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 < 신화를 이룩하다(1) >
다급해 보이는 양 팀장의 목소리가 우현의 가슴을 울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미안합니다. 양 팀장님한테는 드릴 말이 없네요. 영화도 LC에서 3년간 독점으로 촬영 지원하기로 협약 맺었습니다."
촬영 지원이라고 했지만 그게 PPL 한다는 말이다.
"아... 이건 너무한데요? 지금껏 우리와 잘 해오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잘 해왔죠. 하지만 통보팀에서 칼같이 거절했다는 거 아시죠? 그런 상황에서 제가 삼전만 붙들고 있겠다고 팀장님께 연락드릴 수 있겠습니까? 괜히 팀장님한테 부담을 지우는 것일 수도 있구요."
"부담이라니요. 그런 건 전혀 부담이 아닌데..."
"제 입장에서는 팀장님께서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니까요. 어쨌든 죄송하지만 이미 계약서에 도장까지 찍은 마당이라 이제와서 뒤집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후... 알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다시 연락하죠."
사실 이 문제로 다른 곳도 아닌 삼전투신의 양재호 팀장이 전화할 것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아무리 그룹 내부의 일이라고는 해도 엄연히 업무의 경계가 있는 법인데 그걸 뛰어넘고 전혀 생뚱맞은 곳에서 항의 전화를 하리라고는 말이다.
또한 양 팀장 입으로 홍보팀 팀장 조인트가 까였다는 말을 하기는 했어도 진짜 그렇게 됐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요즘 우현이 '미다스의 손'이라고 불린다지만 '푸른 별'로 인해 그 이름도 많이 퇴색되었고 그룹 홍보에 있어 PPL은 곁가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아마 양 팀장이 기사를 보고 홍보팀에 문의해 상황을 알고는 혼자 흥분해서 부랴부랴 전화했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생각한다.
양 팀장은 파인프로덕션이 앞으로 전 세계적으로 승승장구 하리라 생각하는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
확실히 며칠 지나자 PPL 때문에 들렸던 잡음은 언제 그랬냐는 듯 쑥 들어가 버렸다.
"이지성? 흐음... 괜찮네."
편성을 확정 받은 송유리 작가의 '이 웬수 같은 놈들'(이 제목으로 결정되었다)의 여주인공으로 파인엔터에 새로 들어온 전직 아이돌인 정인주로 결정되었다.
이미 보도자료로 KBC 편성 확정과 '핫칙스'의 전 멤버인 하늘이 정인주라는 이름으로 캐스팅 확정 되었다고 기사가 나갔다.
송유리 작가는 남자 주인공으로 공우를 원했지만 너무 한쪽으로 쏠리는 캐스팅이라고 판단한 우현이 지 피디에게 다른 남주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었다.
그렇게 해서 지 피디가 찾아온 게 유부남 배우인 이지성.
깔끔하고 지적인 마스크에다가 매너 좋고 자상하기로 유명해서 어느 여자를 막론하고 그 친구를 싫어하는 이가 별로 없을 정도다.
"괜찮죠? 송 작가도 이지성 정도면 괜찮다고 하더라구요. 연기력 탁월해서 가벼운 분위기나 무거운 분위기, 달달한 장면 등등 다 만능으로 해내잖아요? 요즘에는 결혼한 건 아무 흠도 안되고 오히려 걸그룹 출신이라 본래 가지고 있는 팬을 생각하면 상대배우가 유부남인 게 팬들을 더 안심시킬 거예요."
"그렇지. 나이 차이가 나긴 하지만 팬들 입장에서는 그래서 더 안심할거야. 게다가 이지성 그 친구가 여배우를 잘 띄워주거든. 잘 골랐네."
"하핫! 그렇죠?"
"그럼 언제 촬영 들어가?"
"스탭들은 다 꾸렸으니까 조연들 캐스팅 완료하고 세트장 몇개 완공되면 바로 들어갈 것 같아요. 아마... 7월 중순 정도?"
편성이 9월 말이니 최소 첫 방 전까지는 절반 이상 찍어놓을 수 있을 거다.
게다가 대본이 다 나온 작품이라 촬영 중간에 쪽대본 받을 일 없기에 현장 돌아가는 것도 문제없을 거다.
"그래, 준비 잘 해서 촬영 지장 없도록 하라고. 이지성 캐스팅 계약은 굳이 내가 나갈 필요 없지?"
이제는 드라마 주연 캐스팅에 일일이 자리를 해야 할 만큼 회사의 규모가 영세하지 않다.
랜디 오 감독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의 캐스팅을 할 때도 톱스타들을 캐스팅 하면서 우현이 그 자리에 함께한 건 중국배우가 유일했다.
"그럼요. 제가 알아서 처리할게요."
"오케이, 그럼 난 나간다."
우현이 또 은하와의 결혼을 준비하기 위해 나가는 걸 아는지 피디는 부러운 눈으로 한탄했다.
"후아... 부럽다."
"부러우면 지 피디도 얼른 결혼하셔."
회사 사람들에게는 결혼준비라고 했지만,사실 오늘은 살림을 장만한다거나 스튜디오 촬영 같은 일정이 있었던 건 아니다.
은하 부모님으로부터 결혼 승낙을 어렵게 받긴 했지만 그 후 은하 어머님이 은하 몰래 결혼식장에 혼주자리를 비워둘 거냐고 전화로 물어온 적이 있었다.
그 순간 자신을 왜 반대했는지 알 수 있었다.
천애고아나 다름없는데 어느 부모가 좋아할 수 있겠는가?
손에 한가득 과일 바구니를 들고 나타난 우현을 은하가 눈을 흘기며 반겼다.
혼자 사는 집이 아니라 어머니와 동생들이 사는 집에 가는 날이니만큼 검은색 블라우스에 청바지를 입은 편한 복장이었다.
"과일 많다니까, 뭘 그렇게 사 들고 왔어?"
"그래도 어떻게 빈손으로 가냐? 어머니는?"
"오빠 온다고 요리하는 중이시지. 어찌나 혼자 투덜거리는지... 내가 듣기 싫어서 나와 있었잖아."
그녀의 어머니는 은하의 불도저 같은 추진력과 우현의 끈질긴 설득에 결국 승복하고 말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못내 아쉬운 모양이었다.
"당연히 그렇겠지. 들어가자."
은하의 가족들이 사는 집은 강남의 고급 아파트인데 이 집은 우현이 구해준 집이기도 했다.
은하가 떠서 스타가 된 이후 가장 먼저 샀던 게 바로 가족이 살 집이었고 그 때 바빴던 은하 대신 부동산 업자와 함께 집을 보러 다녔었다.
"안녕하십니까, 어머님!"
씩씩하게 인사하고 들어가니 불고기를 하는지 양념이 묻은 젓가락을 그대로 들고 있던 은하 어머니가 웃는 것도 아니고 화난 것도 아닌 애매한 얼굴로 소파를 가리켰다.
"왔어요? 저기 앉아요."
"아유 말 놓으시라니까요. 킁... 킁... 와! 냄새가 아주 끝내주는데요?"
그녀는 일부러 시큰둥한 표정을 짓다가 우현의 손에 들린 과일을 보곤 또 투덜거렸다.
"그런가? 뭐, 불고기가 다 그렇지... 과일이네? 집에 과일 많은데... 요즘도 처가 올 때 과일 사가지고 오나? 옆집 아줌마 사위는 올 때마다 한우를 가득가득 사 와가지고는 냉장고가 부족하다고 어찌나 자랑을 하던지..."
이제는 익숙해진 은하 어머니의 투정에 은하가 끼어들어 버럭 소리 질렀다.
"엄마는 소고기 안 먹잖아! 오늘 불고기도 오빠 온다고 사 왔으면서? 자꾸 이럴 거야!"
"이러긴 뭘 이러니?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리고 나는 안 먹지만 정현이는 없어서 못 먹는다, 얘!"
"됐어! 오빠! 나와서 과일 안 받아?"
평소에도 은하가 오빠를 얼마나 휘어잡고 사는지 여실히 알수 있는 게,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어색한 분위기와 어머니의 투정 때문에 눈치만 보던 오빠가 성큼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은하의 오빠는 유정현으로 군대 전역 후 학교를 졸업하고 장사를 하려고 하다 친구에게 속아 거액을 날려먹었던 전력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은하에게는 절대적 충성(?)을 바치는 인물인데, 이번 은하 어머니를 설득하는데에도 단단히 한 몫 했다고 한다.
아직 이십대 후반이니 나이로 보면 우현에 비해 한참 동생이다.
이번에 마지막으로 커피숍을 차려줬는데 나름 열심히 하는지 매출이 점점 오르고 있고 커피맛도 꽤나 괜찮다고 했다.
"하하, 반가워. 요즘 커피숍 잘 나간다며? 고생하네. 언제 술 한 잔 하자고, 하하하!"
은하의 오빠나 우현이나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지만 서슬 퍼렇게 눈을 뜨고 지켜보는 은하 때문에 각자 최선을 다해 친한척했다.
"아빠! 뭐해!"
"어, 그래. 김 서방 왔구만. 잘 왔네."
안방에서 어슬렁거리며 걸어 나오는 이는 은하의 아버지다.
은하의 어머니는 결혼 준비하며 처음 뵀지만 은하의 아버지는 매니저일을 하면서 몇 번 뵌 적이 있었다.
"우리 아빠, 전에 본 적 있지?"
"그럼. 안녕하십니까!"
우현의 빠릿한 인사에 은하의 아버지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지만 이어진 은하의 말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사업 망하고 집에서 계속 쉬고 계셔. 아무 걱정이 없으시지."
"크흠... 흠... 그래 잘 먹고 가게."
은하의 아버지가 슬쩍 다시 안방으로 들어가 버리자 소파에 앉아 은하의 오빠와 커피숍 운영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곧이어 은하의 어머니가 식사가 준비됐음을 알렸다.
"밥 다 됐으니까 와서 앉아요. 너희들도 와서 앉아라, 밥 먹자. 여보! 나와서 식사 하세요!"
"이야... 진수성찬인데요?"
말로는 마음에 안 든다고는 해도 사위가 온다고 하니 커다란 식탁에 자리가 부족할 정도로 차린 게 많았다.
불고기, 닭도리탕, 잡채, 전 등등...
"내가 처음으로 밥 차려 주죠? 입맛에 맞을지는 모르겠네."
그녀의 말처럼 은하의 어머니를 뵈러 올 때마다 물 한 모금 못 먹고 쫓겨나오듯 집을 나와야 했다.
은하 어머니가 우현을 쫓아낸 것은 아니지만 앉아 있기 힘들 만큼 서늘했던 분위기 탓이다.
결혼을 승낙하고 나서도 몇 번 찾아갔지만 그 때는 다 같이 외식을 했기에 은하 어머니로부터 음식을 대접받는 건 처음이었다.
"하하, 잘 맞을 겁니다. 제가 은하랑 입맛이 똑같거든요."
"그럼 안 맞겠네? 쟤는 내 음식 별로 안 좋아하거든."
은하의 성격이 왜 그런 가 했는데 이제 보니 딱 엄마를 빼닮은 게 틀림없다.
"엄마가 해준 건 너무 짜고 달단 말이야. 그거 먹고 체중관리가 되겠어?"
"너 연예인 하기 전에도 엄마가 해준 건 잘 안 먹었던 거 알거든?"
"엄마 요리 배우기 전에는 솔직히 맛 없었잖아. 참, 내가 생각해도 엄마 요리학원 보낸 건 신의 한 수였던 것 같아."
"먹기 싫으면 네 신랑은 왜 데리고 왔니?"
"오빠는 엄마가 해준 거 좋아할 거야. 바깥음식만 먹고 살아온 사람이라 엄마 간에 익숙할 거거든. 먹어봐,우리 엄마 요리 좀 하거든."
"어휴... 내가 저걸 왜 낳아가지고 이 고생인지..."
"그러니까 이렇게 호강하고 살지, 안 그래?"
은하는 앞에 놓인 진수성찬을 보고 마음에 드는지 흡족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어머니가 하는 말에 따박따박 말대꾸를 했다.
아마 평소에도 둘이 붙어 있으면 집안이 볼 만할 거다.
"크흠... 잘 먹겠습니다. 우와... 어머님, 정말 맛있는데요?"
빈말이 아니라 정말 맛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슴 한 곳이 먹먹해져 왔다.
"그래요, 많이 먹어요."
완전히 좋아할 수는 없고 불만이 담긴 목소리였지만 많이 먹으라는 말에 그만 눈에 눈물이 고이고 말았다.
은하는 우현이 잘 먹다가 수저를 멈추고 밥을 향해 얼굴을 떨구고 있자 잡재를 뒤적이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여 우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 오빠, 왜 그래?"
눈이 벌게져서 눈물을 억지로 참는 모습에 은하가 놀라 소리쳤고 은하 어머니는 놀라 '아니... 왜 그런데...'만 반복했다.
"아... 아니야. 그냥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음식이 맛있는데 왜 울어? 엄마 때문에 그래? 알았어. 이제 우리집 오지 말자,알았지?"
화가 난 은하가 우현의 팔꿈치를 잡고 일어나려는데 우현이 그녀를 잡아 다시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이렇게 따뜻한 밥을 먹은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요. 너무 맛있습니다, 진짜루요."
그제야 우현이 왜 울었는지 알게 된 은하는 눈물이 핑 도는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은하 어머니는 묵묵히 우현 앞에 물을 떠다 주고는 우현이 밥을 다 먹기까지 기다렸다.
은하의 오빠는 예상지 못한 전개에 후다닥 밥을 먹고 일어섰고 우현과 은하는 같이 눈물을 닦으며 천천히 밥을 먹었다.
그 모습을 어색하게 바라보던 은하 아버지는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향했다.
은하 어머니는 이들이 밥 먹는 걸 잠시 지켜보고는 우현이 가지고 온 과일 바구니에서 사과를 꺼내 조용히 깎았다.
그리고 식사를 마치자 깎은 사과를 우현의 앞에 내밀었다.
"사과 좋은 걸 사왔네?"
처음으로 말을 놓는 은하 어머니다.
"아,네. 비싼 걸로 사왔습니다."
"우리 딸애가 어렸을 때 그렇게 사과를 좋아했어. 밥은 안 먹고 어찌나 과일만 먹던지... 그렇게 내 속을 뒤집었는데... 막상간다고 하니까 많이 속상해."
"그럼요. 이해합니다."
"잘 해줄 거지?"
은하는 다시 한 번 눈물을 흘렸고 우현은 눈이 벌게진 채 주먹을 굳게 쥐고 말했다.
"평생 죽을 때까지 은하만 바라보고 살겠습니다."
199. < 신화를 이룩하다(1)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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