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5화
35화 위기는 곧 기회다
소설 <태리 포터> 한국어판은 초록별 출판사의 주관하에 영화 개봉일에 맞춰 출간하기로 했다.
참고로 이 계약에는 어떠한 로비나 뒷거래도 없었다.
“그럼 영화 <태리 포터>의 개봉에 맞춰 출간하기로 하겠습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홍보비가 엄청 굳겠군요.”
“네?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하하하하!”
그날 저녁,
집에 귀가한 규용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여보~ 나 왔어.”
“왔어요?”
“응~”
부엌에서 나오는 수연을 마치 기다렸다는 듯 가볍게 포옹한다.
“어머~ 웬일이래? 당신,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요? 기분이 무척 좋아 보이네요.”
“그래? 후후후~ 맞아. 기분이 아주 좋아. 큰 계약을 따냈거든.”
“어머머~ 무슨 계약인데요?”
수연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 물어봤다.
사실 그동안 내색하지 않았지만 요즘 통 우울해보였던 남편 때문에 그녀 역시 걱정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여보, 당신은 <태리 포터>라고 들어봤어?”
“<태리 포터>요?”
“응, 이게 말이야. 미국과 유럽에서 엄청나게 히트한 소설인데 말이야…….”
그로부터 한참이나 이어진 규용의 설명에 수연 역시 크게 기뻐했다.
“어머!! 그것참 잘됐네요. 여보~~ 축하해요.”
“하하하~ 내가 말이지. 그러니까~~”
그리고 두 사람의 그런 모습을 지켜본 선우 역시 조용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새벽 3시.
모두가 깊은 잠에 취한 새벽, 선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슥삭슥삭!
가족 모두가 깊은 잠에 빠진 것을 확인한 선우는 거실 바닥에 커다란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이쿠, 피 냄새가 장난이 아니네. 서둘러 그려야겠다.’
이미 한 번 경험해서 그런지 선우는 저번보다 빠른 속도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휴! 이제 마지막이다.”
선우는 이마에 맺힌 굵은 땀방울을 닦아내며 마지막으로 금가루를 마법진에 듬뿍 뿌렸다.
수인을 완성시키자 마나가 그를 반겨 주었고 그와 동시에 선우의 입에서 룬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환한 빛 무리와 함께 마법진이 활성화되기 시작하자 선우는 마치 죽은 듯이 마법진 중심에 누워 있는 규용과 수연에게 기억 조작 마법을 펼쳐내었다.
“당신들의 기억은 이제부터 나에 의해 통제됩니다. 기억의 조작, 기억의 지배!”
(선우)아빠, 이거 한번 읽어보세요. 제가 쓴 동화예요.
(규용)이걸…… 네가 썼다고?
(선우)네, 아빠.
(규용)…….
(선우)왜요? 재미가 없어요?
(규용)선우야, 사람들에게는 일단 비밀로 하면 좋겠다.
(선우)왜……요?
(규용)이 글을 네가 썼다니, 이 일이 알려진다면 세상 사람들이 널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 같구나.
(선우)…….
(규용)아빠 생각에 우리 선우가 좀 더 클 때까진 비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선우)엄마와 혜진이한테도요?
(규용)……음! 일단 지금은 두 사람에게도 비밀로 하자꾸나. 엄마에겐 아빠가 조만간 얘기할게.
-중략…….
(선우)아빠! 이것 보세요. 제가 쓴 첫 장편 <아빠를 부탁해>예요.
(규용)……!!
(선우)아빠, 엄마에게 계속 비밀로 할 거예요?
(규용)아니, 이젠 얘기해줘야지.
-중략…….
(수연)세상에, 우리 아들이 천재였다니!!!!
(규용)날 닮아서 그래.
(수연)이보세요. 최규용 씨! 절 닮은 거거든요.
(규용)날 닮아서…….
(수연)됐어요.
-중략…….
(선우)아빠, 엄마! 이번 영국 여행에서 놀라운 일이 있었어요.
(수연)놀라운 일?
(선우)네. 수앤이란 친구를 사귀었는데, 글쎄 저와 비슷한 생각을 가졌더라고요.
(규용)그래?
(선우)네~~ 수앤과 전 꿈과 모험, 용기와 마법이 가득한 책을 쓰기로 했어요.
마법진이 환하게 빛을 내고 있는 가운데 선우에 의해 만들어진, 꽤나 디테일하게 조작된 기억이 규용과 수연에게 모여들었다. 특히 선우는 인세를 통해 벌어들이고 있는 막대한 수익금에 대해 전적으로 부모의 간섭을 배제하게 만들었다.
(수연)사랑하는 우리 아들! 엄마는 우리 아들이 헛되게 쓰지 않으리라 믿는다.
(규용)아빠도 존심이 있지. 아들이 번 돈은 아들이 잘 관리하도록 해.
선우가 만들어낸 기억들이 규용과 수연의 머리로 향하기 시작했다.
-슈우우우우욱!!
‘이게 다 아들 잘 둔 덕분인 줄 아세요! 아부지, 어무이.’
규용과 수연이 사이좋게 잠든 모습을 보며 선우 역시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주르륵!
그 순간,
선우의 코에서 쌍코피가 터져 나왔다.
“아, 이놈의 쌍코피……!!”
휴지를 양쪽 코에 꽂고 방 안으로 돌아온 선우는 침대에 쓰러지듯 몸을 눕혔다.
과도한 마나의 사용으로 지금은 온전한 휴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그리고 월요일…….
기억 조작 마법의 여파 때문인지, 규용과 수연은 무려 나흘 동안 멍한 상태로 집 안에 머물렀다.
당연히 회사에도 출근하지 못했다.
“어, 조 부장. 내가 몸이 안 좋아서…….”
“네, 감기 몸살인 것 같아요.”
“머리도 아프고…….”
“네, 부탁 좀 드릴게요.”
“미안해. 컨디션 회복되면 바로 나갈게.”
선우 역시 초긴장한 상태로 규용과 수연을 살피고 있었다.
저 두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그의 부모다.
마법에 대한 성공을 확신했지만 이 세상에 절대적이라는 것은 없다.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었으므로 선우 역시 두 사람의 상태를 지켜보는 내내 가슴이 다 벌렁거릴 정도였다.
이날 이후.
규용과 수연은 조작된 기억을 통해 선우가 바로 이태리 작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사람들 앞에선 여전히 이태리 작가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규용의 경우엔 달라진 것이 있었다.
사적인 자리에선 여전히 사랑하는 아들이었지만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때는 아들이 아닌 한 사람의 작가로 그를 대했다는 점이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규용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초록별 출판사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대한민국 문학계를 위해 그(초록별 출판사)가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 진솔한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다.
* * *
규용이 한 편의 소설을 읽고 있다.
글의 제목은 <지평선이 보일 무렵>, 200자 원고지 70장 분량으로 얼마 전 선우가 도서관에서 완성한 단편소설이다.
“하……아……!”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시선으로 각자의 상황을 바라본다.
살아있는 생동감, 그림과 같은 은유적 색채…….
노련미가 느껴졌던 <아빠를 부탁해>와는 달리 어딘가 모를 풋풋함(?)이 느껴지는 글이다.
그러나 어떤 연유일까?
그 풋풋함으로 인해 오히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은은한 감동과 함께 사라지지 않는 여운이 느껴졌다.
그의 판단에(물론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선우가 쓴 <지평선이 보일 무렵>은 분명한 수작(秀作)이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실감나게 다가왔다.
아무리 내 자식이라고 하지만, 이 녀석은 천재였다.
천재라는 단어 외에는 적절한 표현이 없었다.
음악과 미술에만 어린 천재가 있는 줄 알았는데, 문학에도 어린 천재가 있었다.
“아버지, 어때요?”
선우의 질문에 규용은 대답 대신 한 가지 동작을 취했다.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 것이다.
“에이~ 왜 그러세요. 진짜 소감을 말씀해 주세요.”
“……정말이야. 정말로 대단한 글이었어.”
“조금 과한 평가시네요.”
“과하긴, 오히려 부족하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읽었다.”
규용은 양팔을 이용해 선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독자의 마음에 잔잔한 여운을 남기는 글이야. 아빠는 진짜 감동받았어.”
선우는 규용의 거듭된 칭찬에 부끄러운지 살며시 입을 닫았다.
“내일 바로 교정 넘기고 디자인 시작할게.”
“훗! 잠시만요. 대표님. 그건 아니죠~”
선우의 눈빛이 달라졌다.
“일단 계산부터 정확히 하셔야죠. 얼마 주실 건가요?”
“……쳇!”
규용의 입술이 삐죽 나왔다.
“25% 드리겠습니다. 작가님도 아시죠? 25%면 초록별 출판사 최고 대우입니다. 남는 것도 없어요.”
“후후후~ 그럼요. 아주 잘 알지요.”
“그럼 계약서부터 쓸까요?”
“당근이죠. 부자지간에도 계약은~~”
“철저히~~!!”
“철저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하하하~~”
“하하하하하하~~”
* * *
강남구 학수동은 두 얼굴을 지니고 있다.
낮에는 보통의 동네와 다를 바가 없지만 저녁이 되면 학수동은 그 옷을 바꿔 입는다.
오후 5시, 초저녁이 되자 회사원들은 슬슬 퇴근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와는 반대로 출근을 준비하는 미녀들이 나타나 미용실을 점령해 갔다.
모두들 미스코리아 뺨치게 생긴 미녀들이다.
다른 한쪽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그녀들을 태우고 어디론가로 향할 고급 승용차들이 골목길 사이로 길게 늘어져 있다.
이날 저녁,
선우는 커피숍에 앉아 조용히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이때 ‘ARA’라는 간판이 걸린 건물 앞으로 고급 승용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멈춰서더니 거만한 표정의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남자의 정체는 김진우다.
강하나 문제를 해결했으니 이젠 김진우에 대한 문제를 해결할 차례다.
‘……훗! 옛말에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했지. 역시 옛말 틀린 게 없어.’
그동안 와이프에게 바짝 엎드려 지내느라 그렇게 좋아하던 것을 못 했으니 몸이 아주 달아오를 판일 것이다.
-복수는 인간의 감성을 자극한다.
-복수는 아주 짜릿하면서도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말초신경을 자극한다.
-복수에 성공하는 순간 인간은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복수는 마약보다 강렬한 쾌감을 준다.
“어서 오십시오. 대표님. 그동안 격조하셨습니다.”
“……신경 쓸 일이 많아서 못 왔어.”
“아! 그러셨군요. 그럼 이제는 좀 한가해지신 겁니까?”
“음~ 조금? 후후후!”
“아~ 네. 그렇군요.”
최 사장은 베테랑답게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았다.
“오늘 애들은 좀 어때?”
“대표님이 오랜만에 오신다는 말에 얼굴, 몸매 거기에 마인드까지 갖춘 에이스급으로 준비했습니다.”
“하하하! 좋아. 좋아. 아주 좋아~ 내가 이래서 자넬 좋아한다니까~”
오랜만에 주점을 찾아서 그런가?
김진우의 어조가 상당히 들떠있다.
“영광입니다. 대표님. 제가 직접 모시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그래. 그래.”
김진우는 최 사장의 안내에 따라 ‘ARA’ 내부로 들어갔고 선우 역시 뭔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가면(假面).
선우가 조심스럽게 꺼낸 것은 떡갈나무로 만들어진 새하얀 가면이다.
자세히 보면 가면 전체에 기하적인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는데 이 나무는 사실 공동묘지에서 태어나 100년의 시간 동안 시독을 먹고 자란 떡갈나무였다.
“……하지만 마나를 주입하면 이렇게 바뀌지. 후후후. 참 좋은 세상이야. 돈이면 못 구하는 게 없어.”
시독을 먹고 자란 나무는 흑마법을 펼치기에 아주 좋은 재료다.
-우우우웅!!
다음 순간,
유리창에 비친 선우의 모습이 변했다.
초롱초롱하게 빛나던 선우의 눈이 반달눈으로 변했고 코가 굉장히 커졌다.
왠지 기름진 아랍인의 얼굴 같다.
나이도 최소 십 년은 더 들어 보였고 말이다.
“후후후, 이게 나란 말이지?”
생김세가 외국인, 그것도 아랍인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차피 이것의 목적은 정체를 감추는 것에 있었다.
앞으로 3시간,
선우는 스스로 가면을 벗기까지 이 모습을 유지할 것이다.
-딸랑딸랑.
가게를 나서는 선우를 향해 점원이 인사를 건넸다.
“안녕히 가세요.”
“네, 수고하세요.”
점원은 뭔가가 이상했는지 이미 멀어지고 있는 선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한 번 갸웃했다.
“……저 손님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