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7화
37화 단편소설 <지평선이 보일 무렵>
“지평선이 보일 무렵? ……제목이 특이하네.”
피아노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일하고 있는 조현미는 오랜만에 들른 서점에서 최신 소설들을 살펴봤다.
그러던 중 이태리 작가의 단편 신작 <지평선이 보일 무렵>을 발견했다.
평소 이태리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던 터라 그녀는 흥미가 돋았다.
한 장, 한 장.
책장이 넘어갈 때마다 그녀는 책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치 누군가가 그녀에게 최면을 건 것처럼 말이다.
칼바람이 스며드는 아파트.
한때 그녀는 소위 누구나 부러워하던 여인이었다.
성공한 남편과 공부 잘하는 자식 덕에 주변에서는 그녀를 두고 최고의 엄마이자 내조의 여왕이라 불렀다.
하지만 빛나는 순간은 찰나였다.
믿었던 남편의 배신.
가정은 파괴되었고 풍족해 보였던 재산 역시 어디론가 흩어졌다.
그녀의 나이 겨우 서른아홉이었다.
이혼녀라는 딱지는 그녀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세상 모두가 그녀를 손가락질하는 것만 같았다.
슬픔과 허무함을 가슴에 품고 우연히 떠난 여행.
그녀는 하늘과 땅이 맞닿는 지평선에서 새로운 인생을 만나게 된다.
“……강…… 순규!!”
여자 주인공의 이름이 그녀의 영혼에 낙인(烙印)되는 느낌이다.
현미는 마지막 장까지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책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잠시 후,
그녀는 책을 손에 꼭 쥐고 계산대로 걸어갔다.
그날 밤,
현미는 <지평선이 보일 무렵>을 몇 번이나 읽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전혀 지루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문득 작품의 배경이 된 전라도 김제의 지평선이 보고 싶었다.
‘이번 주말에 가볼까?’
그녀는 하늘과 땅이 맞닿은 지평선을 상상하며 잠이 들었다.
이러한 일은 비단 그녀만이 겪은 것이 아니었다.
규용의 예상대로 이태리 작가의 신작 단편소설 <지평선이 보일 무렵>은 출간되자마자 서점가를 점령해 나가기 시작했다.
-
“오늘 소개해 드릴 책은 이태리 작가의 신작 <지평선이 보일 무렵>입니다. 이 책은 단편소설인데요. 하늘과 땅이 맞닿은 지평선을 무대로 전라북도 김제 벽골제의 전원적인 풍경을 아름답게 묘사한 작품입니다. 전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여자 주인공의 대사, 독백, 그 미묘한 감정 처리는 어떻습니까?”
“……전 아직도 이 책이 선물해준 감동과 그 여운을 느낍니다.”
사회자를 비롯해 프로그램에 참석한 패널들의 칭찬 릴레이가 펼쳐졌다.
“<아빠를 부탁해>와는 또 다른 감각이 느껴지는 글이었습니다.”
“<아빠를 부탁해>가 가족, 아버지, 중년 남성을 전면에 내세웠다면 <지평선이 보일 무렵>은 여인을 위한 소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출판 관계자들의 말에 의하면 3~40대 여성들이 이 책에 열광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이태리 작가의 한계가 대체 어디까지인지 궁금하네요.”
“네, 저 역시 이태리 작가의 한계가 무척이나 궁금합니다. 정말 대단한 작가입니다.”
패널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사회자가 질문을 던졌다.
“한계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네. 일반적으로 작가들이 글을 쓸 때 각자만의 개성이나 특징 같은 것이 본인의 작품에 묻어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태리 작가는 그런 특징이 너무 다양해요. 예를 들자면 <단팥빵>, <아빠를 부탁해> 그리고 이번에 나온 <지평선이 보일 무렵>에서 보여준 이태리 작가의 문체를 보면 각 작품마다 특징이 다 다릅니다.”
“그 말씀에 저 역시 동의합니다. 보통 완숙의 경지에 들어가면 자신만의 특징이 문체에 굳어지게 되는데…….”
패널로 나온 평론가의 부연 설명이 이어졌다.
“<아빠를 부탁해>를 읽어보면 작가의 완숙한 경지가 보여요. 그런데 이번에 발표한 <지평선이 보일 무렵>에선 마치 신인 작가가 가지고 있는 풋풋함 같은 것이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풋풋함이 더 좋던데요.”
“하하하~ 네. 저 역시 박 평론가님의 말에 동감하는 바입니다. 아주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허허~ 이것 참 종잡을 수가 없네요.”
“그러니까요. 이태리 작가는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신비한 작가입니다. 개인적으로 그분의 다음 글이 기다려집니다.”
“저 역시~~”
방송의 효과는 상당했다.
먼저 단편소설의 배경이 된 김제시는 사람들이 찾는 관광 명소로 급부상했고 다양한 관광 상품이 출시되었다.
-이태리 작가의 단편소설 <지평선이 보일 무렵>의 무대가 된 김제…….
-김제 벽골제, 때아닌 관광객들로 호황.
-지평선 축제가 열리다.
단편을 읽은 수많은 독자들이 김제 벽골제를 찾았고 그중 일부는 지평선 축제에 참가해 가족, 연인과 함께 단란한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여담이지만 <지평선이 보일 무렵>의 아시아를 제외한 전 세계 판권은 <태리 포터>에 대한 일종의 감사 표시로 영국의 블룸스버리 출판사가 가져가게 되었다.
-위잉!
주머니 속 핸드폰이 울린다.
“여보세요.”
-선우야, 아버지야.
“네, 아버지. 무슨 일이세요?”
-인터뷰 요청 때문에 전화했어. 저번처럼 서면으로 답하면 되겠지?
“네.”
선우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있는 상황이다.
-오케이. 알았다. 그럼 그렇게 진행할게. 그리고 엄마에게 전화 한번 해봐 봐.
“엄마요?”
-응.
“네. 알겠어요. 아버지.”
규용과의 통화 후,
선우는 바로 수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오~ 아들!!
마치 그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반가운 목소리로 답하는 그녀다.
“아빠가 전화하라고 하던데요, 무슨 일 있으세요?”
-응. 특별한 건 아니고~ 엄마가 우리 아들 사인이 필요해서 말이야.
“사인이요? 또요?”
-그래. 호호호호~~
얼마 전 선우는 수연의 부탁에 그의 단편 신작 <지평선이 보일 무렵> 표지에 사인을 해주었다. 그것도 무려 스무 권이나 말이다.
-이태리 작가의 인기가 엄청나더라. 엄마가 출판사 대표 사모님이라고 여기저기서 부탁을 하더라고~~
“…….”
-오늘 낮에 아빠에게 부탁해서 책을 좀 받아왔어. 네 방에 놔뒀으니까 부탁 좀 할게. 아들~~
“넵. 어마마마.”
선우는 이때까지 알지 못했다.
그의 방 한 부분을 완전히 차지해버린 오백 권의 분량에 대해서 말이다.
그로부터 두 시간 후,
선우는 마력을 끌어올려 패밀리어의 위치를 파악했다.
-우우우웅.
“……미국…… 매릴랜드……?!!”
감이 멀다 했더니 역시 한국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
“존스 홉킨스에 있었군.”
굳이 따지지 않아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김진우는 발기부전을 치료하기 위해 그곳을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틀렸다.
의학의 힘으로 어느 정도 효과를 볼 수는 있겠지만 저주라는 것 자체가 현대 의학으로 완치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선우의 예상대로 비뇨기과 부분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가진 닥터 거스 역시 김진우에게 일어난 발기부전과 악몽의 이유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원인 불명의 발기부전.
-스트레스가 발기부전의 가장 큰 원인이라 판단함.(닥터 거스)
-심리적인 불안감으로 인해 주기적인 악몽을 꾸는 현상도 발견됨.(닥터 세바스찬)
사실 선우가 마음만 먹었다면 진우는 어쩌면 룸살롱에서 그의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
이계에서 100년을 산 흑마법사에게 사람을 죽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 째는 죽음으로 응징한다면 그것이 과연 제대로 된 응징일까? 하는 점이었다.
단언하건대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고통과 절망이 동반되지 않은 죽음은 너무나 가벼운 응징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죽음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 때문이다.
판타지 세계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세계로 죽음은 항상 그의 곁에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그곳과 전혀 다르다.
선우는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위협하지 않는 한, 살생은 되도록 피하고 싶었다.
이것은 그의 진심이었다.
비록 김진우는 그 선을 넘었지만 말이다.
이와 같은 시각 미국,
어두컴컴한 방, 발기부전 치료를 위해 미국을 찾은 김진우는 영국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뭐라고?!!”
-이미 계약이 끝났다고 합니다.
“어디 출판사랑 했대? 교학? 금성?”
-……어디와 계약을 했는지, 알려줄 수 없다고 합니다.
“XX! 그게 말이 돼?”
-죄송합니다. 모두들 함구하는 분위기입니다.
김진우는 현재 미국과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판타지 소설 <태리 포터>의 한국어 버전을 출간하기 위해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야 이, 개X끼야! 내가 얼마를 주더라도 계약하라고 했잖아.”
-죄, 죄송합니다. 대표님.
“이 새끼야, <태리 포터>가 어디 출판사랑 계약했는지 알아내기 전까지 귀국하지 마.”
-달칵!
통화를 끝낸 김진우는 노성을 토해냈다.
“으아아!!”
만약 이 계약을 따냈다면 초록별 출판사를 치는 데 들어간 거액을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었을 텐데…….
“대체 어떤 새끼지?”
김진우는 아쉬움에 이를 갈았다.
이와 같은 시각,
선우는 외출을 준비했다.
오랜만에 동네에서 설연을 보기로 한 것이다.
요즘 드라마 촬영으로 다시 바빠진 덕에 통화만 몇 번 했는데, 오늘은 꼭 얼굴을 봐야 한다고 해서 이렇게 나왔다.
“선우야~”
선우를 발견한 설연은 횡단보도에 초록불이 들어오자마자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때 파란색 트럭이 신호를 보지 못했는지 반대쪽에서 튀어 나왔다.
“아, 안 돼!!”
순간적으로 선우의 눈에 세상이 슬로우 모션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따지고 자시고 할 겨를이 없었다.
무조건 설연을 구해야 한다는 필사적인 의지만 존재할 뿐이다.
“블링크, 고속이동!”
선우는 초인적인 속도로 수인을 맺었고 트럭과 설연이 충돌하려는 순간,
그 작은 공간에 선우가 나타났다.
‘바, 방금 그건 뭐였지?’
운전사는 방금 전 상황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여자아이와 충돌할 찰나 뭔가가 눈앞에 나타났다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저씨, 운전 똑바로 하셔야죠!”
“어? 어…… 어.”
저 소년이 달려들어 소녀를 구한 것이 분명하다.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느 누구도 다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게 가장 중요했다.
“아, 아저씨가 미안하다.”
선우는 고개를 돌려 설연에게 호통을 쳤다.
“너도 마찬가지야! 신호가 바뀐다고 그렇게 뛰어오면 어떡해? 좌우도 살펴야지.”
“나, 난…….”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다.
“네 얼굴만 보여서 나도 모르게 앞만 보고 달렸어.”
“……뭐, 뭐라고?!!”
“미, 미안해. 선우야. 으아앙!!”
설연의 대답에 선우는 크게 당황했다.
그리고 설연이 울음을 터트렸다.
사람들이 소곤대며 몰려들기 시작했다.
“일단 가자.”
모자를 쓰고 나왔지만 설연은 아역 스타.
선우는 급히 설연의 손을 이끌고 자리를 옮겼다.
잠시 후,
고개 숙인 설연을 보며 선우가 물었다.
“그러게. 그냥 통화했으면 됐지. 하마터면 정말 큰일 날 뻔했잖아.”
“…….”
설연은 여전히 고개를 푹 수그린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근데 왜 보자고 한 거야?”
설연은 우물쭈물하더니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이거 주려고.”
“이게 뭔데?”
“……선물.”
“선물?”
“응. 오늘이 우리가 만난 지 2,000일이 되는 날이야.”
설연의 대답에 선우는 순간 말문이 콱 막혀 버렸다.
“그래서 만나자고 한 거야? 이거 주려고?”
“응.”
“……!!”
할 말이 없다.
좀 더 따끔하게 혼을 내려 했는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저렇게 사랑스러운데 어떻게 혼을 내겠는가?
그로부터 며칠 후,
소설 <태리 포터와 흑마법사의 돌>이 그동안의 베일을 벗고 서점에 깔리기 시작했다.
덤앤두어: 당신도 여기 있을 거라는 걸 알았어야 했었는데…… 맥그리드 교수.
맥그리드: 좋은 저녁입니다. 덤앤두어 교장님.
알버트: 그 소문들이 사실인가요?
덤앤두어: 그런 것 같네요. 선 그리고 악.
맥그리드: 그리고 그 소년은요?
덤앤두어: 지금 오고 있소.
알버트: 이름이?
덤앤두어: 태리…… 태리 포터!
그리고 이때를 기점으로 할리우드에서 만든 영화 <태리 포터와 흑마법사의 돌> 역시 한국에 상륙했다.
누구나 예상했던 것처럼 첫날부터 영화가 대박 났다.
어린아이들은 물론 어른들 역시 극장으로 몰려들었다.
-판타지 소설 <태리 포터와 흑마법사의 돌> 전격 출판.
-영화와 소설, 두 마리의 토끼를 잡다.
-<태리 포터와 흑마법사의 돌> 개봉 첫날 전 세계 흥행 돌풍.
이쯤 되면 가히 <태리 포터> 열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김진우와 결탁해 초록별 출판사에 수작질을 부렸던 대아문고의 차용철 이사는 날벼락을 맞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