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0화
40화 한국 오디션(2)
오디션장에는 냉랭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할리우드행 특급열차에 탑승할 수 있는 관문이니 그럴 만하다.
“다음 분, 들어오세요.”
캐스팅 디렉터의 말에 미모의 여배우가 들어왔다.
“12번 참가자입니다. 이름 김신혜, 나이 21세, 현재 제일 기획 소속 여배우입니다.”
캐스팅 디렉터가 참가자의 이름과 나이, 소속사를 말하자 곧 무대 중앙으로 김신혜가 걸어 나왔다.
LED 조명이 오디션 무대를 따뜻하게 비춰주고 있지만 분위기는 사뭇 차갑다.
“김신혜 씨?”
“네.”
마이클 감독이 입을 연다.
“영화, 드라마, 경력이 꽤 화려하네요.”
“감사합니다.”
“준비하신 주제가 뭔가요?”
“사과입니다.”
“호오~~ 좋습니다. 그럼 시작해보세요.”
“네.”
김신혜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
“이히히히~ 이거면 됐어.”
그녀의 손에는 마치 사과가 쥐어져 있는 듯했다.
“독이 든…… 사과! 이것만 공주에게 먹이면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가 된다.”
그녀는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심사 위원들을 향해 연기를 펼쳐갔다.
‘흠!!’
‘……진짜 같아.’
특히 욕망에 휩싸인 김신혜의 눈빛은 가히 압권이라 할 수 있었다.
“호오~ 눈빛이 꽤 살아있더군요. 저 배우 이름이 뭐라고 했죠?”
“김신혜 배우입니다.”
“일단 체크해 놔야겠군요.”
“네. 그러세요.”
은근한 기대감과 아쉬움이 공존하는 가운데 할리우드 진출을 위한 오디션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자! 다음 배우 들어오세요.”
“어떤 주제를 선택하셨죠?”
“제가 준비한 연기는 백조, 사랑을 간구하는 백조의 노래를 준비했습니다. 트랄랄라~~라!”
-땡!
“이번엔 사과를 먹는 백조입니다. 그 백조는 사과를 아주 맛있게…….”
-땡땡!
-땡땡땡!!
“됐습니다. 유리 씨. 나가보세요.”
심사 위원 중의 하나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기획사나 인지도는 상관없다.
배우들의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에는 가차 없이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참가 번호 23번 왕조연입니다.”
“반갑습니다. 왕조연 씨, 어떤 주제를 선택했나요?”
“의사와 환자의 대화를 통해 화해와 용서하는 주제를 선택했습니다.”
“흐음! 1인 2역인가요?”
“네.”
“좋습니다. 시작하세요.”
심사 위원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왕조연의 연기가 시작되었다.
“전 아버지를 잃었어요. 마법을 모르는 머글들이 제게서 아버지를 뺏어갔죠. 인간은 누구나 동등한 인격체로, 누구나 가치 있는 인간으로 태어나지만 세상은 저와 저희 가족에게 공평하지 않은 것 같아요.”
심사 위원들은 그녀의 연기를 면밀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미워할 수 있습니다. 그래요.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분노의 대상이 잘못되었습니다. 당신은 어렸을 적, 병원에서 수혈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머글의 병원이죠.”
‘흐음~!’
‘감정 전환이 빠르군.’
왕조연은 각각의 캐릭터에 따라 그 특성에 맞는 연기를 선보였다.
“당신이 그토록 혐오하고 있는 머글의 피가 당신에게 흐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뭐, 뭐라고요?”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왕조연의 눈이 크게 떠졌다.
설마 저런 말을 들을 줄은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는 듯이,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도리질을 쳤다.
“아니요. 아니에요. 그만해요. 듣기 싫어요.”
“아니요. 들으세요. 이 세상은 우리들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이제 그만 아버지를 놓아주세요! 아버지가 비록 머글의 총에 돌아가셨지만 그들과 아주 다정하게 지냈다는 것을 당신 역시 알고 있지 않습니까?”
왕조연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강함이 점점 약하게, 원망의 눈빛이 용서의 눈빛으로 변해갔다.
“용서해 주세요. 미움과 분노는 당신의 아버지가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생각보다 연기력이 괜찮은데? 좋아. 이 정도면 내가 밀어줄 수 있겠어.’
심사 위원 크리스는 왕조연에게 합격점을 주었다.
오후 5시,
현재 4명의 배우가 최종 오디션을 준비하고 있다.
먼저 꽤 높은 수준의 연기력과 함께 압도적인 퇴폐미(頹廢美)를 선보였던 일본의 유오이 소라가 마이클 감독의 선택에 최종 오디션에 올라왔고 대륙의 소여신(小女神)이라 불리는 왕조연이 크리스 감독의 선택을 받았다.
수앤은 물오른 연기력을 보여준 여배우 김신혜를 선택했고 선우는 당연히 설연을 선택했다.
잠시 동안의 휴식 시간,
최종 오디션에 올라간 설연이 누군가와 통화하기 위해 복도에 나왔다.
“선우야.”
-응, 설연아. 오디션은 어땠어? 끝났어?
선우는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물었다.
“아니, 아직. 잠깐 휴식 시간이야. 넌 어디야?”
-어? 어~~ 난 집이지.(후후후~)
사실 선우는 현재 설연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 있었다.
-뭐? 최종 오디션!! 이야~~ 축하해.
“쳇~ 왜 이러셔? 내가 바로 국민 여동생이거든.”
-큭큭큭. 그래. 딸막이 국민 여동생아. 마지막까지 파이팅이야. 오디션 잘 봐.
선우의 응원에 긴장했던 마음이 풀리는 것 같다.
“그래, 고마워.”
통화를 끝낸 설연이 방으로 돌아갈 찰나 한 여인의 냉소적인 목소리가 그녀의 발걸음을 잡았다.
“이봐요. 거기.”
“네?”
고개를 돌리니 최종 오디션에 올라간 중국 여배우 왕조연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너, 최종 오디션에 올라간 한국 배우. 맞지?”
“그런데요. 무슨 일이죠?”
왕조연은 눈을 치켜뜨며 말을 이었다.
“일본과 중국에서는 각각 한 명씩만 뽑혔는데, 너희만 두 명이더라.”
“그런데요?”
설연이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표정으로 반문하자 왕조연이 비아냥거렸다.
“헐~ 어이없네. 이거 홈그라운드 어드밴티지 아냐? 아니면 돈이라도 먹였나?”
“네? 지금 뭐라고 하셨죠?”
왕조연의 말에 설연은 당황했다.
대륙의 소여신이라 불리는 그녀가 다짜고짜 저런 말을 늘어놓으니 설연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렇게 당황해? 어머머~ 설마 내가 정곡을 찔렀나?”
왕조연의 망언은 아직 끝나지 않은 듯 보인다.
“니가 돈을 줬는지, 아니면 그 몸뚱이를 줬는지 상관하지 않겠어. 하지만 수치심을 안다면 이렇게 조용히 말할 때 기권하는 게 어때?”
“뭐라고?!”
“어차피 주인공은 결정되어 있어. 내가 바로 그 주인공이지. 그러니 괜히 고집부리다가 상처입지 말고 포기하는 게 어때? 널 보니까 집에 있는 막냇동생이 생각나서 해주는 충고야.”
“막냇동생이 당신보다 예쁜가 보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연기도 잘하고 말이야.”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못 들었어? 다시 말해줄까?”
“이, 이게 미쳤나!!”
“아니. 파 쳤는데~”
“……?!!”
설연의 모습에 왕조연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누구도 아닌 자신이 말발로 저따위 한국 년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녀는 급히 주위를 살폈다. 따귀라도 한 대 때려줘야 성이 풀릴 것 같았다.
“이런 망할 년이!!”
왕조연이 설연의 팔을 잡고 거칠게 잡아끌려 했다.
설연은 그녀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으르렁 소리쳤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죠? 내 몸에 손대지 말아요.”
“뭐? 이, 이년이!!”
왕조연의 분노의 손길을 토해낼 찰나,
반대쪽에서 인기척과 함께 그들을 찾는 음성이 들려왔다.
“지금부터 최종 오디션을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모여 주세요.”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캐스팅 디렉터였다
“왕조연 씨, 설연 씨. 두 분 모두 여기에 계셨네요. 최종 오디션이 곧 시작합니다. 오디션장으로 이동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저도 금방 갈게요.”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숨 막히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하지만 캐스팅 디렉터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왕조연이 발걸음을 옮기며 나직한 비웃음을 토해냈다.
“흥. 인구가 고작 1억 명도 안 되는 주제에 웃겨서 말이 안 나오는군. 코딱지만 한 이 땅덩어리는 또 어떻고 말이야. 이봐. 너. 설연이라고 했나? 쓸데없는 자존심 따윈 내세우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중화인민공화국과 한국은 비교조차 할 수 없으니까 말이야.”
그녀는 설연을 향해 비웃음이 가득한 미소를 보이더니 오디션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사라진 직후,
그 뒤로 얼굴을 잔뜩 찡그린 선우가 나타나 그녀들이 사라진 복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상황: 볼드데빌이 남긴 잔재와 결전을 앞둔 태리.
“소개합니다. 오늘 오디션을 도와주실 한스 씨와 해리슨 씨입니다.”
할리우드에서 활약 중인 두 명의 배우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먼저 김신혜 씨, 준비해 주십시오.”
“네.”
한국 배우 김신혜가 최종 오디션의 서막을 열었다.
“태리, 태리!! 으아아아!!”
김신혜의 오열 연기가 빛을 발한다.
‘흐음! 연기력 하난 정말 뛰어나군.’
‘가히 메소드(method)급 연기야.’
‘대단한 연기지만 왠지 혜진 역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김신혜에 이어 일본의 유오이 소라가 무대에 나와 연기를 펼쳤다.
“태리, 태리!!!”
유오이 소라 역시 일본이 자랑(?)하는 배우답게 뛰어난 연기를 선보였지만 김신혜의 연기를 본 직후라 그런지 뭔가 2% 부족하게 느껴졌다. 더욱이 저런 의상을 준비한 의도가 대체 무엇인가?
저럴 거면 아예 벗고 나오지!
동작을 조금만 크게 해도 가슴이 보일 정도였다.
‘꿀꺽!’
‘진짜 몸매 하난 죽인다. 역시 전직 섹시…….’
하지만 그녀의 이런 선택은 오히려 심사 위원들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효과와 함께 수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세 번째 순서로 왕조연의 차례가 다가왔다.
“왕조연 씨.”
“네.”
“당신은 현재 볼드데빌의 계략에 빠져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눈앞에 마주한 공포에 머글 출신인 당신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죠. 이해했습니까?”
“네. 이해했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한번 볼까요?”
“네.”
고개를 끄덕인 왕조연이 무대 위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무대 위로 올라오자 볼드데빌 역의 해리슨 워싱턴이 먼저 연기를 펼쳤다.
“후아~~!! 정말 오랜만에 맡아보는 신선한 공기군.”
상대는 의심할 나위 없는 볼드데빌이다.
“보…… 볼드데…… 빌?!”
볼드데빌의 모습을 확인한 왕조연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후후후! 여인. 넌, 나의 부활을 축하하기 위한 제물인가?”
“오…… 오지 마. 내게 다가오지 마……!!”
애처로운 소녀의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녀는 곧 감당할 수 없는 진정한 공포와 조우하게 될 예정이다.
탁자 밑에 손을 내려 아무도 모르게 수인을 완성한 선우의 마법이 그녀를 덮쳤기 때문이다.
‘저주 마법, 감당할 수 없는 공포(Ruinous Scare)!’
-우우우웅!!
순간 칠흑 같은 어둠이 그녀를 삼켰고 선우의 얼굴에 문득 조소가 서렸다.
이와 동시에 소름 끼치도록 괴기스런 비명 소리가 왕조연의 귓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끼이이이이!
“뭐, 뭐야?”
왕조연의 눈이 화들짝하게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