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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 이것도 운명이다(5) >
“그럼요. 뭐가 됐든 다 감당할 수 있으니까 얼른 말이나 해주세요.”
윤 작가는 나지막하게 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후... 내가 볼 때, 고것이 불안해하는 것 같아.”
자칫 주변에서 들을 수도 있기 때문에 윤 작가나 우현은 은하의 이름을 꺼내지 않았다.
“불안해한다구요? 어떤 게 불안하다는 거예요?”
“회사가 작을 때는 고것이 자기를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했나봐. 그런데 자기가 걔 도움 없이도 회사를 크게 키우기 시작하니까 불안해진 거야.”
“하... 이것 참... 그게 불안해할 게 되나요?”
어이가 없어 허탈하게 웃었지만 윤 작가는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만해. 자기도 알다시피 고것이 아빠한테 받은 상처가 커. 어려서부터 가장 노릇하면서 사회생활 하느라 강한 척하지만 그건 상대에게 상처받지 않기 위해 날을 세운 고양이 같은 거야.”
“그건 저도 알지만...”
“며칠 전에 고것이 술을 마시다가 그런 말을 했어. 자기가 이대로 계속 커서 훌쩍 날아가 버릴 것 같다고 말이야.”
이런 얘기는 보통 남자가 여자를 보면서 하지 않나? 황당했지만 어쩌면 우현은 너무 자기 입장만 생각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회사에는 꽃같이 아름다운 여자들 천지이니 그녀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런 생각이 들 법했다.
“아... 제 생각이 짧았네요. 잘 알았습니다. 고마워요.”
그렇게 일어서려는데 윤 작가가 한 마디를 더 보탰다.
“난 자기가 잘 하리라고 믿어. 지금은 예전처럼 여배우가 열애설 한 번에 매장당하는 세상이 아니잖아? 결혼한 여배우들도 아무렇지 않게 미니 여주로 나와서 상대배우랑 키스하는 장면을 찍어도 어느 기자도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하지 않는 세상이야.”
이렇게 말하는 윤 작가의 마음을 알기에 웃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알죠, 당연히 알죠. 그냥... 회사 대표가 그래도 되는지 그게 마음에 걸렸는데, 작가님 덕분에 그런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할까 봐요.”
윤 작가와 헤어지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많은 생각을 했다. 언제고 이런 일이 생길 거라는 막연한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게 이렇게 현실로 다가오니 설레기도 하고 부담되기도 했으며 걱정스럽기도 했다.
사무실에 거의 다 와가던 우현은 바로 방향을 바꿔 갤러리스 백화점으로 향했다. 그리고 명품관에 위치한 티파니 앤 쏘 매장으로 들어가 반지를 둘러보니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직원이 다가와 물었다.
“결혼예물을 보시나요? 아니면 프로포즈 반지?”
“예? 그게 다른가요? 어쨌든 그렇게 거창하게...”
손을 내젓는데 직원은 살포시 미소 짓더니 우현의 말을 받았다.
“그럼 프로포즈하기 무난한 결혼반지를 추천해드릴까요? 이것보다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물건을 없을 겁니다.”
커플링을 생각하고 있었기에 너무 부담스러운 건 싫었지만 직원의 호언장담에 궁금증이 일었다.
“아, 네. 그렇게 해주세요.”
그녀는 하얀 장갑을 낀 채 반지 하나를 꺼내놓았다. 은빛 테두리에 촘촘히 박혀있는 작은 다이아와 정중앙에 박힌 큰 다이아몬드. 반지에 대해 잘 모르는 우현이 보기에도 너무 아름다워 단박에 마음을 뺏길 정도였다.
“올해 새로 나온 라인입니다. 너무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고급스러움을 유지하고 있어요. 아름답고 고귀함을 잃지 않는 티파니의 다이아가 박힌 이 반지는 상대방을 더욱 빛나게 해줄 물건입니다.”
결혼반지고 뭐고 이걸 보니 다른 걸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얼마죠?”
“9백8십만 원입니다.”
반지 하나에 천만 원이라니... 하지만 예전의 찌질한 우현이 아니었다. 게다가 다른 누구도 아니고 은하에게 주는 반지인데 이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는가?
“이걸로 하죠.”
“사이즈 말씀해주시면 나흘 안에 준비될 텐데 괜찮으실까요?”
그녀는 이 정도 물건을 파는 건 예사로운 일인지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담담하게 물었다.
반지를 주문하고 오는 내내 가슴이 떨렸다. 어떻게 주어야 할지, 이걸 은하가 받을 때 무슨 생각을 할지,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사무실로 돌아와 은하에게 나흘 뒤 저녁에 시간 되냐고 물어보니 하필 그 날 이태원에서 밤늦게까지 화보촬영과 뒤풀이가 있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그 다음 날 저녁으로 약속을 잡았는데 약속을 잡고 나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결국 무슨 정신으로 일을 마쳤는지 모르게 하루 종일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보냈다.
5일 뒤 결전의 당일, 오전 업무 대신 파인엔터와 계약된 한미홍뷰티페이스로 향했다.
“어머, 자기가 여기 웬일이야?”
미용실의 원장인 그녀는 갑자기 찾아온 우현을 보고 어리둥절해 했다. 이제 중견급 이상으로 성장한 파인엔터의 대표가 갑자기 미용실을 방문했으니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인 것 같았다.
“별건 아니고... 누님, 저 머리 좀 해주세요.”
“누구? 자기? 푸핫! 자기 오늘 무슨 선 봐?”
그녀는 입을 가리며 깔깔 웃더니 심각한 얼굴을 한 우현의 손을 잡고 VIP실로 이끌었다.
“선은 아니고... 어쨌든 저 오늘 잘 좀 꾸며주세요. 돈은 따로 드릴게.”
“돈은 됐고, 뭔데? 무슨 일인데 그래?”
“크흠... 뭐, 여자일 말고 남자가 꾸밀 일이 있겠어요?”
“상대가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이야?”
“아니에요. 무슨 그런 말씀을...”
저 서늘한 눈빛을 마주하면 진실을 토해낼까 두려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우현에게 뭔가 꿍꿍이속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묘한 눈웃음을 지었지만 더는 캐묻지 않았다.
이럴 줄 알고 그냥 동네 미용실을 갈까 했지만 중요한 날인데 망치고 싶지 않아 가장 믿을 수 있는 미용실으로 왔다. 물론 이 미용실처럼 연예인들이 다니는 타 고급미용실을 갈 수 있었지만 괜히 회사 미용실을 바꾸는 게 아닌지 업계 사람들 사이에 말이 돌까봐 이곳으로 온 거다.
“어떻게 해줘?”
“잘 모르겠어요. 그냥 누님이 생각할 때 가장 괜찮은 머리로 해주세요.”
“도대체 상대가 누구길래 김 대표가 이렇게 긴장하지?”
“크흠... 말해도 모르실거예요.”
“정말 그럴까? 김 대표가 이렇게 긴장할 여자라면... 여배우 하나가 떠오르네? 나중에 기사보고 아는 거 아니야? 호~되게 뒤통수 맞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정말 이 바닥에 있는 인간들은 전부 귀신들이 분명하다.
“글쎄, 아니라니까 그러네... 크흠, 나 늦었으니까 얼른 해줘요.”
“으흥... 알았어. 보채지 마.”
그녀는 어린아이 다루듯 우현을 달래고는 우현의 머리를 가지고 현란한 가위질을 시작했다. 30분쯤 지났을까? 그녀는 보조스탭을 향해 손가락을 딱 쳤다.
“여기 이 오빠 샴푸해드려. 마무리는 내가 할 테니까 드라이만 하고.”
“저 아직도 오빠인 건가요?”
“좋아하기는... 원래 이 자리에 앉으면 50대 아저씨도 오빠라고 해.”
괜히 물어본 것 같다. 그냥 예의상 그렇다고 해주지...
“어째 괜히 온 것 같아.”
“후훗! 그래도 나만큼 머리해주는 데가 어딨어?”
확실히 샴푸와 드라이를 끝낸 후 원장인 그녀가 머리를 만져주니 사람이 달라진 것 같다.
“기다려 봐, 조금 더 봐줄게.”
그녀는 일어서려는 우현을 붙잡아 앉히고는 메이크업까지 해줬다.
“오오...”
본판이 어디 가는 건 아니라서 연예인들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때깔이 달라 보인다고 해야 하나? 머리도 그럴듯하고 얇게 메이크업까지 해줘서 그런 것 같다. 그렇다고 연예인들처럼 화려한 게 아니라 딱 준수해 보일 정도다.
“마음에 들어?”
“나도 이제 매일 여기에 출근도장 찍을까?”
“나야 좋지. 싸게 해줄게. 자기는 좀 꾸며야 할 필요가 있긴 해.”
“어째 미용실 와서 상처만 받고 가는 것 같아.”
“나만큼 냉정하게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래? 아유... 그래도 예쁘다. 하여튼 내가 실력 하나는 정말 끝내준다니까.”
그녀는 우현의 어깨를 툭툭 털어주면서 긴장을 풀어주었다.
“어쨌든 오늘 일은 회사 사람들한테 말하지 마세요.”
“밖에 별이 있을 텐데?”
잠깐 움찔했지만 생각해보니 별이는 어제 중국으로 떠났다. 광고 촬영 겸 행사 참석 때문이다.
“없는 거 압니다. 놀리지 마세요.”
“오호... 알았어. 너무 떨지 말고, 자기는 떨지만 않으면 돼. 어디 가서 실수하는 사람 아니잖아.”
“흐흐, 그래도 누님은 저를 좀 아시네요. 요즘 저 안 왔다고 매니저들한테 저 흉보고 그러신 건 아니시죠?”
“원래 없는 자리에서는 나랏님도 욕한다고 했잖아. 이제 가, 조금 있으면 은하 올 거거든.”
오늘 은하는 스케줄이 없는 날이다. 저녁에 우현하고만 약속이 있는데...
“그, 그래요?”
“그래, 가다가 괜히 마주치지 말고 얼른 가.”
어째 다 알고 있는 듯이 말하니 더 민망해 얼른 미용실을 빠져나왔다. 마치 누가 보기라도 할 새라 후다닥 차에 올라 백화점에 들러 반지를 찾은 후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사무실로 가지 않은 이유는 누가 보면 분명 무슨 일이 있냐며 물어볼 게 뻔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일은 지 피디와 강 피디에게 전화로 물어보라고 했으니 급한 일만 아니면 별일 없을 거다.
그렇게 오피스텔에서 빈둥거리다 약속시간이 다가오자 다시 차를 몰고 청담동의 예약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도착한 시간은 약속 30분 전. 화려한 이벤트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저 룸으로 된 조용한 곳에서 분위기만 낼 수 있으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긴장한 채 은하를 기다리고 있으니 약속시간에 딱 맞춰서 그녀가 등장했다. 은하는 단정한 원피스 차림이었지만 러블리한 웨이브진 머리와 화사한 메이크업을 하고 있어 누가 봐도 스케줄을 끝내고 왔거나 중요한 자리에 온 것처럼 보였다.
“왔어?”
“응...”
평소에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인사인데 오늘만큼은 이상하게 어색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은하도 역시 평소 같지 않게 요조숙녀처럼 조신하게 행동한다.
웨이터에게 준비했던 음식을 내어달라고 하고 괜스레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보기 위해 ‘오늘 날씨가 쌀쌀하더라’, ‘임소라 열애설 터진 거 봤냐?’ 등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았는데 은하는 ‘응’, ‘그래’ 등 단답형으로 일관했다.
분위기는 더욱 어색해졌고 본 식사가 나올 때는 서로 간에 아무 말 없이 정적이 흐를 정도였다. 뭔가 생각했던 대로 분위기가 돌아가지 않자 결국 우현이 못 참고 준비했던 상자를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응? 그게 뭐야?”
단순히 말로만 들으면 몰라서 묻는 것 같지만 은하의 얼굴은 잔뜩 기대한, 장난감을 가져온 산타크로스를 바라보는 아이의 얼굴과 같아 보였다.
“으응... 있잖아... 내가 너 주려고 산 건데...”
더 할 말도 없고 은하의 눈길이 우현의 얼굴이 아닌 상자에 꽂혀 있기에 말을 하기 보다는 상자를 열었다. 은하의 눈빛은 쓸데없는 말은 집어 치우고 얼른 상자를 열라는 기세가 역력했기 때문이었다.
티파니 앤 쏘가 새겨진 고급스러운 상자가 열리고 나타난 작은 반지를 보고 은하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지만 그와 동시에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촉촉하게 맺혔다.
“내가 또 예전에 너 반지 맞출 때 사이즈를 기억하고 있었잖아? 잘했지? 크흠... 사랑해, 평생 너만을 사랑할게.”
머쓱해서 헛소리를 날리다가 결국 준비한 대사를 꺼냈다. 그녀는 감격했는지 또르륵 눈물을 흘렸다. 우현은 그녀의 손가락에 조심스럽게 반지를 끼웠다. 하얀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보는 순간, 천만 원이라는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그녀는 한참동안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와 우현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입을 열었다.
“고마워...”
“내가 더 고마워. 내 곁에 있어 줘서...”
그녀는 와락 우현에게 안겼다. 그렇게 잠시간 서로의 체온을 느끼다가 별안간 은하가 물었다.
“그런데 식은 언제로 잡을까?”
식? 여기서 물어보는 식이 결혼식인가?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만약 포옹한 채로 물었던 게 아니었다면 표정관리가 안 된 걸 눈치 챘을 거다. 하늘이 도왔다.
“글쎄... 언제가 좋을까?”
“아무래도 가을이 좋겠지? 봄의 신부가 좋다고는 하는데, 너무 빠르잖아? 괜히 속도위반 이야기도 나올 수 있고... 히힛!”
평생 너만을 사랑하겠다는 말이 프로포즈로 들렸나? 내가 은하와 결혼을?
[292]< 이것도 운명이다(5) > 끝
ⓒ 영완(映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