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3화
33화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다(1)
한눈에 봐도 꽤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지는 레스토랑에 노숙자의 등장은 꽤나 괴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누가 자신을 이런 고급 레스토랑에 초대했을까?
설마 가족?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노숙자 조 씨가 가족과 소식을 끊은 지 이미 3년이 지났기 때문이다.
남자를 따라 레스토랑 입구까지 들어온 노숙자 조 씨의 눈빛 역시 의문점이 가득했다.
강하나에게 복수를 하다니, 돈도 권력도 이제는 아무런 힘도 없는 그가 어떻게 그녀에게 복수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입구 앞에서 조 씨는 잠시 갈등에 휩싸여야 했다.
이대로 발길을 돌릴지, 아니면 들어갈 것인지 말이다.
‘그래. 이제 내게 남은 게 뭐가 있다고!’
이것이 혹시 계략이더라도 그는 순순히 넘어가 주기로 마음먹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그…… 럽시다.”
조 씨는 남자의 안내에 따라 레스토랑 내부로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뚜벅뚜벅.
방문을 여는 순간,
한 남자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저 남자는 대체 누구지?’
신분을 밝히기 꺼리는지, 남자는 검은색 선글라스에 마스크까지 착용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생각보다 남자의 나이가 젊어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이때, 그 남자가 입을 열었다.
“조정민 씨 맞습니까?”
“그, 그렇습니다만.”
“만약 당신을 이렇게 만든 강하나에게 복수를 하고 그와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네?! 그, 그게 무슨······.”
그는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말까지 떠듬거렸다.
-스윽!
남자가 조 씨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한번 보시죠.”
서류를 확인한 노숙자 조 씨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남자는 그가 서류를 읽는 동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찻잔에 담긴 차만 마실 뿐이다.
“이, 이런 개 같은 년!!!”
정체불명의 남자가 건넨 서류에는 강하나의 적나라한 성공 스토리가 담겨 있었다.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건 아니었다.
대표 이사 자리를 두고 경쟁을 벌였던 상대편 이사가 강하나와 공모해 함정을 판 것이었다.
노숙자 조정민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외쳤다.
“뭐든 하겠습니다.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하면 됩니까?”
그는 마치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마스크를 착용한 덕에 확신할 수 없었지만 왠지 남자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맺힌 것만 같았다.
며칠 후,
강하나는 그녀 앞에 나타난 한 남자로 인해 크게 당황했다.
“오랜만이지?”
“……그러게요. 오랜만이네요.”
중년의 남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치장하고 있다.
‘분명 망했다고 들었는데, 설마 재기했나?’
남자의 정체는 바로 얼마 전까지 영등포역에 있던 노숙자 조 씨, 바로 조정민이었다.
“그동안 잘 지냈어?”
남자의 안부 인사에 그녀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보시다시피……요. 그런데 무슨 일이죠? 우린 이미 오래전에 끝나지 않았나요?”
쓸데없는 안부 따위 묻지 말고 어서 빨리 자신을 찾아온 이유에 대해 말하라는 표정이다.
“훗! 톡톡 쏘는 성격은 여전하군.”
“뭐라고요?”
“기분 나빴다면 미안~ 당신에게 용건이 있어서 왔어.”
“그러니까 그 용건이 뭐냐고요?”
강하나의 퉁명스런 반응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5분! 딱 5분이면 돼. 내게 그 정도 시간은 내줄 수 있지 않아?”
‘저 여유 만만한 태도는 대체 뭐지?’
조정민의 모습에 강하나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5분만 줘.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후회할지 몰라.”
“·········.”
잠시 그의 눈을 바라본 강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딱 5분이에요. 어서 말해 봐요. 절 왜 찾아왔죠?”
“잠시만, 이곳에선 얘기하기가 곤란해. 자리를 옮기는 게 어때? 보여줄 게 있어서 말이야.”
“뭐라고요?”
“여기에서 얘기하면 당신이 곤란해질 수 있다고.”
“……?”
자신이 곤란해질 수 있다는 말에 강하나는 매서운 눈초리로 그를 한 번 쏘아보더니 짜증이 역력하다는 표정으로 마지못해 승낙했다.
“……따라와요.”
강하나는 따라오라는 말과 함께 지하 주차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곧 연예인들의 전유물이라는 하얀색 스타크래프트 밴이 그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미진아.”
“예, 언니.”
“여기 앞에서 5분만 대기해.”
“네, 언니.”
잠시 후,
차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이다.
“대체 할 말이 뭐예요? 뭔데 내가 곤란하다는 거죠?”
“음······.”
그는 잠시 뜸을 들이며 그녀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강하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대체 할 얘기가 뭐냐고요?”
“……우리 다시 만나는 게 어떨까?”
“뭐요?”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이다.
“조정민 씨. 지금 나랑 장난해요? 옛정이 있어서 잠깐 시간을 내줬더니……. X발! 지금 어디다 대고 들이대는 거야! 그런 말 할 거면 당장 내려!”
“워워~ 알았어. 진정해. 나도 그냥 한번 해 본 말이야.”
“뭐요? 이런 개…….”
그녀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튀어나올 찰나 조정민은 자신의 품에서 봉투를 꺼냈다.
“이것부터 보고 얘기하지.”
“……그게 뭔데요?”
“보면 알아.”
그녀의 질문에 조정민은 짧게 답했다.
왠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이, 이건?’
봉투 안에는 몇 장의 사진이 있었는데, 사진을 확인한 강하나는 말문이 콱 막혀 버렸다.
“이, 이게 어떻게?”
“놀랐지?”
그녀는 자신의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그러고는 사진을 죽죽 찢었다.
-좍! 좌악! 쫙!
“훗! 그래, 찢어. 계속 찢어. 사진은 얼마든지 현상하면 되니까. 그렇게 찢으라고! 하하하하~~~”
“개새끼! 다 지웠다고 했잖아.”
강하나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터져 나왔다.
“나도 그런 줄 알았어. 그런데 요즘 기술이 엄청나게 좋아졌더라고!”
“뭐라고요?”
“포맷한 하드를 복원시키느라 미국까지 가서 돈 좀 썼지만 그 덕에 영상도 건졌지 뭐야. 영상도 한번 볼래?”
“……!!”
강하나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녀는 조정민의 시선을 감히 맞받지 못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러나 상대가 칼자루를 쥔 이상 그녀는 갑의 위치에서 순간 을이 되어 버렸다.
“……내게 원하는 게 뭐예요?”
강하나의 어투가 공손하게 바뀌자 조정민은 득의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별것 없어. 현금 20억 그리고…….”
“뭐, 뭐라고요?!!”
“왜 그리 놀라? 당신 정도면 1년에 한 20억 정도는 벌지 않아?”
조정민은 비웃음이 가득한 눈빛으로 강하나를 쳐다보았다.
“20억이면 깔끔하게 원본을 넘겨줄게, 어때?”
“…….”
조정민의 제안에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애꿎은 입술만 깨물고 있다.
만약 돈을 준다고 해도 이것이 끝이 아니라면 또 어떻게 하나?
“그러니까 내가 아까 다시 시작하자고 했을 때, 승낙했으면 좋았잖아?”
비아냥거리는 소리에 순간 화가 폭발한 강하나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한다.
“워워~~ 진정해.”
조정민은 품에서 CD를 한 장 꺼내어 흔들었다.
“물론 이것도 복사본이야. 원한다면 줄게. 가져가서 보든지~~”
“……!!”
강하나는 현재의 상황에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 찍었던 것이 부메랑이 되어 그녀에게 돌아올 몰랐다.
이때, 하나를 찾는 미진의 음성이 차 밖에서 들려왔다.
“언니! 괜찮으세요?”
벌써 5분이 지난 모양이다.
조정민이 이죽거리며 물었다.
“5분이 지났나 보네, 어떻게 할까? 나…… 갈까?”
“……미진아, 한 30분만 더 있다가 올래?”
강하나는 밖을 향해 소리쳤다.
“30분이요?”
“응.”
“네. 언니. 알겠어요.”
-저벅저벅…….
미진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져 가자 강하나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만약 내가 당신에게 돈을 준다고 해도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지?”
‘후훗, 성공이다.’
돈을 준다는 말에 정민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날 믿지 말고 그저 돈을 믿으라는 말밖에 해줄 말이 없네.”
“……!!”
그녀는 짧은 순간 온갖 생각을 떠올렸다.
‘그래, 일단은 이 새끼부터 안심시켜야 해.’
20억을 넘겨주는 순간, 미리 대기해 있던 사람들이 조정민을 납치하는 것이다.
그리고 난 후,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면 더 이상 문제는 없을 것이다.
“……언제까지 준비하면 되지?”
“오오~~ 좋아. 일주일 줄게! 하지만 그 전에 하나 더~~”
조정민은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고 다음 순간 강하나는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이,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왜?”
조정민의 말투는 여전히 여유가 넘쳐흘렀다.
“일종의 계약금이라고 생각해.”
“계약금?”
“그래. 계약금. 계약금이 없으면 이번 거래는 무효야.”
단호한 그의 말에 강하나의 맥이 탁 풀렸다.
또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방음도 되겠다. 스타일리스트 오려면 시간도 많이 남았겠다. 대체 뭐가 문제야?”
정민은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안 할 거야?”
“……!!”
강하나의 표정이 구겨졌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군. 일단 이 새끼를 안심시킬 수밖에······.’
그로부터 한 시간 후,
조정민은 선글라스에 마스크를 착용한 남자에게 손목시계와 만년필을 건넸다.
“영상은 찍었나요?”
“네. 확실하게 찍었습니다.”
조정민이 강하나에게 보여준 사진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1급 프로그래머를 섭외해 만든 합성 사진이다. 돈이 꽤 들었지만 효과는 위에서 보듯 끝내줬다.
과거 강하나와 조정민이 그렇고 그런 관계였기에 강하나가 생각보다 쉽게 속아 넘어간 것이다. 물론 그녀가 속지 않았다면 다음 플랜도 있었지만 말이다.
남자는 조정민이 건넨 시계와 만년필의 영상을 바로 그 자리에서 확인했다.
-지이잉!
그것들은 모두 해외에서 특수 제작된 스파이용 시계와 만년필로 내부에 특수 카메라가 내장된 기계였다.
-음…… 음!!
영상을 재생시키자 강하나의 모습이 아주 선명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이날 저녁,
선우는 집에 귀가하고 있는 규용과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아버지.”
“누, 누구세요?”
“아!!”
선우는 서둘러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벗었다.
“저예요. 선우.”
“어, 선우구나. 근데 무슨 일 있었어? 선글라스에 마스크까지 착용해서 몰라봤잖아.”
“흐흐흐~ 좀 그럴 일이 있었어요. 근데 아버지.”
“응?”
“……무슨 일이 있으세요?”
“어? 왜?”
선우는 규용의 얼굴에서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뭔가 근심이 가득한 느낌이었다.
“……얼굴이 어두워 보여서요.”
“뭐? 내 얼굴이 어두워 보인다고?”
선우의 말에 규용은 깜짝 놀란 척하며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얼굴이 좀 탔나? 선탠을 너무 오래 했나 보네.”
“켁!”
규용의 개그는 진정 썰렁했다.
암튼 각설하고 규용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
“요즘 밖에서 사람들을 자주 만났더니 좀 피곤한 모양이네. 우리 아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네. 아버지.”
규용의 말에 선우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가 살아온 세월이 얼마던가?
어쭙잖은 규용의 연기는 선우의 매서운 눈빛을 피해갈 수 없었다.
‘흐음, 대체 무슨 일이지?’
분명 뭔가 있다.
하지만 아버지가 곤란해하는 것 같으니 물어보지 말아야겠다.
대신 조용하고 은밀하게 알아보기로 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선우는 자연스럽게 이 문제에 대해 알게 되었다.
“뭐? 인세가 40%?! 대한민국 문학계의 황금기를 열자고 했다고?!”
김진우가 대한민국 문학계의 발전과 작가들의 권익을 위한다는 구실로 작가들을 흡수한 것이다. 좀 더 깊게 알아보니 안 그래도 지금 이 문제로 인해 대한민국 출판계가 들썩이고 있다고 했다.
“김진우 이 새끼, 미친 것 아냐?”
선우가 볼 때 김진우의 칼끝은 분명하게도 초록별 출판사를 향해 있었다.
내친 김에 대형 서점 몇 군데를 돌아보았다.
“……헐?!!”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초록별 출판사에서 나온 작품들은 고객들의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죄다 진열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이런 이유로 인해 규용의 표정이 좋지 않았던 것 같다.
“김진우, 니가 이렇게 나왔단 말이지?”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반병신을 만들어 주는 건데, 어설프게 밟아줬더니 이런 상황이 온 것 같다.
‘강하나, 김진우……. 좋아. 어디 한번 해보자. 완전히 박살내 주지.’
선우는 핸드폰을 들어 곧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