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4화
34화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다(2)
002로 시작되는 꽤 긴 번호.
잠시 후,
영국식 악센트가 확연히 느껴지는 음성이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Hello~
“……Hello. My name is Terry Lee.”
선우의 눈가에 왠지 사악해 보이는 미소가 그려졌다.
* * *
창밖에는 장대비가 내리고 있다.
오랜만에 내리는 시원한 빗줄기에 거리에는 사람들의 모습을 찾기 힘들었지만 강남의 모처에 위치한 DNC 사옥은 지금 발칵 뒤집혀 있었다.
“이거야말로 시장 바닥이 따로 없군.”
DNC 사옥 앞에 수십 명의 기자들이 몰려왔다.
신문기자들의 갑작스런 난입으로 인해 경비원들은 어리둥절한 모습이다
“여기는 DNC 사옥 앞입니다.”
“동영상 사건의 주인공은 바로…….”
이 모든 일의 중심에는 강하나가 있었다.
카메라맨들은 무엇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듯, 하이에나 같은 눈빛을 보이며 저마다 플래시를 터뜨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기자 사절, 언론 인터뷰 절대 사절!]
DNC 사무실의 전화는 모두 코드를 뽑아놓았을 정도니 말 다 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미 다수의 사람들이 동영상을 다운받았는데, 지금도 계속해서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하나 동영상.
-청순 여배우 강하나의 이중생활.
-여배우 강하나 XX 장면.
“X발!! 어이가 없네.”
동영상을 확인한 DNC의 수장, 박수종 대표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고개를 돌려 강하나를 쳐다보았다
“지금 떠도는 영상이야, 할 말 있어?”
“이, 이게 어떻게······.”
그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할 말 있냐고? 내가 지금 묻잖아!!!”
박 대표의 격한 반응에 강하나는 순순히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강하나의 말을 들은 박수종은 맥이 탁 풀렸다.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이젠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러니까 조정민이라는 사람에게 니가 협박을 받았다고?”
“네. 대표님.”
“집어치워! 어디서 개구라야?”
“……네?”
“내가 호구야? 이미 다 알아봤어. 그 새끼 너 때문에 이혼하고 완전히 망해서 지금 실종자 상태야. 심지어 그 새끼 가족들도 현재 그 새끼가 어디에서 뭐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고!!”
“그…… 그럴 리가…… 없어요. 미, 미진이도 봤는걸요. 미진이를 불러주세요.”
“미진이가 봤다고?”
“네.”
“됐어. 둘이서 이미 입을 맞춰놨겠지.”
“아, 아니에요.”
“닥쳐! 닥치고 내 말 똑똑히 들어.”
강하나는 박수종 대표의 거친 폭언에 어쩔 줄을 몰랐다.
-꿀꺽!
“이미 네가 그 새끼와 다른 곳도 아닌 네 차에서 함께 한 영상이 사방에 쫙 깔렸어. 이건 내가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저 푸른 집에 사시는 분이 오셔도 못 막아. 자! 그럼 이제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
그녀는 박수종 대표의 시선을 감히 맞받지 못했다.
고개를 푹 수그린 채 꼼짝달싹도 하지 못하고 그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자신의 결백을 항변하려고 했다.
“그, 그게…….”
“꺼져! 내 눈앞에 사라져!”
“대, 대표님. 이건 함정이에요. 전 정말 함정에 빠진 거라고요.”
“닥치라고! 내가 바보야? 내가 호구냐고!! 더 이상 너랑 얘기하고 싶지 않으니까. 나가. 어서 꺼지라고!! 내 말 안 들려?”
박수종 대표는 그녀와 잠시라도 같이 있기 싫다는 듯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미친년, 넌 이제 끝났어. 아주 완전히 끝났다고!”
“흑…… 흑흑……. 흑. 으아아앙!!”
홀로 남은 그녀는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울음을 토해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강하나는 DNC 사옥을 나섰고 그녀를 발견한 기자들이 그녀를 향해 개떼처럼 몰려들었다.
“강하나 씨!”
“영상 속의 주인공이 강하나 씨 맞습니까?”
“상대 남자는 대체 누굽니까?”
기자들이 그녀에게 질문 세례를 퍼붓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녀는 질문에 답할 정신이 없다.
하늘이 노랗고 땅이 흔들렸다.
-강하나 한국 국적 포기?
-LA에서 목격.
-강하나, 호주 이민.
세상은 한동안 강하나 동영상 사건으로 떠들썩했지만 연예계의 특성상 몇 달이 지나자 강하나에 대한 관심은 완전히 사라졌다.
여담이지만 후에 스포츠 신문 한편 귀퉁이에 그녀가 한국을 떠나 외국으로 이민을 갔다는 소식만이 짧게 실렸을 뿐이다.
각설하고 90년대를 휩쓸던 여배우 강하나는 이렇게 브라운관과 영화판에서 모습을 감추게 되었고 조정민은 선우의 도움을 받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큰돈은 아니지만 조그만 가게 하나 차릴 정도의 돈이 조정민의 계좌에 입금되었다.
-레스토랑.
“마지막으로 한 가지가 더 남았네요. 잠시 여기에 손을 올려 주시겠어요?”
“제 손을 여기에요?”
“네. 잠시만 올려 주시면 됩니다.”
“……이러면 되나요?”
“네, 잘하셨습니다. 이제 눈을 잠시 감아 주십시오.”
조정민은 선우가 시키는 대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수인을 맺는 데 성공한 선우가 조정민을 향해 마법을 펼쳤다.
“환상 마법, 기억의 조작!”
-우우웅!!!
뭔가 요상한 기운이 느껴지는 순간 정민의 눈이 풀렸다.
그리고 그의 기억 속에 존재하던 남자의 존재가 완벽하게 사라지게 되었다.
* * *
수만 권의 책들이 가지런한 모습으로 진열되어 있는 대형 서점의 꼭대기.
그러나 왠지 모를 차가운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이유라뇨?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초장부터 돌직구를 던지는 규용과 초장부터 모르쇠로 일관하는 대아문고의 차용철 이사다.
“저희 출판사 작품들의 매대 위치가 모두 바뀐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을까요?”
“매대 위치가 바뀌었다……. 그럴 수도 있죠. 근데 그걸 왜 물어보시는 겁니까?”
“네?”
“매장마다 매대를 담당하는 담당자가 있을 텐데요.”
“네, 각 매장마다 MD라 불리는 담당자가 있죠. 그리고 그 위에 차 이사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규용의 말이 이어졌다.
“한두 개 지점이라면 저도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거의 모든 지점에서 저희 출판사 작품이 한적한 곳으로 이동되었더군요. 제가 지방까지 직접 돌아 확인한 사실입니다.”
직접 확인했다는 말에 차용철 본부장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지방까지 움직이셨다니, 시간이 많으신 모양입니다.”
비꼬는 것인가?
차용철 이사의 말에 규용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대답이나 해 주시죠.”
규용의 요청에 그는 계속해서 모르쇠로 일관할지, 아니면 시인을 할지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입을 열었다.
“……매대의 위치가 바뀌었다는 건, 단순한 이유에서입니다. 판매량이 좋지 않아서 옮긴 거죠.”
“판매량이 좋지 않다고요?”
“네.”
규용은 그의 변명에 어이가 없었다.
‘이 새끼야, 그건 네가 구석으로 옮겨서 그런 거잖아.’
그러나 현재 출판계의 갑은 출판사가 아닌, 대형 서점이었다.
규용은 애써 표정을 관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초록별 출판사에 많은 혜택을 주지 않았습니까? 초록별만 밀어준다고 몇몇 출판사에서 항의도 받았었습니다.”
“재고(再考)의 여지가 없는 겁니까?”
“섭섭하겠지만 당분간은 그렇습니다.”
그는 규용을 향해 한 번 싱긋 웃더니 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
“뭐 큰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서점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독자가 아닙니까? 독자들이 작품을 찾으면 저희 역시 당연히 좋은 자리로 옮겨 드릴 겁니다.”
애써 돌려 말하고 있지만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당분간 너희들에게 좋은 자리를 주지 않겠다는 일종의 통보였다.
“그럼 이만 일어서도 될까요? 제가 좀 바빠서요.”
규용은 그를 잡을 수 없었다.
“……후회하실 겁니다.”
“후회요?”
순간 차용철 본부장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후회라……. 후후후! 그거 무척이나 기대되는군요. 어디 초록별 출판사의 행운을 빌어 보겠습니다. 굿 럭~”
“…….”
그는 굿 럭이라는 말을 끝으로 밖으로 나가 버렸고 규용은 그의 뒷모습을 담담하게 쳐다보았다.
뭔가 돌파구가 있어야 하는데, 당최 길이 보이지 않는다.
40%에 달하는 인세와 대형 서점을 등에 업은 김진우의 공격은 참으로 고약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해결의 열쇠를 가진 사람이 규용을 찾아왔다.
“실례합니다. 여기가 초록별 출판사가 맞는지요?”
“네, 맞습니다만…… 누구신가요?”
푸른 눈을 가진 외국인의 등장에 출판사 직원은 적잖이 당황한 모습이다.
“최규용 대표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대표님을요?”
“네.”
“약속을 하고 오셨나요?”
“네. 이틀 전에 연락을 드렸습니다. 전 브론즈베리에서 왔습니다.”
“브론즈베리요?”
“네. 영국, 브론즈베리 출판사입니다.”
“브론즈베리라면?!!”
푸른 눈의 외국인이 브론즈베리 출판사에서 왔다는 말에 현석은 순간 흥분했다.
“이, 이쪽으로 오십시오. 제가 직접 모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잠시 후,
규용과 외국인이 만나게 되었다.
“반갑습니다. 최규용입니다.”
“에드워드 홀먼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방긋 웃으며 악수를 나눴다.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그날 밤,
브론즈베리와의 계약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규용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태리 포터> 시리즈는 아직 국내에는 소개되지 않았지만 현재 북미와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판타지 소설이다. 더욱이 얼마 전 시리즈의 1편이라 할 수 있는 <태리 포터와 흑마법사의 돌>이 할리우드에 의해 영화화되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져 현재 수많은 사람들이 영화의 개봉을 기다리고 있었다.
흥행이 확실한 만큼 만약 한국어 출판 계약을 따낸다면 그야말로 대박이 확실한 작품이 바로 이 <태리 포터>였고, 당연히 국내 대형 출판사들 역시 이 작품을 들여오기 위해 물밑으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손님이 찾아온 것이다.
“번역본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네. 이미 감수까지 끝낸 상황입니다.”
물론 번역본을 받는다면 초록별 출판사 내부에서 다시 감수를 해야겠지만 저렇게 자신만만한 표정을 보아하니 별문제가 없어 보였다.
“죄송한데, 질문을 하나 드려도 될까요?”
“네, 말해보세요.”
“왜 저희에게 오셨나요?”
“네?”
“출판사의 규모나 역사를 봤을 때, 초록별보다 뛰어난 회사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희를 찾아오셨는지 궁금해서요.”
“……후후후, 그건 말입니다~~”
규용의 질문에 에드워드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작가님이요?! 그게 정말입니까?”
에드워드의 말에 의하면 <태리 포터>를 집필한 작가의 강력한 요청으로 인해 초록별을 찾아왔다고 한다.
“네. 태리 리 작가님께서 초록별 출판사의 이름을 꼬집어 말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순간 규용의 머릿속에 이태리 작가의 이름이 스치고 지나갔다.
‘에이, 아니겠지. 두 사람의 영문명이 다르잖아?’
초록별 출판사와 계약한 이태리 작가의 영문명은 고 태리 포터의 작가는 라는 알파벳을 사용했기에 두 사람을 동일인물로 보긴 어려웠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이와 같은 일이 종종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한국어 ‘이’는 영어로 ‘Lee’ 혹은 ‘Yi’로 쓰인다.
태리라는 이름 역시 ‘Taeri’ 또는 ‘Terry’로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