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화
프롤로그
“……년인가?”
매우 고풍적이지만 왠지 모르게 어둡고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곳.
검은색 로브로 전신을 가린 리치가 바닥에 무언가를 새기고 있다.
“마침내 모든 준비가 끝났다.”
돌이켜보면 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리치는 지금 무척이나 기분이 좋은 듯했다.
“어서 시작해야지.”
곧이어 리치의 입에서는 여태껏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색적인 발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법의 언어라 불리는 룬어다.
“&%……*%……##$&……@**.”
룬어가 흘러나오기 무섭게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에서 황금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리치는 마법진이 활성화되자 손가락에 끼고 있던 검은색 반지를 빼내어 마법진 중앙에 올려놓았다. 검은색 반지는 그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차원 이동 반지로 살아있는 동시에 지성을 가지고 있는 생명체와 조우하는 즉시 그가 있는 던전으로 이동시켜 주는 반지였다.
-우우웅!!
다음 순간 마법진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기괴한 소리와 함께 검은색 반지가 사라져 버렸다.
“흐흐흐! 마침내 성공했다. 어서 가서…… 이계의 존재를 내 앞으로 데리고 와라.”
이것은 대륙력 42519년,
지구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상에서 벌어진 일이다.
◈ 1화 집으로 돌아오다
“……벌써 100년이 흘렀군.”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의자에 앉아 눈을 지그시 감는다.
“돌이켜 보면 참으로 열심히 살았어.”
우연히 습득한 검은 반지로 인해 최선우의 삶이 180도로 바뀌게 되었다.
문득 그의 머릿속에 한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판타지 세계로 그를 소환시킨 장본인이자 곧 그의 스승이 된 9서클의 흑마법사가 말이다.
이계로 끌려온 선우는 흑마법사를 스승으로 모신 후, 그에게 마법을 배우는 한편 그가 주도하는 연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언젠가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선우의 노력은 결과적으로 말해 실패하고 말았다.
스승의 말에 의하면 지성을 가진 이계의 생명체를 소환한다는 목적이 있었을 뿐 특정한 좌표를 지정해 보낸 것이 아니었기에, 신이 개입하지 않는 이상 지구로의 귀환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처음엔 믿지 않았다.
포기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역시 나약한 인간, 선우의 나이가 어느덧 환갑에 이르렀을 때, 선우는 고향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리고 이곳에서의 삶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그리고 자신을 가르친 스승에게 이별을 고하였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스승님.”
“……세상으로 나가려고?”
“네, 이제라도 좀 즐기며 살고 싶네요.”
어느새 환갑의 노인이 되었지만 마나를 다루는 마법사가 된 덕에 겉모습은 중년으로 보인다.
“후후후, 그래. 그것도 좋은 생각이지.”
“……종종 연락드리겠습니다. 스승님.”
“그래, 너의 무운을 빈다.”
“감사합니다.”
선우는 자신에게 마법을 가르쳐준 스승에게 작별을 고하며 세상에 천천히 녹아들어 가기 시작했다.
선우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배척하는 흑마법사였지만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동시에 필요할 때만 조금씩 그 능력을 드러냈다.
대한민국에서 살았던 삶의 경험과 다양한 지식을 통해 자연스럽게 세상에 융합된 선우는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부와 명예 그리고 수많은 여인들을 얻게 되었다.
그렇게 수십 년이 지난, 어느 날이다.
한낮의 오수를 즐기던 선우에게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운이 찾아왔다.
그것은 마치 참을 수 없는 졸음이 쏟아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
본능이었을까?
선우의 뇌리에 문득 죽음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하지만 선우는 불안해한다거나 그 기운에 반항(?)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이곳에서의 삶이 나쁘지 않았음이다.
다만 지구에 대한 그리움과 식물인간으로 병상에 누워 있던 여동생의 존재가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주르륵!
괜히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것은 과거의 삶에 대한 회한이 서린 눈물이다.
‘……한 번만, 꿈이라도 좋다. 단 한 번이라도 가족들의 얼굴을 봤으면 좋겠다.’
이제는 기억에서조차 희미한 가족들을 떠올리며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
“……ㅅ…….”
“……ㅅ…… ㅇ…….”
“……서…… 우…… 야.”
“……?”
“선우야~”
“……??!!”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꿈에서라도 듣고 싶었던 그리운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최선우~~”
“……??!!!!”
“아들! 어서 일어나!!”
‘……꿈인가?’
그래. 이건 분명 꿈일 것이다.
눈을 뜨면 모두 사라질 꿈이 분명했다.
“야! 최선우. 지금 당장 안 일어나면 엄마 화낸다.”
-짝!
그때였다.
선우의 의식은 그의 등짝을 후려치는 강력한 고통에 완전히 깨어났다.
‘……헉?!’
선명하게 느껴지는 충격!
하지만 그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고 있다.
눈을 뜨는 순간 꿈에서 깨어날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이 잠꾸러기야, 어서 일어나라고~”
하지만 이어진 누군가의 강압적 손길에 선우는 결국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어?’
눈을 뜨자마자 환한 빛이 그의 눈을 괴롭힌다.
설마 눈을 떴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꿈속이란 말인가?
‘이, 이 빛은 대체 뭐지?’
침대에서 일어난 선우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형광등 때문이다.
새로 산 책상, 오래된 책장, 기억에서조차 희미하던 풍경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대,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마치 둔기로 머리를 한 대 두드려 맞은 것 같은 느낌이다.
-꿀꺽!
“최. 선. 우!”
고개를 돌리자 자신을 향해 팔짱을 낀 채로 한쪽 눈을 찡그리고 있는 여인이 보인다.
“……어, 어…… 엄마?!”
그의 표정은 마치 넋이 나간 것 같다.
“그래, 엄마다.”
“엄마, 맞지? 정말 엄마가 맞는 거지?”
선우의 어머니 수연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 네 엄마 맞거든. 그러니까 빨리 일어나서 밥 먹어.”
“엄마, 엄마!!!”
선우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수연을 껴안았다.
아들의 이상한 행동에 수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아들! 왜 그래?”
선우의 행동에서 뭔가 이상함을 느낀 것일까?
수연은 선우를 안아주며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무서운 꿈이라도 꾼 거야?”
“……네, 엄마.”
선우는 수연을 꼭 안은 채, 입을 열었다.
“아주 무서운 꿈을 꾼 것 같아요.”
* * *
“휴우!”
거울 속에 비친 어린아이의 모습을 보며 선우는 뜻을 알 수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집으로 돌아왔다. 그것도 무려 24년 전의 과거로…….”
선우는 자신이 지구로 돌아왔다는 사실과 함께 무려 24년 전의 과거로 돌아왔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선우가 판타지 세계에 소환된 날은 2014년 3월경이었다.
그가 정확히 기억하는 이유는 이날 전국적으로 유성 낙하 현상이 일어나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진주에서 운석으로 추정되는 별똥별 발견 -SBC]
[운석의 주인은 누구? -KBC]
[하늘에서 떨어진 로또. 최하 수천만 원에서 최대 수백억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MBS]
과거 선우는 작가를 꿈꿨던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그러나 그는 물론 그의 가족 모두의 삶을 송두리째 관통하는 불행이 연이어 닥쳐오자 결국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여동생에게 닥친 불치병 그리고 교통사고…….
부모님이 하늘로 떠나고 하나 남은 동생마저 생명 유지 장치를 통해 삶을 이어가게 되었다. 문제는 거액의 치료비였다.
“그래. 내가 죽으면 돼.”
그 역시 세상에 미련이 없었다.
자신의 생명보험금이면 적어도 여동생이 병원에서 쫓겨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선우는 스스로의 생을 마감하기 위해 부모의 묘소에 들른 후, 인적이 드문 산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발걸음을 옮기는 도중 아주 우연하게도 묘한 빛을 내는 검은색 반지를 발견한 것이다.
“반지?”
그저 아무런 생각 없이 손을 뻗어 반지를 손에 쥐었을 뿐이다.
“이, 이게 뭐지?”
의미를 알 수 없는 기하학적인 문양이 새겨진 반지다.
무언가에 홀렸음인가?
손가락에 반지를 껴는 순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한눈에 봐도 헐렁했던 반지가 그의 손가락에 맞게 줄어든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세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늘이 춤을 추고 땅이 울음을 토해내는 느낌이다.
“어, 어? 어?!!”
감당할 수 없는 현기증에 정신을 잃은 그는 검과 마법이 난무하는 판타지 세계에 소환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려 100년이란 시간을 살게 되었고 죽음을 맞이한 순간 원래의 세계로, 그것도 과거로 돌아온 것이다.
잠시 후,
그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본능적으로 그의 약지에 끼어져 있는 검은 반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이계에서 지구로 돌아온 덕인지 그토록 선명했던 검은색이 사라지고 대신 빛바랜 은색을 띠고 있다. 검은색이 사라졌지만 반지 외형에는 여전히 기하학적 문양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마치 크롬하츠 반지처럼 보였다.
선우는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빛으로 잠시 반지를 응시했다.
‘……모르겠다! 진짜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어떻게 돌아오게 된 것인지 그리고 대체 무슨 이유로 무려 24년이나 회귀해서 돌아오게 된 것인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혹시 스승님은 알고 계셨을까? 아니야. 스승님 역시 이 같은 현상을 알 리 없어…….’
발락 폰 베리우스.
마법에 대한 절대적인 호기심과 절제할 수 없는 탐구열로 인해 스스로 리치가 된 9서클의 흑마법사이자 차원 이동 반지를 만들어 선우를 판타지 세계로 불러들인 장본인이다.
선우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마법사는 본래 호기심이 가득한 자들이요, 세상의 진리를 탐구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우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궁금증을 내려놓기로 결정했다.
‘……뭐,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어차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법적 지식으론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금 그의 곁엔 꿈에서라도 보고 싶었던 가족들이 있었다.
그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 * *
“선우야.”
이때, 상념을 깨우는 아버지의 음성이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오빠~ 아빠가 밥 먹으래~~”
여동생 혜진의 앳된 목소리도 들린다.
“응? 응, 그래.”
방문을 열고 서둘러 부엌으로 향하니 아버지와 여동생 혜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기억 속에 숨 쉬고 있던 그 모습 그대로다.
미리 마음을 단단히 먹었으니 망정이지 또다시 눈물을 흘릴 뻔했다.
“아들~ 아까 엄마에게 들었는데, 너 무서운 꿈을 꿨다며?”
규용은 선우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물었다.
“네. 아빠.”
“지금은 괜찮니?”
“네, 괜찮아요.”
“그래, 남자는 그러면서 크는 거야. 아빠도 어렸을 적에 무서운 꿈 많이 꿨다.”
아버지는 짐짓 큰 소리로 말했다.
“여보~ 아무래도 우리 선우가 키가 크려는 모양이야.”
“그러게 말이에요. 호호호~”
그날 밤,
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다.
선우는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저 침대에 앉아서 가만히 창밖만 바라보고만 있었다.
‘내가 열 살이었을 때 무슨 일이 있었지?’
선우는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오래 전 기억이었지만 몇몇 굵직한 사건들이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1990년 박태우, 조영삼, 노종필이 3당 합당을 선언했지, 맞아. 여름엔 한강이 범람했고…….’
기억을 집중하자 과거의 기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1992년에는 홍영조 선수가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했고 조영삼 대통령이 취임했어!’
회귀의 영향일까?
이유를 모르겠지만 선우의 기억 속에 앞으로 다가올 24년, 그중에서도 사회적으로 크게 이슈가 되었던 일들이 마치 어제의 일처럼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선우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그와 그의 가족에게 찾아왔던 불행들 역시 아주 생생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1998년, 중소 규모의 출판사를 운영하던 아버지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1997년에 불어닥친 IMF를 잘 버텼지만 믿었던 친구의 배신으로 인해 회사가 통째로 넘어가버린다. 아버지는 절치부심하며 재기(再起)를 다짐했지만 큰아버지의 일방적인 요구에 보증을 섰다가 그나마 남아있던 집과 예금마저 모두 날아가 버렸다.
집안이 아주 제대로, 완전하게 망해 버린 것이다.
선우의 아버지 규용은 일용직 근로자가 되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되었고 작가를 꿈꿨던 선우 역시 그 꿈을 접었다.
이들을 덮친 불행은 계속 이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여동생에게 근이영양증(근육병)이라는 불치병이 찾아왔고 여동생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밤낮없이 일하던 부모님에게 사고가 일어났다.
술 처먹고 운전한 어떤 개새끼 덕분에 두 분이 한날한시에 하늘나라로 떠난 것이다.
선우는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병마와 싸우고 있는 여동생 때문이다.
하지만 하늘은 끝까지 잔혹했다.
여동생 역시 병마와의 질긴 싸움에서 승리하지 못하고 합병증으로 인한 식물인간이 되어 버린 것이다.
거액의 치료비가 들어갔다.
부모님의 죽음을 통해 받은 보상금을 여동생의 치료비로 전액 사용했지만 부족했다.
선우는 결국 극단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의 이름으로 가입된 생명보험, 선우의 뇌리엔 죽음이라는 단어가 고개를 들었다.
유서 따윈 남기지 않았다.
자살이 아닌, 사고로 죽어야 보험금이 정상적으로 처리되기 때문이다.
‘부모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산속에 들어가는 거야. 길을 잃어 동사하거나 실족사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면 문제가 없겠지.’
결심이 선 선우는 먼저 진주에 있는 부모의 묘소를 찾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운명의 이끌림을 통해 반지를 발견하게 되었고 그것을 통해 이계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문득 스승과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지, 지구라고?”
“네.”
“마법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란 말인가?”
“마술사는 있지만 제가 아는 한 마법사는 없습니다.”
“마술사?”
“네.”
“그건 뭐지?”
“어, 그건…….”
후에 선우의 스승이 된 9서클의 대마법사 발락 폰 베리우스는 차원 이동 반지로 인해 다른 차원에서 온 그의 이야기에 큰 관심을 보였다.
마나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 하지만 과학이라 불리는 연금술이 극도로 발달해하나의 거대한 문명을 이룬 세상!
발락 폰 베리우스는 현대 문명에 대해 감탄을 아까지 않았는데, 그중에서도 그가 가장 관심을 보인 분야는 바로 의학 분야였다.
혈액형, 유전자, DNA, 게놈 프로젝트 등등…….
의학을 전공하지 않은 덕에 선우는 대략적인 개념밖에 설명할 수 없었지만 9서클의 대마법사에게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던 것 같다.
선우의 말에서 뭔가 힌트를 얻은 발락은 몬스터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실험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의 권유에 제자가 되어 버린 선우 역시 발락의 연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왔다. 게다가 어린 시절의 나로 회귀했다.’
과거의 기억들이 마치 한편의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거울에 비친 그의 모습은 작은 어린아이일 뿐이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뭔가 신념이 가득한 눈빛이다.
‘……내가 바꾼다. 모조리 바꾼다.’
과거의 상념을 떨쳐버리고 그 자리에 신념을 채워 넣은 선우는 자리에서 몸을 완전히 일으켜 세웠다.
“……되겠지?”
안 될 이유가 있을까?
선우는 다가올 미래를 대비한 첫 준비로 마법을 선택했다.
“……끙차! 생각보다 쉽지 않네.”
가부좌를 틀기 위해 바닥 위에 자세를 잡았지만 어린아이의 몸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쉽지 않다. 하지만 몇 번의 노력 끝에 선우는 가부좌를 틀고 앉는 데 성공했다.
“그럼 시작해 볼까?”
선우는 머릿속으로 베리우스 마나 연공법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베리우스 마나 연공법.
베리우스 마나 연공법은 선우의 도움(?)으로 9서클의 경지에 오른 대마법사 발락 폰 베리우스가 직접 창안한 마나 연공법으로 일반적인 마나 연공법에 비해 안정성과 그 효율성이 매우 뛰어나며 마법사들의 고질적인 병폐(신체적 약함)를 개선한 획기적인 수련법이라고 알려져 있다.
마법사들은 일반적으로 근접전에 약하다.
마법사들의 마나 연공법은 육체를 강화하고 마나를 수련하는 기사들의 연공법과 그 궤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리우스 마나 연공법에는 기사들이 익히는 마나 연공법처럼 수련자의 몸과 뼈를 단단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선우가 베리우스 마나 연공법을 운용하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그의 몸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반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우웅!
외부에 존재하고 있는 무언가가 그의 내부와 공명하며 기묘한 울림을 토해낸 것이다.
‘있다. 역시 지구에도 마나가 존재하고 있었어.’
그가 살았던 판타지 세계와 비교하면 현저히 떨어지는 아니, 떨어진다는 말로도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비교도 할 수 없는 참담한 양이지만 선우는 마나의 고요한 울림을 통해 지구에도 마나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
“으…… 음……!!”
마침내 심장에 고리를 생성할 수 있는 최소한의 마나가 모였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이놈의 마나는 전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제발, 제발 좀 움직여봐!”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용을 써 봤지만 허사다.
마나는 선우의 통제에 전혀 따르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안간힘을 쓴 덕분인지 선우의 얼굴에 굵은 땀방울마저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이전까지 꿈쩍도 하지 않던 마나가 다음 순간 그의 몸을 강하게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젠장,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마나를 인위적으로 움직이려 한 반발력 때문인가?
사방에서 밀려드는 거센 압력에 선우는 자신의 몸을 제어하기는커녕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러다 혹시 죽는 것이 아닐까?
자칫하면 마나의 압력에 의해 선우의 심장이 터질지도 몰랐다.
‘아…… 안 돼. 제…… 제발…….’
-이런 멍청한 놈. 조급함은 금물이라고 몇 번이나 말했느냐!!
환청이었을까?
문득 스승의 노성(怒聲)이 뇌리에 들려온다.
“……?!!”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지만 그 덕에 정신이 번쩍 든 선우는 그가 가지고 있던 문제를 정확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그래. 조급함이 문제였어. 이곳은 저쪽 세상이 아닌 지구야. 조급함을 버려야 해. 차근차근, 하나씩하나씩이야!’
선우는 스승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조급함을 버렸다.
-어이, 친구. 겁내지 마. 그냥 한 걸음만 다가갈게.
-진심이야. 난 단지 너와 좋은 친구가 되고 싶을 뿐이야.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조급함을 내려놓자 선우의 몸을 단단하게 조여 왔던 거센 압력이 어쩐지 조금은 느슨해지는 느낌이다.
-나와 함께 놀지 않을래?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기다릴게.
-……그래,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세상을 점령했던 어둠이 물러나고 어느새 아침이 밝아올 무렵…….
마침내 마나가 깊은 울음을 토해냈다.
조급함을 내려놓은 선우를 비로소 친구로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이다.
-내 손을 잡아줘서 고마워.
그 순간,
선우는 몸 전체에 퍼진 마나를 그의 심장 주위로 인도하기 시작했다.
-우우웅!!
따뜻한 기운이 선우의 심장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마나의 양은 물론 이동 속도 역시 저쪽 세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느렸지만 말이다.
‘……대단할 정도로 느린 속도네.’
하지만 움직인다는 것이 어딘가?!!
이전까지 꿈쩍하지 않던 마나가 선우의 의지에 따라 분명히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했다.
차 한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마나의 기운이 그의 심장 부근까지 올라왔다.
선우는 마침내 때가 찾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긴장감과 함께 묘한 흥분이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하지만 방심은 절대 금물이다.
‘……지금이다.’
선우는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는 동시에 마나를 심장으로 인도했다.
-번쩍!
환한 광채(光彩)가 번쩍이는 순간,
한 개의 서클이 생성되며 그의 심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그리고 이날, 이 땅에 유일무이(唯一無二)한 마법사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것도 1서클의 흑마법사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