대의 지성과 문학과 사랑과 그리고 건강을 위하여~”
“위하여~~”
“지화자!!”
술잔이 우회전하고 좌회전하며 이리저리 돌고 돌자 다양한 이야기가 꽃을 피웠다.
그렇게 한 30분쯤 지났을까?
오현국 선생의 눈에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류 작가가 들어왔다.
“저 친구는 누구지? 못 본 얼굴인데?”
“네, 선생님. 얼마 전에 등단한 신인 작가입니다. 어이~ 박 작가. 잠시 이쪽으로 와보게.”
오현국 선생의 질문에 재빨리 대답하는 동시에 박소은 작가를 부른다.
“오현국 선생님 알지? 어서 인사드리게.”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선생님. 이번에 문예지 ‘창조’를 통해 등단하게 된 신인 작가, 박소은입니다.”
그녀는 오현국 선생을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
“오오~ 그렇군. 만나서 반갑네.”
오현국 선생이 술병을 들어 잔에 채웠다.
“박소은이라고 했지?”
“네, 선생님.”
“자자~ 내 잔 한 잔 받게. 등단 축하주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여기까진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잠시 후, 문제가 발생했다.
어느새 편한 자세로 등을 벽에 기댄 오현국 선생이 누구도 예상치 못한 행동을 보였기 때문이다.
“헉!”
박소은 작가의 짧은 신음성.
그리고 그녀를 중심으로 앉아 있던 작가들의 흔들리는 눈동자.
사람들이 시선을 회피하는 모습에서 선우는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왜 저러지?’
선우의 눈에 의혹의 빛이 일어났다.
“응?!!”
선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이 목격한 게 참인지 거짓인지 헷갈릴 정도다.
주변을 살펴보니 대다수의 작가들이 이미 오현국 선생을 외면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행동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선우는 오현국 선생을 쳐다보았다.
아까의 친근함은 깡그리 사라져버린 색(色)을 탐(貪)하는 노인의 모습이다.
“음! 으으음~~”
박소은 작가의 엉덩이를 만지고 있었다.
성추행.
이건 범죄다.
더욱이 다수의 사람들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여성 작가를 희롱하다니 이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