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 < 세상에 공짜는 없다(5) >
보통 잘 나가는 드라마에는 PPL 요청이 엄청나게 들어온다.
단순히 상표를 표시한 걸 보여주는 것에서부터 이 상품에 대한 언급을 하느냐에 따라 제작사에 들어오는 돈은 천차만별이다.
제작사 입장에서 시청률이 10%내외를 기대하는 드라마를 만들 때는 들어오는 PPL을 다 받으면서(물론 작중 분위기를 고려 한다) 작가와 협의해 촬영을 진행하게 된다.
반면에 예를 들어 로코 3대 작가가 손을 대는, 시청률 20%를 넘길 거라 기대하는 대박작품에는 들어오는 모든 PPL을 다 받을 수 없다.
그렇게 되면 드라마가 아니라 60분짜리 광고가 되기 때문이다.
결국 PPL을 선별할 수밖에 없는데 장르 드라마나 사극 같은 경우는 컨셉에 맞는 PPL을 하겠지만 일반적인 로맨스 드라마는 돈을 많이 주는 PPL을 선택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대박이 될 거라 예상되는 작품의 PPL은 대기업이 독점하게 되는 구조라는 거다.
돈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현재 파인프로덕션에는 대기업들의 신제품과 주력 상품이 하루가 멀다하고 배달되고 있었다.
건물에 시스템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는데도 따로 무풍에어컨을 느껴보라며 전 사무실에 에어컨을 새로 설치 해준 건 대표적인 사례다.
사무실 곳곳에 놓인 십여 개에 달하는 공기청정기는 삼전, LC 두 군데에서 경쟁하듯 보내준 것이고 탕비실에 설치된 냉장고는 삼전에서 보내준 최신냉장고다.
냉장고와 대화하는 그 제품 말이다.
복사기와 A4 용지 역시 회사 비용으로 처리된 게 아니고 심지어 직원들 의자 역시 의자로 유명한 한 기업에서 싹 다 바꿔준 것이다.
물론 이것들 대부분은 이미 윤해연 작가와 이주희 작가가 쓴 작품에서 등장했던 것들이다.
지 피디와 전화를 끊고 은하와의 쇼핑으로 저녁 늦게까지 혹사(?)당하고 난 뒤 다음 날 출근했을 때,
지 피디는 상당히 난감한 얼굴로 우현을 대했다.
"대표님, 생각보다 강하게 나오는데요? 삼전측에서 이렇게 나오면 앞으로 파인프로덕션에서 제작하는 모든 작품에 PPL을 하지 않겠다고 해요."
"오... 쎄게 나오는데?"
우현이 별반 긴장하는 것 같지 않자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괜찮으시겠어요? 삼전그룹 전체 협찬 물품이면 아주 상당한 양인데요. 노트북 같은 전자제품은 물론이고 냉장고, 세탁기 같은 생활가전과 최고모직의 의류도 안 들어올 거예요. 게다가 나중에 의학드라마라도 찍게 되면 삼전병원도 협조를 안 해줄것이고 언론에서도 비협조적으로..."
"됐어,쓸데없는 걱정은... 고작 PPL 까였다고 언론까지 움직이지 않아. 소설을 너무 많이 봤어. 설사 언론에서 씹는다고 해도 대승적으로 단막극을 활성화하기 위해 지원을 요청했는데 일방적으로 거부했다고 하면 걔들만 개쪽 팔리는 거지."
"그럼 이제 어떡하죠?"
"LC쪽 담당자한테 연락 왔어?"
"그쪽은 아직... 고민하는 것 같아요."
"그럼 나한테 연결해줘. 내가 직접 얘기해볼게."
"알겠습니다."
잠시 후 지 피디는 연락처 하나를 우현에게 건넸다.
LC그룹 통보팀 연락처라고 했다.
우현은 번호를 받자마자 고민도 없이 바로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저 파인엔터 김우현이라고 하는데요. 팀장님 연결 부탁합니다"
"잠시만 기다리시겠습니까?"
대략 10초정도 흐른 후 중후한 목소리의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전화바꿨습니다."
"아, 반갑습니다. 저 파인엔터 김우현이라고 합니다."
"아이고 안녕하세요. 진해명이라고 합니다."
"언제 한 번 자리 마련해야 하는데 바빠서 그럴 시간이 없었네요."
"자리는 저희가 마련해야죠. 늦었지만 유은하 씨와 결론 축하드립니다. 지금쯤 결론 준비로 한창 바쁘실 텐데 어떻게 연락을 다 주셨나요?"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한다.
"우리 지여울 피디에게 들으셨겠지만 저희가 이번에 KBC와 손을 잡고 단막극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단막극이다 보니까 제작비 지원이 넉넉하지 못해서요."
"으음... 그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좋은 일에 쓰이는 PPL이니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단막극이다 보니까 시청률을 신경쓰지 않을 수 없네요. 한정된 금액으로 집행하는 것이다 보니까 저희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렇게 나올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군요. 사실 삼전 측에다가 이런 이야기를 전하니까 그 쪽에서 아예 우리쪽에 PPL을 넣지 않겠다고 협박을 하더라구요?"
"네? 아... 그러셨군요."
그의 머리 돌아가는 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것 같았다.
같이 동조해서 파인엔터를 무릎 꿇릴 것인가? 아니면 그걸 기회로 삼을 것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 드리죠. LC에서 우리 단막극에 PPL을 넣어주시면 앞으로 경쟁사 제품 대신에 오로지 LC 것만 PPL로 넣어드리겠습니다."
"그게 정말이십니까? 파인프로덕션에서 제작하는 모든 드라마에 적용되는 것이라는 거죠?"
그의 음성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파인프로덕션에서 제작하는 모든 드라마와 영화, 그 외 모든 컨텐츠에 앞으로 삼전그룹 제품이 협찬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일단 회의 후에 다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되도록 빨리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지여울 피디는 옆에서 우현이 전화를 끊는 걸 보고 달려들듯이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그렇게 하겠대요?"
"생각해보겠다네?"
"그럼 안 될 수도 있는 거예요?"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럼 어떡해요?"
"그 때가서 생각하자. 뭘 벌써부터 걱정해?"
사실 LC까지 거부하면 그냥 중소기업 제품만 PPL을 받을 생각이었다.
만드는 작품마다 흥행을 자신할 수 있기에 할 수 있는 방법인데, 사실 중소기업 제품만 PPL을 받아도 드라마를 만드는 데 큰 문제는 없다.
단지 제작비가 조금 더 들어간다는 정도?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우현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온 진해명 팀장은 다시 한 번 우현의 조건을 확인했다.
"KBC에서 방영하는 단막극에 LC전자 제품으로 PPL을 지원하면 앞으로 파인프로덕션에서 만드는 모든 영화,드라마에 삼전그룹을 제외하고 우리 것만 넣어주신다는 거 맞는 거죠?"
"맞습니다. 어차피 PPL 계약 들어갈 때 그 부분 삽입해서 계약서 쓸 건데요. 소속 변호사 대동해서 체크하세요."
"그럼 저희가 단독으로 협찬 지원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실무진 보내세요. 계약서는 우리가 만들어놀고 있겠습니다. 와서 확인하시구요."
"그럼 내일 오전에 방문해서 계약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세요.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자 지 피디가 양 손을 번쩍 들고 환호성을 질렀다.
"꺄야악! 대박! 이렇게 될 줄 아셨어요? 진짜 대표님하고 같이 일하면서 안 되는 일이 없는 것 같아요!"
"나도 저 쪽에서 이렇게까지 시원하게 지를 줄은 몰랐네. 어쨌든 잘 됐지. 제작비 걱정 없이 단막극 만들 수 있으니까 이제 지 피디는 돈 걱정하지 말고 신인들 좀 구해 봐. 장차 미래에 우리 돈줄이 될 사람들 말이야."
"그럼요! 딱 한 달만 주시라니까요? 아, 저는 이 좋은 소식을 아랫집에 알려주고 오겠습니다."
파인엔터는 바로 보도자료를 내고 KBC가 단막극을 다시 방영하려고 하며 제작은 자체제작이 아닌 파인프로덕션에 일괄 외주를 주기로 했다고 전했다.
또한 열정과 재능이 충만한 신인 작가와 피디를 구하고 있다는 내용도 포함했다.
이 기사는 네티즌들에게 그리 많은 조회수를 기록하지는 않았다.
일반 시청자들은 단막극에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 기사로 인해 회사로 문의를 해오거나 직접 찾아오는 작가와 피디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전에 공모전을 했었지만 그 중 한, 두 명에게만 기회가 돌아갔던 것에 반해 이번에는 지속적인 데뷔 기회가 제공되는 것이기에 파급효과가 더 컸다.
LC그룹 홍보팀과 제작지원 계약을 맺고 난 이후 LC에서는 따로 홍보기사를 만들어 내보냈다.
LC그룹과 파인프로덕션이 하나가 돼 단막극을 제작하며 국내 콘텐츠시장을 키워간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그 이면에 파인프로덕션에서 만드는 영화, 드라마에 전적으로 LC그룹 물건만을 협찬하게 됐다는 내용은 기사에 포함되지 않았다.
우현으로서는 그 기사를 보고 별 생각 없이 지나갔는데 다른이들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그 기사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이름이 우현의 핸드폰에 찍혔던 것이다.
"양 팀장이 웬일이세요?"
삼전투신운용의 양재호 팀장은 '푸른 별'의 흥행실패로 인해 오히려 회사로부터 리스크 관리에 성공했다며 인사고과에 상당히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알려왔다.
백억이 털릴 수 있었던 걸 20억에 막았기 때문이다.
이후 룸싸롱에서 거하게 대접하고 싶다고 알려왔지만 그런 술집은 부담스럽다고 와인바에서 술을 얻어먹었던 적이 있었다.
"대표님, 그게... 오늘 기사를 보니 LC그룹이랑 단막극을 만들기로 했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맞아요. 방송사에서 제작비를 지원해주지 않아서 골치였는데 LC쪽에서 지원해준다고 하니 마음을 놨습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지 뭐예요."
"하아... 대표님, 이러면 곤란합니다. 지금 우리쪽 홍보팀 뒤집어졌어요. 이번 단막극에 PPL 안 하면 앞으로 파인프로덕션에서 제작하는 드라마에 PPL 못 한다고 엄포를 놀으셨다면서요?"
삼전투신운용 소속이라 양 팀장에게 부탁하지 않았던 건데 이게 또 연결되나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양 팀장에게 곤란하다는 말을 들을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랬죠. 시청률 잘 나오는 것만 협찬하고 조금 떨어진다고 광고 빼는 것도 웃기지 않습니까? 그럴 거면 신문광고에 광고는 왜 꾸준히 실어요? 광고효과 별로 없는 거 아는데..."
우현의 말이 정곡을 찔렀는지 그의 어조가 조금 더 낮아졌다.
"대표님, 우리 홍보팀에서 잘 못 대응했던 건 맞는 것 같습니다. 대표님에게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상의했으면 했다는 거죠. 엄밀히 말하면 우리 삼전투신운용이 파인엔터의 주주 아닙니까?"
"그렇긴 하죠. 하지만 아무리 주주라고 해도 회사 경영에 대해 이렇게 일일이 간섭하려고 하시면 제가 더 당황스럽네요."
"아닙니다. 간섭하려는 게 아니라 도움을 드리려는 뜻이죠. 그렇게 힘드셨다면 저에게 말씀해주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랬으면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었는데..."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상호간의 거래가 아니라 일방적인 도움을 받다보면 언젠가는 거절할 수 없는 부탁을 받게 되는 법이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이미 LC그룹과 계약이 끝난 일이라 더 할 말이 없는데요?"
전화를 끊으려 하는데 양 팀장이 다시 불렀다.
"대표님!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떻습니까? 저희도 단막극 제작에 힘을 보태겠습니다. 홍보팀 팀장이 아직 뭘 몰라서 그랬던 거예요. 지금 위에서 조인트 까이고 난리 났습니다. 저희도 PPL 참여할 테니까 드라마에 협찬할 수 있게 해주시는 게 어떠세요?"
당연하게도 LC그룹에서 낸 보도자료에는 경쟁사인 삼전그룹에서 만든 제품은 협찬할 수 없다는 조항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 양 팀장도 한 다리 얹겠다고 나왔지만 이미 떠나버린 버스다.
"흐음... 죄송하지만 이번 LC그룹과 맺은 계약은 그래요. LC 그룹에서 만든 제품의 경쟁사 제품은 협찬할 수 없다는 조항이 있거든요."
"네? 그거야 항상 넣는 계약 아닙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단편 하나 하나당 들어가는 게 아니라 단막극 전체에 삼전그룹 제품은 협찬할 수 없도록 했다구요. 이제 삼전그룹에서 만든 제품은 파인프로덕션에서 만든 컨텐츠에 협찬할 수 없습니다. 대신 LC그룹에서 제작에 필요한 PPL을 전적으로 부담한다고 했어요, 3년 간요."
"어... 어... 대표님 이건... 그, 그럼 영화! 영화에는 가능하겠죠? 영화는 가능해야 합니다!"
198. < 세상에 공짜는 없다(5)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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