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9화
29화 고등학생 최선우
“선우야! 같이 가자.”
뒤쪽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길을 걷던 선우가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서 동혁이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오고 있다.
선우와 동혁은 백합 예술 고등학교에 나란히 입학했다.
물론 설연 역시 선우를 따라 백합 예고에 들어왔고 말이다.
백합 예술 고등학교는 만들어진 지 몇 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동혁과 설연의 입학 덕분에 유명세를 탔는데 두 사람은 전공에 맞춰 각각 실용음악과와 연극영화과에 입학했고 선우는 문예창작과에 들어갔다.
“선우야, 답답하지도 않냐? 그 머리 좀 어떻게 해라.”
앞머리를 길게 내린 선우의 모습은 퍽이나 인상적이다.
게다가 명탐정 스타일의 검고 두꺼운 안경을 더해 사람들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경은 뭐냐? 니가 명탐정이야?”
“아침부터 웬 시비야? 내가 왜 이렇게 하는지 몰라서 그래?”
이것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평범한 고등학교 생활을 원한 선우의 선택이었다.
동혁 역시 이와 같은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쩝! 알지.”
“알면서 왜 그래?”
“너랑 같이 연예인 하고 싶어서 그렇지.”
“됐네용~ 난 연예인 할 생각이 없거든요.”
“쳇~~오늘도 안 넘어가는군.”
“이제는 그만할 때도 된 것 같은데~”
“웃기지 마, 포기하지 않는다.”
“지랄~”
“랄프~~~”
쩝!
랄프 끝난 지가 언젠데~
두 사람은 랄프가 지겹지도 않나 보다.
“근데 오늘따라 웬일로 이렇게 일찍 일어났냐?”
“오늘이 입학식이잖아. 나도 예의가 있지. 참~ 선우야. 클놈 형님이 너 한번 보자고 하더라.”
“날?”
“응.”
“왜?”
“고등학교 입학도 축하할 겸~~ 겸사겸사~~ 네 덕에 형님들이 대만에서 짱 먹었잖아.”
“훗~~ 그래. 시간 함 잡아봐. 나도 형님들 얼굴 보고 싶다.”
“오케이~~”
이와 같은 시각,
아침부터 초록별 출판사가 분주한 모습이다.
“대표님, 신현민 작가에게 연락이 왔는데, 계약 만료된 소설에 대해 저희와의 재계약을 거부했습니다.”
“뭐라고?”
“조경환 작가도 차기작 계약을 취소하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재계약 거부 사태를 시작으로 작가들의 이탈이 일어났다.
위약금을 내고 차기작 계약을 파기한 작가들도 있었는데 문제는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어떻게 된 일인지, 초록별 출판사의 매출이 큰 폭으로 감소하기 시작한 것이다.
급작스런 매출 하락에 최규용 대표가 직접 서점을 찾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규용은 어이가 없었다.
얼마 전에 초록별 출판사에서 야심차게 출간한 <마림바>, <너에게 나는 어떤 존재인가?>, <화성에서 온 남자>와 같은 신규 작품이 사람들의 시선에서 한참이나 벗어난 구석진 자리에 위치해 있는 것이 아닌가?
규용은 전과는 달라진 매대의 위치에서 매출 하락의 이유를 찾았다.
그는 곧바로 담당 MD를 불렀다.
“이 책들이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네?”
규용의 질문에 담당 직원은 순간 당황했다.
“분명 잘 보이는 곳에 책을 진열해 주기로 했는데, 왜 이런 구석진 곳에 신간들이 있는 거죠?”
“죄송하지만 누구십니까?”
직원의 반문에 규용은 품에서 명함을 건네며 말했다.
“초록별의 최규용 대푭니다.”
규용의 명함을 확인한 직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일개 사원이 아닌, 출판사 대표인 것이다.
“아, 그…… 그게…….”
잠시 후,
직원의 연락을 받은 누군가가 매장으로 내려왔다.
“네. 부점장님. 초록별 출판사 최규용 대표가 직접 왔습니다.”
-최 대표가요?
“네. 어떻게 할까요?”
-흐음. 그래요. 알겠어요. 내가 지금 가겠습니다.
“지금 오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규용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작가들의 재계약 거부 사태와 이번 일이 뭔가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더욱이 지금 오겠다는 말과 달리 성기남 부점장은 거의 한 시간이 넘어서야 어슬렁거리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최 대표님.”
“……부점장님.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왜 저희 출판사 책들이 저쪽에 있는 거죠?”
“음. 일단 저쪽으로 가서 얘기하시죠.”
두 사람은 사람들의 인적이 드문 곳으로 이동했다.
비열한 현실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나타나는 매대에서 눈을 떼었다.
“매대의 위치가 바뀌었네요.”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요.”
“선수끼리 왜 그러십니까? 제가 이 바닥에 하루 이틀 있었습니까? 대체 누굽니까? 누가 이런 장난을 치는 겁니까?”
규용이 던진 돌직구에 성기남 부점장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부점장님! 말씀해 주십시오.”
“…….”
성기남 부점장이 품에서 담배를 꺼냈다.
“……피우시겠습니까?”
“아니요. 괜찮습니다.”
규용은 아무 말 없이 성기남 부점장이 담배를 다 피울 때까지 기다렸다.
“……본사에서 압력이 들어왔습니다.”
성기남 부점장은 잠시 망설임을 보였지만 결국 규용의 질문에 답을 했다.
“본사에서요?”
“네. 본사에서요.”
“저희 것만 그런 겁니까?”
“네. 초록별 출판사를 꼭 집어서 이야기하시더군요. 다행히 <단팥빵>과 <아빠를 부탁해>는 네임 밸류가 있어서 매대의 위치를 옮기지 않았지만 신간들은 그 사정이 다르지 않겠습니까?”
성기남 부점장은 규용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고약하지만 그렇게 된 겁니다.”
두 사람 사이엔 잠시 조용한 침묵만이 흘렀다.
회사로 돌아오는 내내, 규용의 심사가 복잡했다.
누가 차용철을 움직여 이런 짓을 벌였을까?
문득 한 사람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바로 문학사의 김진우다.
“……!!”
이런 짓을 할 사람은 그 녀석밖에 없었다.
규용은 이제야 돌아가는 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재계약을 거부한 작가들 역시 김진우가 손을 쓴 것이 분명했다.
규용의 가슴이 맹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일단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자.’
규용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 * *
-마호니 클럽 입구.
“으하하하! 선우야~”
“선우야! 왔냐!”
클놈은 선우가 클럽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다가왔다.
“욥~ 브로.”
“으으, 형님. 징그럽게 왜, 왜 이러세요?”
두 팔을 가득 벌려 안은 덕에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흐흐흐~~ 징그러워도 어쩔 수 없어. 다 네 덕분이야.”
“그래, 선우야. 진짜 고맙다.”
“뭐가요?”
선우는 다 알고 있었지만 짐짓 모르는 척했다.
“후후후! 놀라지 마라. 대만에서 말이야…….”
“헐! 그게 정말이에요?”
“그래. 완전 국빈(國賓) 대우를 받았다니까.”
“그래, 인마. 진짜 장난도 아니었어. 공항에서부터 아무런 검사도 받지 않고 그냥 호텔로 직행했다고~~”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게 바로 VIP 이동 통로였대.”
“VIP 이동 통로요?”
“그래. 거기가 외국 대통령들이 오면 검색 없이 그냥 나오는 통로였대.”
“오! 대박~~!!”
“그것뿐만이 아니야. 우릴 보겠다고 중국 본토나 마카오에서 헬기 타고 사람들이~~”
“우어워~~”
선우는 감탄성과 함께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보였다.
“후후후~ 이게 모두 네 덕이다.”
“그래, 우리 예쁜이 동생. 이리 와봐, 형이 뽀뽀 한번 해줄게.”
“아니요. 뽀뽀는 정중하게 사양하겠습니다.”
“뭐 인마?”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손님~~”
“손님? 큭큭큭!”
“하하하하~~”
후훗!
역시 예상대로다.
선우의 예상대로 클놈의 <괘락지남>은 발표되기가 무섭게 대만 음원 차트에서 1위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해내고야 말았다.
중국과의 수교로 인해 대만과의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클놈의 인기는 가히 메가톤급이라고 한다. 오죽했으면 대만 현지 뉴스에서도 ‘한국은 싫지만 클놈은 좋다’라는 기사가 떴을까?
일부 언론에 따르면 클놈으로 인해 한국과 대만의 관계 개선을 기대한다고 밝히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 귀여운 녀석, 이리 와봐. 형이 뽀뽀 한번 해줄게.”
순간 운래가 선우를 향해 얼굴을 들이댔다.
“웩! 됐다니까요.”
“알았다. 알았어.”
“큭큭큭큭! 운래야, 이제 그만 장난치고 안으로 들어가자.”
“오케이~”
마호니는 연예인들의 출입이 잦은 탓에 회원제로 운영되는 곳이다, 고로 평범한(?) 이들의 출입은 나름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었는데, 어느 누구도 선우를 제지하지 않았다. 먼저 185cm에 이르는 키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저 독보적인 분위기 때문이다.
또한 당대의 스타 클놈과 함께 입장하고 있는데 어느 누가 그의 입장을 제지할 수 있을까?
“어서 오십시오.”
“즐거운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인기 그룹 클놈의 등장에 클럽 내부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순간 입구 쪽을 향해 집중되었다.
“우와! 저기 봐.”
“클놈이다.”
“오~ 포스 죽이는데~~”
그러나 그들의 시선은 이내 선우에게 향했다.
-웅성웅성!
“응, 저 사람은 누구지?”
“클놈이랑 같이 있는데, 혹시 연예인인가?”
“와! 분위기 대박이다.”
명탐정 안경을 벗고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덕에 사람들의 시선이 선우에게 집중되었다. 그것은 가히 군계일학(群鷄一鶴)이었고, 클럽 안에 모여 있던 사람들 사이에선 작은 소요가 일었다.
“쟤 괜찮은데? 내가 한번 대시해볼까?”
“너 같은 호박이?”
“이년아. 너보다 내가 예쁘거든!”
“지랄~”
선우는 사람들의 이러한 반응을 모른 척하며 클놈을 따라 VIP룸으로 들어갔다.
간만에 음악에 취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자! 우리 먼저 건배나 한번 하자.”
“건배요?”
“그래.”
도엽의 제안에 선우가 슬그머니 미소를 보인다.
“맥주 어때?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나?”
“그래. 한 잔 정도면 취하지도 않잖아. 그 왜, 성경에도 나와 있잖아.”
“뭐라고 나와 있는데요?”
“술 취하지 말라고 했지, 술 마시지 말라고는 안 하셨어.”
“후후후~~ 그래요. 형. 형 말이 맞네요.”
선우는 그의 말에 동의하듯 대답했지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하지만 제가 아직 미성년자인 관계로~ 음료수를 마시겠습니다.”
“그래. 알았다. 큭!”
“콜라 어때?”
“네. 그게 좋을 것 같네요.”
잠시 후,
각자의 잔이 채워졌다.
“클놈의 성공을 위하여!”
“우리의 얌전한 고양이를 위하여~~”
“짠~”
“짠~”
세 사람은 시원한 음료(?)를 단숨에 들이켰다.
* * *
“언니~~ 언니~~”
“왜?”
“방금 보셨어요?”
“뭘?”
“조금 전에 클놈이 왔어요.”
“클놈?”
“네.”
클놈의 왔다는 말에 여인의 눈이 가볍게 휘었다.
그녀의 이름은 강하나.
데뷔하자마자 청순한 이미지로 각종 CF와 드라마 주연을 꿰찬 A급 여배우다.
“룸으로 들어갔니?”
“네. 저쪽 VIP룸이요. 요즘 클놈 오빠들이 대만 쪽에서 활동한다고 들었는데, 친구들이 그러던데 그쪽에서 인기가 장난 아니래요.”
“뭐, 나도 들었는데…… 난 별로야. 내 스타일 아냐.”
“하긴 언니는 연하 킬러…….”
“미진아!”
“히끅!”
강하나의 낮은 음성에 미진은 깜짝 놀라며 몸을 숙였다.
“어, 언니, 죄송해요.”
“언니가 말했지? 사람은 그 입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이야!”
“……네.”
그녀는 자신의 실언을 깨달았는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어휴, 내 입이 방정이지. 얼마 전에 루이랑 헤어져서 언니 기분도 안 좋을 텐데…….’
미진은 잠시 후 몰아칠 태풍에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다.
‘어? 그런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무슨 일일까?
폭풍과도 같은 잔소리가 터져 나올 타이밍인데, 조용하기만 하다.
미진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강하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응?”
강하나는 멍하니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녀의 시선은 클놈의 곁에 서 있는 한 남성에게 꽂혀 있었다.
“미진아.”
봄바람이 불어오듯, 부드럽게 들려오는 강하나의 목소리다.
“네, 언니.”
“……따라와.”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