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8화
18화 두 번째 고리를 만들다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서재, 그리고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한 노인이 그곳에 있다.
카리스마 가득한 노인의 눈빛은 그의 신분이 범상치 않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아, 아버지!”
무릎을 꿇은 채, 떨리는 음성으로 노인을 향해 아버지라 부르는 남자.
남자의 정체는 놀랍게도 김진우였다.
“못난 놈.”
“죄송합니다. 아버지, 하지만…….”
“닥쳐.”
“……!!”
김진우를 향해 고성을 토해내는 노인의 이름은 김격호.
국내 굴지의 대기업 대진 그룹의 창업주이자 김진우의 친아버지다.
김진우는 그의 모친이 김격호 회장의 조강지처가 아닌 첩이라는 이유로 대외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네놈이 감히 내 얼굴에 먹칠을 해?”
“그, 그게 아니라…….”
“닥치라고 했다.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어디서 변명이야. 한심한 놈 같으니!!”
김격호 회장은 진우의 변명 따윈 듣고 싶지 않다는 듯이 명령하듯 단호하게 말했다.
이것은 일반적인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가 아니었다.
김격호 회장은 김진우를 잠시 노려보았다.
“이제 일 좀 하려나 봤더니, 하여간 지 애미를 닮아서 노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김진우의 어머니.
문자희 여사는 반반한 얼굴과 몸매를 무기로 김격호 회장의 첩이 된 여자다.
김진우는 첩의 아들이라는 그 태생적 한계로 인해 늘 가족에게 소외당했다.
사람들은 언제나 김격호 회장의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만 기억했고 그를 외면했다.
그룹의 알짜배기 계열사들 역시 첫째와 둘째의 몫이었다. 하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
김진우 역시 김격호 회장의 배려로 이미 백억 대에 이르는 건물을 유산으로 받았고 차명 계좌를 통해 수백억의 재산 역시 소유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그는 나름 건실한 사업가의 모습으로 변신, 재벌가의 품위(?)를 유지하며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자라온 비정상적인 환경 때문인가?
그는 낮과 밤이 다른 카멜레온과 같은 삶을 살았다.
낮에는 건실한 사업가의 모습이었지만 밤이 찾아오면 언제나 먹잇감을 찾는 하이에나가 되어 클럽을 찾았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하룻밤에 수천만 원도 기꺼이 지불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방탕한 삶을 살던 그에게 뜻하지 않은 행운이 찾아왔다.
서울 시내에 위치한 한 고급 클럽에서 대양 항공의 조윤선과 조우하게 된 것이다.
잘생긴 얼굴에 매너는 기본이요. 여기에 제비 뺨치는 말발로 조윤선을 무장 해제 시킨 것이다.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은 두 사람은 예기치 않은 임신으로 인해 결국 결혼을 하게 되었고 여자 하나 잘 잡았다는 이유 하나로 김진우는 김격호 회장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 일로 인해 구설수에 오르게 된 것이다.
“윤선이는?”
“그, 그게…….”
“윤선이 지금 어딨냐고?”
“……어제 저녁 출국해서 지금 유럽에 있습니다.”
그의 대답에 김격호 회장의 표정이 구겨지더니 탁자 위에 놓인 재떨이를 손에 잡고 김진우를 향해 집어 던졌다.
-파악!
“아악!!”
재떨이에 정통으로 맞은 김진우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김격호의 표정은 여전히 냉담할 뿐이다.
“병신 같은 새끼! 여자 하나 잘 만나 세상에 나올 수 있는 기회를 주었더니, 오히려 집안에 먹칠을 해? 내가 네놈이 싼 똥을 치우느라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는 있는 거냐?”
“죄, 죄송합니다!!”
김진우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이상 문학상 시상식장에서 벌어진 일을 무마하기 위해 손을 썼다는 사실을 말이다.
김격호 회장은 무려 6개월 동안 각각의 신문사에 그룹 광고를 몰아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로 인해 김진우의 이름이 기사화되는 것을 막아낸 것이다.
또한 사돈이 되는 대양 항공에 직접 전화를 걸어 사과까지 했다.
“쓸모없는 놈 같으니!”
“아, 아버지!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그 입 닥치라 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주둥이 닥치지 못해?”
“아, 아버지…….”
-뚝……뚝!
그의 이마에서 시뻘건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당장 윤선이에게 날아가! 가서 그 아이 마음 풀어줘.”
“네.”
“명심해라, 너 혼자 돌아오면 너도 그 길로 끝이야! 알겠어?”
“……알겠습니다.”
“알아들었으면 꼴도 보기 싫으니 어서 나가.”
김진우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서재를 나서는 순간, 그의 등 뒤에서 김격호 회장의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쯧쯧쯧. 못난 놈!!”
“……!!”
김진우의 입술이 크게 한 번 씰룩거렸다.
‘젠장! 모든 게 다 그 새끼 때문이야.’
김진우는 얼굴 없는 작가를 향해 이유 있는 복수심을 불태웠다.
한편 김진우가 원망하는 대상은 현재 무언가를 바라보며 희희낙락하고 있었다.
“후후후~”
선우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산삼이다.
그것도 천종(50년 이상 된 삼, 사람의 손을 전혀 거치지 않고 자연에서 자란 삼)삼으로, 열 뿌리나 되었다.
값어치만 따져도 거의 10억에 달했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판타지 세계에서 6서클의 흑마법사로 생을 마감한 선우는 현재 1서클 마스터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이것은 깨달음이 부족한 탓이 아니다.
지구에 존재하고 있는 마나의 양이 워낙 적다 보니 수련에 수련을 거듭해도 그 효과가 미비했기 때문이다.
이런 세상이라면 평생 동안 검술을 익혀도 소드 익스퍼트의 경지(검기를 만들어내는 경지)에 들어설 수 없다. 잘 해봐야 검풍 정도?
각설하고 천종 산삼을 구한 덕에 인세로 벌어들인 막대한 돈이 대부분 사라졌지만 선우는 무척이나 기분이 좋은 듯 환하게 미소 지었다.
“10억을 투자해서 2서클에 오른다면 수지에 맞는 장사지.”
그의 표정에는 일종의 만족감마저 드러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약물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2서클이 한계라고 알려져 있다.
물론 최상급 마정석이라든지 만드라고라의 뿌리를 복용한다면 3서클도 가능하지만 이런 것은 논외로 두도록 하자.
이 세상에선 절대로 구할 수 없는 것이니 말이다.
선우는 마법진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무릎 위에 산삼을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흐으읍!”
숨을 깊게 한 번 들이쉬자 산삼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진한 향(香)이 그의 심신마저 청아하게 만드는 기분이다.
“어디 한 번 시작해볼까?”
선우는 산삼 한 뿌리를 통째로 입에 넣고 그대로 씹어 먹기 시작했다.
10분이 되지 않아 열 뿌리나 되는 산삼이 한 뿌리도 남지 않고 그의 배 속에 통째로 들어갔다.
-우우웅!!
베리우스 연공법을 운용하기 시작하자 평소와는 다르게 고밀도의 마나가 단전에서부터 느껴지기 시작했다.
‘……확실히 다른 것 같군.’
과연 산삼이다.
10억이나 쓴 효과가 있었다.
단전을 중심으로 마치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는 마나의 열기가 생각보다 뛰어났다.
‘……고리를 그리자. 두 번째 고리를 심장에 그리자.’
머릿속으로 동심원의 심상(心象)을 떠올린다.
들숨과 날숨이 교차하는 시점, 산삼의 기운이 더해지자 메마른 땅에 단비가 내리듯 마나가 쌓이고 쌓여, 겹겹이 쌓였다.
뭔가가 될 듯 말 듯 아슬아슬하다.
그러나 과욕(過慾)은 절대로 금물이다.
여기에 호흡을 멈추거나 도중에 끊어서도 안 된다.
선우는 완벽한 서클을 만들어내려고 하지 않았다.
희미해도 괜찮다.
일단 기초를 다질 뿐이다.
두 번째 고리가 만들어지는 것, 무엇보다 그것이 목표였다.
-우우우웅!!
마침내 두 번째 고리가 그의 심장에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잠시 후, 환한 광채가 번쩍이는 가운데 2서클 흑마법사가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