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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흑마법 작가다-26화 (26/187)

◈ 제 26화

26화 운명의 1997년

마침내 운명의 1997년이 찾아왔다.

-재계 서열 14위 한보 그룹 최종 부도.

1997년 1월 대한민국 재계 서열 14위였던 한보 그룹의 부도를 시작으로 기업들의 연쇄적인 부도 사태가 일어났다. 하루에도 수십 개에 이르는 기업들이 문을 닫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1997년 국가부도 사태 당시,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매우 어두웠다.

그러나 숨겨진 팩트가 있다.

말 그대로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가 그랬을 뿐이지 가진 자들은 전과 다름없는, 오히려 전보다 더 큰 씀씀이를 보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결국 죽어나가는 건 힘없고 백 없고 돈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큰아버지의 전화를 받은 규용의 표정이 어둡다.

“……네. 형님. 아! 그, 그건 좀…….”

규용은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네……. 그건 그렇죠. 하지만…….”

‘큰아버지의 전화라, 이것도 나 때문인가? 예상보다 빠르네.’

통화를 끝낸 규용은 연신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여보, 무슨 일이에요?”

“…….”

숨긴다고 숨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미 형님과 통화한 것을 가족들 모두가 보지 않았는가?

“형님이 보증을 좀 서달라고 연락이 왔어.”

“아주버님이 보증을요?”

“응. 자금이 부족하신가 봐.”

“……!”

남편에게 보증을 부탁했다는 말에 수연의 표정이 굳어졌다.

보증을 잘못 섰다가 패가망신(敗家亡身)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부모 형제간에도 보증은 서지 말라는 말이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이성적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여보.”

“그래요. 당신이 무슨 말을 할지, 나도 잘 알아요.”

규용은 수연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녀가 무엇을 걱정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무거운 침묵이 집안을 가득 채운 느낌이다.

“……차라리 여윳돈을 빌려드리는 것이 어떨까요?”

수연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돈을 빌려드리라고?”

“네. 지금은 좀 어렵지만 나중엔 아주버님 사업이 잘될 거잖아요. 하지만 보증은 아닌 것 같아요. 여보.”

예전이었다면 힘들겠지만 지금은 알다시피 사정이 달랐다.

“저희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빌려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수연의 말에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규용이다.

“그래요. 일단 좀 더 생각해 봅시다.”

그는 수연을 다독이며 침실로 들어갔다.

선우는 그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옛날과는 상황이 달라졌지만 안심이 되지 않았다.

모두 과거의 경험 때문이다.

‘내 예상보다 빠르지만…… 어쩔 수 없지.’

선우는 정신 조작 마법을 떠올렸다.

하지만 막상 시도하려고 하니 쉽지만은 않다.

현재 그가 가지고 있는 마나의 양은 2서클 유저의 수준. 그러나 선우가 떠올린 정신 조작 마법은 최소 3서클이 돼야 펼칠 수 있는 마법이다.

1서클 차이지만 마법 총론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굉장히 위험한 시도였다.

자칫 마나가 역류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재수가 좋다면 죽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반병신은 각오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선우는 자신이 있었다.

그가 누군가? 6서클의 마법적 지식과 수많은 경험을 가진 마법사가 아닌가?

‘마법진을 만들고 수식을 중첩하면, 부족한 마나가 해결될 거야. 그럼 가능해. 좋아. 그럼 일단 마법진부터 만들자.’

며칠 후,

모두가 잠든 새벽 선우는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참 좋은 세상이야. 필요한 재료를 이렇게 쉽게 구할 수 있다니!”

시장에 가면 널린 게 선지다.

금가루를 구입하는 데 돈을 많이 썼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슥슥슥……슥!!

선우는 큰 붓에 피를 묻힌 후,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기하학적인 문양이 잠시 후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다.

“후우~훕! 훕!”

기묘한 손동작을 보이며 수인을 맺는 데 성공한 선우가 금가루를 마법진 위로 뿌렸다.

그가 뿌린 금가루는 허공에서 흩어지지 않고 마법진 위로 정확히 날아가 기하학적 문양의 특별한 형상을 이루어 냈다.

바로 오망성이다.

‘좋아.’

-츠츠츠츳!

선우의 이마에는 어느새 굵은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얼핏 보기에 단순해 보였지만 이것은 결코 단순한 작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완성했다.”

수식을 중첩해 원하는 마법진을 완성시킨 선우는 가족들을 향해 수면 마법을 펼쳤다.

“꿀처럼 달콤한 잠을 그대에게~ 슬립!”

-우우우웅!!

수면 마법에 의해 규용과 수연은 물론 여동생 혜진 역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엄마. 아빠! 혜진아~~!!”

큰 소리로 불러도 미동조차 없다.

모두가 잠든 것이 확실하자 선우는 규용을 마법진 위에 올려놓았다.

“……이제부터 당신의 정신은 나에 의해 통제됩니다. 정신의 지배!”

-우우우웅!!

“누군가가 당신에게 보증을 서달라고 하면…….”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정신계 조작 마법이 펼쳐졌다.

‘물약의 도움을 받으면 더욱 좋은데!’

정신계 마법을 사용할 때 연금술로 만든 물약을 사용하면 더욱 효과가 좋다. 그러나 지구에선 그와 같은 재료들을 구할 방법이 없었기에 아쉬울 따름이었다.

“……당신은 보증을 증오합니다. 혐오합니다. 그리고 매우 무서워합니다.”

몇 시간 후,

졸린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난 규용은 어리둥절한 모습이다.

“어라? 내가 왜 거실에 나와 있지? 새벽에 나왔다 잠이 들었나? 우리 마나님이 깨기 전에 얼른 들어가야겠네.”

주위를 살핀 규용이 재빨리 침실로 들어가자 그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던 선우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연이은 마법의 여파인가?

-주르륵!

‘……윽! 젠장!’

쌍코피가 터져버린 선우는 급히 화장실로 향했다.

‘아부지, 이게 모두 마법사 아들을 둔 덕분인 줄 아세요!’

며칠 후,

큰아버지가 집에 왔다.

“규용아, 규용아!”

규섭은 다짜고짜 큰 소리로 규용의 이름을 불렀다.

“네, 형님. 오셨습니까?”

“그래. 인마. 넌 대체 어떤 자식이야?”

“네?”

“네에? 지금 몰라서 물어? 형이 몇 번이나 어렵다고 연락했잖아.”

규섭의 고성에 이어 불쾌함이 가득 담긴 눈초리가 이어졌다.

“너가 그렇게 잘났어? 얼마나 잘났기에 형제간에 보증도 못 서줘?”

보증을 서달라는 규섭의 요구는 너무나도 당당했고 뻔뻔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규용의 몸이 크게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덜덜덜덜!!

“돈 좀 벌었다고 하더니, 형이 우습냐? 인마. 내가 오죽하면 네게 부탁을 하겠어? 시장 상황이 좋지 않아서 도와달라고 하는 거잖아. 인마! 내가 너 초등학교 다닐 때 용돈도 주고 가끔 호빵도 사주고…… 그렇게 챙겨준 게 얼만 줄 알아?”

“…….”

그놈의 용돈과 호빵 타령.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매번 우려먹는 레퍼토리다.

“근데 형이 지금 이렇게 힘들어서 보증 좀 서달라는데 넌 그게 그렇게 어렵냐? 인마!! 니가 그렇게 잘났어?”

-덜……덜……덜……덜덜!!

규용의 몸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동시에 규용의 심장이 폭발할 듯 세차게 뛰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의 끝자락에서부터 감당할 수 없는 감정들이 규용을 덮쳐왔다.

그것의 정체는 증오와 혐오 그리고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원초적 공포였다.

“잔말 말고 지금 나와 같이 은행에 가자. 6개월이면 해결되니까, 그때 꼭 갚아 줄게.”

규섭이 규용의 손을 잡는 순간,

그 역시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다.

“규…… 규용아, 너 왜, 왜 그래?”

“크…… 크헉!”

바로 그 순간,

소스라치는 비명과 함께 규용이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진 것이다.

“아빠!”

“여, 여보!!!”

수연과 혜진 역시 규용의 저런 모습에 깜짝 놀라 달려갔다.

선우는 내심 아버지께 죄송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정신 조작 마법이 성공했다는 사실에 은근 기분이 좋았다.

* * *

“이…… 이런 젠장!”

병원을 나서는 큰아버지 규섭의 표정이 가관이다.

보증의 ‘보’ 자만 꺼내도 입에 거품을 물고 저렇게 쓰러져버리니 이건 대화 자체를 시작조차 할 수 없었다.

혹시 연기하는 게 아닌지 남몰래 담당 의사를 만나 보기까지 했지만 규용의 상태는 거짓이 아니었다.

의사와의 면담을 끝내고 나온 규섭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누가 봐도 낭패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보증의 ‘보’ 자만 꺼내도 남편이 저러니, 죄송해요. 아주버님. 대신 저희가 융통할 수 있는 돈을 최대한 빌려 드릴 테니 우선 그걸로 급한 불을 끄시는…….”

“……쩝!”

수연의 이치에 맞는 설명이 조곤조곤하게 이어지자 규섭의 굳어진 표정도 차츰 풀리기 시작했다.

한 푼이 아쉬운 상황이 아닌가?

‘끙! 어쩔 수 없지.’

규섭은 수연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제수 씨, 그럼 난 제수씨만 믿고 먼저 가겠습니다.”

“네, 들어가세요. 아주버님.”

그리고 이때를 기점으로 동혁의 1집 이 마침내 완성되었다.

동혁의 음반에는 총 10곡의 노래가 수록되었는데, 타이틀곡과 후속 타이틀곡은 선우가 만든 곡이다.

아직까지 인터넷이 크게 활성화되던 시절이 아니어서 현재 T&B에서는 동혁의 음반 홍보를 위한 아이디어 회의가 한창이었다.

“영화 같은 뮤직비디오?”

“네.”

“좀 더 자세히 말해볼래?”

“지금까지의 단편적인 뮤직비디오에서 탈피해 마치 한 편의 영화를 관람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겁니다. 뮤직비디오의 내용 역시 가사에 맞춰서 만들고요.”

“호오~~”

동혁의 말에 김일환 대표가 눈을 반짝였다.

“여기…… 콘티를 한번 준비해 봤습니다.”

“콘티까지?”

“네.”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아니었구나? 좋아. 한번 볼까?”

일환의 허락에 동혁은 만화식 콘티를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하얀 눈이 내리고 있는 일본 이와테현,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국인 유학생 A는…….”

콘티가 한 장씩 넘어갈 때마다 이에 맞춰 동혁의 노래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나 거짓 된 삶을 살지만 널 사랑한 마음은…….

(중략)

-영원히 널 사랑해. 괜찮아 내 모든 걸 준대도

나 이 세상을 살아도 너 없이는 힘이 들어.

남아있는 내 삶을 널 위해 바칠게.

……행복하게 살자.

‘이, 이건 대박이다.’

T&B의 김일환 대표는 콘티와 함께 시작된 노래를 듣는 순간 마치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과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는 반짝이는 미소를 숨기지 못한 채 동혁을 불렀다.

“동혁아.”

“네, 대표님.”

“혹시 콘티 짜면서 생각한 배우들이 있니?”

“……?!!”

동혁은 일환의 질문에 깜짝 놀랐다.

‘동혁아, 만약 김일환 대표님이 캐스팅에 대해 물어보면…….’

선우의 당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있으면 한번 애기해 봐.”

“남자 주인공에 박병헌 선배님을 캐스팅했으면 좋겠습니다.”

“병헌이?”

“네.”

“…….”

박병헌은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A급 배우였다.

그의 위치로 볼 때, 뮤직비디오에 나올 급이 아니었다.

하지만 김일환 대표의 생각은 달랐다.

“최 실장.”

“네. 대표님.”

“병헌이 요즘 뭐 하지?”

“얼마 전 드라마 촬영이 끝나서 잠시 쉬고 있습니다만.”

“좋아. 그럼 남자 주인공 병헌이로 하자.”

-웅성웅성!

“네?”

“왜, 내 말 못 들었어?”

“아, 아닙니다.”

“단순한 뮤직비디오가 아니라고 해, 병헌이 필모그래피에도 도움이 될 거라고 얘기하고 이 콘티도 보내줘. 노래랑 함께!!”

“네, 대표님.”

이날 대한민국 뮤직비디오 역사를 구분할 때, 안동혁 이전과 이후로 나누게 만든 기념비적 작품이 탄생하게 되었다.

안동혁의 과 <불멸의 진실한 사랑>이 출시된 이후 대한민국 뮤직비디오 시장에는 스토리가 있는 뮤직비디오가 하나의 장르화되었다.

“뭘 그렇게 봐?”

“새로 나온 뮤직비디오.”

“새로 나온 뮤직비디오?”

“응. 안동혁이라는 가수 뮤직비디오인데, 이게 완전 대박이야.”

“뮤직비디오가 왜?”

“캐스팅부터 장난이 아니야. 난 영화 예고편인 줄 알았어.”

“……뭔 개소리야?”

“일단 함 봐봐. 스토리도 죽이고 영상도 끝내준다. 끝내줘~~!”

동수는 일단 한번 보라는 성철의 말에 뮤직비디오를 시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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