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8화
38화 굿 럭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대아문고의 천호진 회장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지금 대한민국은 <태리 포터> 열풍에 빠졌는데, 대아문고에는 책이 없다.
아니, 대아문고에만 책이 입고되지 않았다.
-광!!!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고?!! 왜 다들 말이 없어?”
“…….”
“…….”
“…….”
모두들 꿀 먹은 벙어리마냥 아무 답이 없자 천 회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박 실장.”
“네, 회장님.”
“왜 우리 서점에만 책이 없지?”
“그게…… 저도…… 잘…….”
박용호 실장의 말소리가 작아지자 천 회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초록별 출판사 담당이 누구야?”
“……저, 접니다. 회장님.”
“조 본부장? 자네가 담당이었나?”
“네. 회장님.”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말해보게.”
잠시 후,
천 회장의 얼굴이 보기 싫을 정도로 일그러졌다.
“출판사에서 입고를 거부하고 있다고?”
“네. 회장님.”
“야, 이 새끼야. 그게 지금 할 소리야? 그게 말이 돼?”
일개 출판사가 국내 최대 문고인 대아문고에 책을 입고하지 않는다?
이건 누가 봐도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입니다. 회장님. 초록별 측에서 저희에게 책을 입고하지 않겠다고 통보해 왔습니다.”
“뭐라고?”
-웅성웅성!
회의실 분위기가 한층 더 심각해졌다.
그리고 이 일에 깊숙이 관련되어 있는 차용철 이사의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젠장. 초록별 출판사가 태리 포터를 잡다니!!’
이때, 천호진 회장이 조용하지만 묵직하게 말했다.
“박 이사.”
“네. 회장님.”
“이번 일,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알아봐.”
“알겠습니다. 회장님.”
발등에 불이 떨어진 차용철 이사는 천 회장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급히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 * *
“……최 대표님.”
“무슨 일이십니까?”
“사과를 드리려고 찾아왔습니다. 그때는 제가…….”
차용철 이사는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규용에게 사죄했다.
그러는 동안 규용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됐습니다.”
“……네?”
“무슨 말씀을 하셔도 대아문고에는 책을 주지 않을 겁니다.”
“대, 대표님.”
차 이사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렸다.
늘 갑의 위치에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선 입이 열 개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법이다.
“제,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대표님. 부디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매대 위치 역시 모두 원상 복귀 시켰습니다.”
차 이사는 다시 한 번 규용에게 용서를 구했지만 규용은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증오라든가 분노 따위의 감정이 떠오를 법도 한데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분위기가 매섭게 느껴졌다.
“대……표님.”
“이사님께 딱 한마디만 해드리겠습니다.”
규용은 애원하는 차용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굿 럭!”
“……!!”
“저 역시 이사님의 앞날에 행운을 빌어드리죠.”
-삐이!
“김 비서, 손님 가십니다. 로비까지 배웅해 주세요.”
“대, 대표님! 최 대표님!!”
규용의 축객령(逐客令)이 떨어지자 차 이사는 그제야 바닥에 무릎까지 꿇고 규용의 이름을 불러봤지만 요지부동이다.
규용은 그와 더 이상 어떠한 대화도 나누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고 결국 차용철 이사는 비서진의 손에 이끌려 대아문고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대아문고의 박용호 실장이 규용과 대면하게 되었다.
“그게 사실입니까?”
“제가 거짓말할 이유가 있을까요?”
“……!!”
규용에 입에서 나온 말은 놀라웠다.
초록별 출판사를 고사(枯死)시키기 위해 일개 지점이 아닌, 전국에 산재하고 있는 모든 지점에서 조직적으로 매대의 위치를 옮겼다고 했다.
‘차용철 이사, 당신!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규용의 말에 박용호 실장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 * *
“매대 위치를 바꿨단 말이야?”
“네, CCTV와 매장 직원들의 말을 확인한 결과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뭔가 일이 있었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누가 그런 걸 지시했지?”
“그, 그게…….”
“어서 말해.”
“……차용철 이사입니다.”
“차 이사?!”
“네, 회장님.”
대답을 들은 천 회장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잠시 숨 막힐 듯한 적막감이 두 사람 사이를 휘감았다.
“증거는 있나?”
“네, 차 이사의 계좌를 살펴본 결과 경쟁 출판사로부터 거액의 돈을 받은 정황이 드러났습니다. 여기 관련 자료입니다.”
자료를 살펴본 천 회장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며칠 후,
차용철 이사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는 매형인 천호진 회장에게 골프채로 두들겨 맞아 그 자리에서 실신했다고 한다.
규용의 입가에 엷은 냉소가 스쳐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아문고에 책을 넣어줄 생각은 없다. 당분간은 말이다.
우리 규용 씨, 은근히 뒤끝이 있었다.
“자! 오늘 회식합시다. 장소는 한우 마당! 오늘 소고기 쏩니다.”
때아닌 소고기 회식에 직원들의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와~~ 대표님 만세.”
“뭐 할라고 사나?”
“소고기 묵을라고 살지~~”
“하하하하~~!!”
이와 같은 시각 미국,
통화를 끝낸 김진우의 표정이 무척이나 어둡다.
“뭐라고? 왜! 왜 또 초록별이야! 하필이면 왜?!!”
자조적인 음성,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미친 듯 소리 지르며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유리창에 집어 던졌다.
-쨍그렁!
“도대체 왜! 도대체 왜냐고?!!! 으아아아!!!!”
초록별 출판사를 망하게 하겠다는 그의 계획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보였다.
초록별과 계약이 끝난 작품들을 사들이는 데 성공하였고 3~40% 인세를 제시해 작가들을 데리고 왔다. 그런데 <태리 포터>라는 거대한 복병이 등장해 그가 설계한 판을 뒤엎은 것이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상황은 더욱 나쁘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최규용이 그로 인해 야기된 인세 문제를 아예 공론화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책 한 권에 수억을 벌어들이는 인기 작가도 있지만 그것은 피라미드의 정점에 위치한 몇몇 극소수 작가들의 이야기일 뿐이지, 사실 90%에 이르는 작가들은 월 100만의 수입도 벌기 힘든 것이 한국 문학계가 겪고 있는 현실이었다.
수많은 작가들이 최규용 대표의 지원 아래, 집단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이것은 후에 작가 동맹파업이라 불렸는데, 처음에는 10여 명 내외의 작가로 시작했지만 초록별 출판사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문단의 이름 있는 작가들이 대거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그 세를 크게 불렸다.
상황이 점점 더 심각해지자 작가 동맹파업이 시작된 지 석 달 만에 출판업계가 백기를 들게 되었다.
글이 있어야 책을 찍어낼 것이 아닌가?
작가의 월수입이 100만도 안 된다는 말에 여론 역시 작가들의 손을 들어주었고 그 결과 작가들의 인세가 현저하게 올라가게 되었다.
통상 7%에서 최대 15%를 주던 기존 인세가 10%에서 최대 30%까지 상승했다.
일각에서는 이와 같은 인세의 증가로 출판사들이 망할 것이라 여겼지만 오히려 반대의 상황이 벌어졌다. 인세의 증가는 작품성의 향상으로 되돌아왔고 이는 독자들의 지갑을 열게 하는 상호작용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다 죽여 버릴 거야.”
김진우의 살기 어린 음성이 뉴욕의 밤하늘에 울려 퍼졌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당분간 미국을 떠나지 못할 것 같다.
치료도 치료였지만 무엇보다 아버지 김격호 회장이 크게 진노했기 때문이다.
초록별 출판사를 흡수하기 위해 벌였던 모든 일들이 그의 아버지에게 고스란히 알려졌기 때문이다. 성공을 했다면 모르겠지만 거액을 들이고도 실패하자 김격호 회장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지금과 같은 시기에 200억을 손해 봐? 병X 같은 놈!! 꼴도 보기 싫으니 내 눈앞에 나타날 생각도 하지 마!”
* * *
-LA에서 출발한 대한항공 747편은 이제 10분 후면 대한민국 김포 공항에 착륙할 예정입니다. 승객 여러분들께서는 안전벨트를 착용하여 주시고 승무원들의 안내에 따라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모든 전자기기의 사용을 금지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내에 있는 스피커를 통해 스튜어디스의 안내 방송이 잔잔하게 흘러나오고 있을 무렵, 1등석에 앉아 있는 외국인 두 명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마이클.”
“왜?”
“서울에는 대체 뭣 때문에 가는 거야?”
크리스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오디션.”
“오디션? 무슨 오디션?”
“태리 포터 시리즈 4편, 태리의 첫사랑 역.”
<태리 포터>의 4번째 시리즈를 보면 태리의 첫사랑이 등장하는데 그녀는 서양인이 아닌 동양인 소녀로 묘사되어 있다.
마이클의 설명에도 크리스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심드렁한 표정이다.
“그깟 첫사랑 역이라면 LA에서 진행해도 되잖아. LA에 동양인이 얼마나 많은데! 굳이 그것 때문에 너랑 내가 한국까지 와야 해?”
“작가와의 계약 사항이야.”
“수앤을 말하는 거야?”
“그래.”
“쳇! 그랬군.”
주연 배우를 모두 영국인으로 캐스팅한 수앤의 고집은 할리우드에서도 아주 유명했다. 사실 계약은 선우가 한 것이지만 말이다.
“식사하시겠습니까? 스테이크와 비빔밥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두 사람의 앞으로 한 명의 미녀 스튜어디스가 다가왔다.
정복의 가슴에 단 명찰에는 박주미라고 적혀 있었다.
“난 스테이크. 크리스 넌?”
“난 비빔밥을 먹어볼래. 한국에선 비빔밥이 유명하다고 하더라고.”
스튜어디스는 스테이크와 비빔밥을 놓고 유유히 사라졌다.
“근데 왜 하필이면 한국이야? 시장 규모나 배우 풀(pool)을 봐도 일본이나 중국 쪽이 훨씬 좋잖아.”
“그건 태리 작가 때문이야. 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이번 오디션을 한국에서 개최하자고 요청해왔어.”
“뭐, 태리 작가가?!!”
“그래. 수앤 작가 역시 태리 작가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찬성을 했고 말이야.”
“헐~~ 작가들이란!”
뭔가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좋게 생각하자고, 크리스. 이번 오디션에 수앤은 물론 태리 작가 역시 참석한다고 들었으니 말이야.”
“태리 작가가 참석한다고 했다고? 그게 정말이야?”
“그래.”
“오우~ 굿! 그럼 사인을 받을 수 있겠다. 꼭 사인 받아야지.”
태리 리는 소위 요즘 가장 핫(hot)한 작가다.
더욱이 그에 관한 모든 것은 베일 속에 감춰져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호기심은 극에 달해 있었다.
혹자는 태리 리가 여자라고 했고 초특급 게이라는 루머도 돌았다.
어떤 이는 그가 환갑이 넘은 노작가라고 떠들기도 하였는데 수많은 억측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태리 리 작가를 향해 일부에서는 그의 존재 자체를 문제 삼기도 했다.
각설하고 태리 리를 직접 만날 수 있다는 말에 크리스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초리를 자아냈다.
-<태리 포터> 시리즈 한국 오디션 개최.
-태리의 첫사랑은 과연 누가 될 것인가?
-마이클 오앤 감독, 크리스 촬영 감독과 함께 오디션을 보기 위해 입국.
-중국과 일본의 유명 여배우들 김포 공항에 나타나다.
-<태리 포터>의 작가 수앤 캐슬린 롤링 오디션 캐스팅을 위해 오늘 입국.
현재 영화 <태리 포터>는 시리즈 영화의 한 획을 그으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이번 오디션에선 주연급이라 할 수 있는 조연을 뽑는다.
만약 오디션에 합격한다면 그 배우는 할리우드에 진출하게 되는 동시에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게 될 것이다.
몇 시간 후,
두 사람을 태운 승용차가 88도로를 따라 달려갔다.
뒷좌석에 앉은 크리스가 창밖을 내다보며 탄성을 지어냈다.
“마이클, 저 강 좀 봐. 굉장한데~~”
“그렇군. 정말 멋진 강이야.”
두 사람의 눈에 비친 한강의 풍경은 굉장히 아름다웠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달리니 두 사람은 고풍적인 느낌을 주는 전통 가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긴 어디야?”
“한국 전통 가옥이야.”
“전통 가옥?”
“응. 이런 걸 고택이라 부르던데? 어때? 꽤 운치 있지 않아?”
“그래, 네 말대로 운치가 있네, 이런 곳은 처음이야.”
크리스의 말에 마이클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삼청각 정문,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 입은 남자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마이클 감독님과 크리스 감독님이 맞으십니까?”
“네.”
“제가 마이클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정장을 입은 남자는 두 사람을 향해 깍듯하게 인사하며 손짓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는 마이클과 크리스를 데리고 삼청각 안채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