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 내가 스타로 띄어줄게-291화 (291/301)

=======================================

[291]< 이것도 운명이다(4) >

“혹시 별이에 대해서는 아직 말 없어요?”

“그건 아직 못 들었습니다. 일단 업프론트 행사에 포함된 것까지만 확인했고 페이스노트에 3분짜리 예고편이 올라온 상태입니다. 15일에 있을 업프론트 행사 이후에 23일에 있을 LA스크리닝에서는 풀버전을 선보일 예정이라고 하네요.”

생각해보니 벌써 이야기가 나오는 게 이상하긴 했다. 최소한 50분짜리 파일럿 영상을 풀버전 상영하는 LA스크리닝 행사가 끝나야 이야기가 나와도 나올 것이다. 아무래도 미드에 진출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스스로가 조급함을 느꼈던 것 같다.

“알겠어요. 수고했어요.”

“제가 한 일이 뭐라고 수고는요... 수고는 윤해연 작가님이 다 하셨죠. 진짜 대단하기는 하신 것 같아요. 들어보니까 거의 메인작가처럼 다 하셨다고 하더라구요.”

“워낙 내공 있는 양반이잖아요.”

일단 리메이크된 ‘미씽유’가 정규시즌이 거의 결정된 상황이라 한결 마음이 놓였다. 처음에는 남의 일처럼 생각했는데 별이가 거기에 출연하면서 괜히 마음이 쓰였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카운터’ 예고편 조회수가 벌써 천만을 넘었습니다. 엄청난 조회수인데 그래서인지 네플릭스에서 벌써 다음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넌지시 꺼내고 있습니다.”

예고편 조회수로 천만이 넘겼다는 말은 국내 네티즌들뿐만 아니라 해외 네티즌들까지 관심을 보였다는 말이다. 좋은 현상이다. 네플릭스와 협업하기로 했던 이유가 바로 해외시장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니까.

“그건 천천히 진행해요. 마땅히 만들 시놉도 없고...”

“왜, 그거 있지 않습니까?”

강 피디가 은근슬쩍 이야기를 꺼내는 게 아무래도 송유리 작가의 작품을 말하는 것 같다.

“그건 안돼요. 단순 로코는 네플릭스용이 아니야. 장르물로 찾아볼 테니까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진행해요. 너무 그쪽 말에 휘둘리지 말고.”

지금 국내에서 만드는 로맨틱 코메디는 엄밀히 말하면 한국식 로코라고 봐야 한다. 국내에서, 또는 아시아에서만 통하는 정서가 있고 그걸 이해할 수 있어야 드라마의 진짜 재미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해외로 수출할 콘텐츠를 장르물로 택하려는 이유가 그것이다. 사고가 일어나고, 범인을 추적하고, 사건을 해결해가는 장면들은 문화를 가리지 않고 같이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이야 네플릭스가 갑의 입장이지만 막상 좋은 컨텐츠를 가지고 있다면 가지고 있는 쪽이 갑이 될 거다. 파인프로덕션 입장에서 네플릭스는 수익창출을 위한 플랫폼이 더 생겼다는 것 정도로만 여겨도 될 거다.

“알겠습니다. 반응이 좋으니까 계속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하!”

사실 강 피디의 반응이 정상적이다. 잘 되면 계속 더 하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니까.

“솔직히 말하면 난 네플릭스보다 미국시장에 바로 진출하려는 마음이 더 커요. 네플릭스도 엄청난 해외고객을 확보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대중성면에서 조금 떨어지잖아요. 이번에는 오로지 네플릭스 자금으로 만들어서 회사 운영에 보탬도 되고 상징성도 있으니 협업하기로 했지만 이왕이면...”

“미국 방송사에 다이렉트로 제작을 해보겠다는 거군요.”

“그렇죠. 물론 법적인 문제들도 많고 미국 내 제작사와 협업해서 해야 하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가진 콘텐츠를 가지고 정면승부 해보고 싶거든요.”

“알겠습니다. 벌써부터 기대되는데요? 하하.”

“일단 7월에 방영하기 시작하면 그거 보면서 진행해보죠. 어차피 지금은 ‘변호사들’ 시즌2 때문에 작가팀들도 여유가 없어요. 외부에서 데리고 오거나 네플릭스에서 시놉을 구해줘야 한다는 건데, 이번처럼 괜찮은 시놉을 가지고 올지 알 수도 없고...”

들리는 말로는 이재호 작가 말고도 작가팀들 사이에서 새로운 시놉을 구상중이라고 들었다. 아직 밝힐 단계가 아니라며 공개하지 않고 있지만 꽤나 기대하는 중이다.

“그렇긴 하죠.”

“그리고 남이 쓴 작품 만드는 건 지양하고 싶어요. 피치 못 할 사정 아니면 우리 소속 작가들을 이용해야 회사도 지속적으로 성장하죠.”

헐리우드도 마찬가지지만 제작사의 입장에서 배우보다 더 중요한 게 바로 작가다. 능력 있는 작가야 말로 수백억 몸값의 배우보다 훨씬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그런 작가를 계속 영입하고 작품을 만들어야 회사는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송유리 작가의 영입은 파인프로덕션 입장에서 꽤나 중요한 계약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와중에 갑자기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똑똑...

대표실 문이 열리고 은하가 고개를 쏙 내민다.

“회의중?”

오전에 잡지촬영 있다고 들었는데 어느새 끝내고 회사로 왔나보다. 잠깐 기다리라고 말하려는데 강 피디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무 보시죠. 저는 대표님께 할 이야기를 다 해서...”

“하하, 그럴래요?”

차마 말리지는 못하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강 피디를 보냈다. 은하는 샐쭉한 표정으로 소파에 털썩 몸을 파묻더니 우현을 향해 눈을 흘겼다.

“별이 미드 진출한다며?”

“으응? 아... 그거 단역인데...”

사실 우현이 잘못한 것도 아니고 변명할 거리도 아니었지만 괜히 움츠러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흥! 이미 해연언니한테 다 듣고 왔구만! 파일럿에서 아예 조연 분량으로 촬영했다며?”

“응? 윤 작가님이 그렇게 말했어? 그럼 나는 이 일에 완전히 무관하다는 것도 알지? 나는 정말 손톱만큼도 관여하지 않았어. 그냥 윤 작가님이 별이 데리고 오라고 해서 데리고 간 것밖에 없다니까?”

“알지만 기분 나빠.”

“어? 아, 그래...”

안다는데 무슨 말을 더 할까? 그냥 기분이 풀어질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그럼 이제 별이 정식으로 미드 출연하는 거야?”

“아니... 이번에는 그냥 윤 작가 재량으로 출연한 거야. 오디션 안 본 거 알지? 제작진측에서도 오디션을 안 봤기 때문에 정식 출연자로 이름을 올리지 않았어. 단역으로 올렸다니까? 별이가 정규편성에서 조연으로 계속 출연하려면 방송사측에서 요구해야 해.”

“흐음... 예고편은 봤어?”

“어? 아직...”

“예쁘더라. 페이스노트 댓글도 봤는데, 외국 네티즌들도 별이에 대한 칭찬이 자자하던데?”

은하의 삐짐에 대한 이유를 알았다. 생각보다 반응이 좋은 외국인들 때문에 별이가 부러웠던 거다.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지만 간신히 참았다.

“그래? 한국이나 외국이나 예쁜 건 알아본다니까? 그러니까 이번에 랜디 오 감독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잘 되면 너도 이제 완전히 세계적인 스타가 될 거야.”

이번에 랜디 오 감독의 작품이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으로 제목을 선정했다. 조금 유치하지만 중국에서는 이 제목을 듣고는 엄청 좋아했다고 한다.

은하를 달래준다고 한 말이지만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그럴 영화가 아니었다면 은하를 거기에 넣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래서인지 은하도 마음이 풀렸는지 슬쩍 옆으로 와서 앉는다.

“어제 침대에 누웠는데 이상하게 잠이 안 오는 거야. 배우들치고 불면증 없는 사람 없으니까 나도 이제 그런 건가 싶었지.”

하는 작품마다 흥행과 연기력을 평가받으며 사는 배우들은 스트레스가 엄청나다. 그래서 불면증을 달고 살며 그 정도가 심하면 공황장애가 오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불 때 은하는 정말 멘탈이 강했다. 그 흔한 불면증 한 번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한참을 누워있으니까 오빠 생각이 나더라. 계속 이렇게 남들 모르게 연애하는 게 지겨워졌어. 그래서 답답했던 거였어.”

어떡해야 할까? 아직 20대 중반인 은하는 무엇을 바라고 기대하는 것일까?

“어쩔 수 없으니까.”

“알아. 그냥 바람이라도 쐬고 싶다. 우리 여행이라도 갈까?”

일 때문에 안 된다고 말하려 했지만 그녀의 눈빛에 진심이 담겨있다는 걸 깨닫자 차마 안 된다고 할 수 없었다. 그래, 까짓 여행 며칠 다녀온다고 회사가 망할까.

“그래, 어디 가고 싶어? 아, 너 예전에 그리스 산토리니 가고 싶다고 했지? 우리 거기로 갈까?”

“거긴 안 돼, 한국 관광객 많단 말이야.”

“그럼 북유럽 어때? 경치 죽인다는데? 아니면 동유럽 쪽. 폴란드랑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어때? 아니면... 그래, 터키도 좋다던데?”

은하는 우현의 설레발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살짝쿵 다가와 입을 맞췄다.

“어?”

잠시 입을 맞추던 은하는 우현의 뺨을 쓰다듬더니 말했다.

“아니야. 내가 좀 참지 뭐, 에휴... 어딜 가나 한국사람 없는 데가 없어, 그치?”

“그렇기는 하지...”

“나 갈래. 오늘은 그냥 집에서 잠이나 자야겠어. 어제 잠을 못자서 그런지 피곤해. 피부도 안 좋아진 것 같아.”

“그래, 잠 좀 자고나서 여유 있으면 샵에 가던가. 너 샵에 가면 스트레스 풀린다고 했잖아. 가서 마사지도 받고 해.”

“훗... 알았어.”

은하는 언제나처럼 천사 같은 미소를 남기며 나갔지만 우현은 멍하니 그녀가 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은하가 많이 힘든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한 시간 정도 오전 업무를 하다가 회사 사람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돌아와 다시 자리에 앉았는데도 찜찜했던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 외투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

“민주 씨, 나 좀 나갔다 올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전화 줘.”

은하에게 가려다가 방향을 바꿔 삼성동의 오피스텔로 향했다. 목적지는 윤해연 작가의 사무실 겸 숙소다. 그녀는 예전에 이혼하고 이렇게 회사에서 마련해준 오피스텔에서 보조작가와 같이 산다.

“어? 김 대표가 여긴 웬일이야?”

그녀는 방금 일어났는지 푸석한 얼굴에 머리도 산발이었다.

“커피 한잔 할 시간 있어요?”

“그래, 나 정리하고 나갈 테니까 1층 커피숍에 내려가 있어.”

1층에 위치한 프랜차이즈 커피숍에 30분 정도 있으니 그녀가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우현이 라떼 두 개와 디저트까지 들고 와 앉자 윤 작가가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홀짝 넘기고 입을 열었다.

“뭔데 여기까지 왔어? 무슨 급한 일은 아니지?”

“급한 일이면 전화로 했겠죠. 물어볼 게 있어서요.”

“뭔데? 혹시 여자문제야?”

이런 귀신들 같으니라고... 표정에 이미 드러났는지 윤 작가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자기는 여자문제에서는 표정관리가 안 되는구나?”

“보통 여자가 아니잖아요?”

그녀도 우현의 말은 인정하는지 고개를 까딱였다.

“그렇긴 하지. 그래, 우리 냉기마녀께서 무슨 말을 하셨길래 요즘 제일 핫하신 우리 대표님께서 여기까지 방문하셨어?”

“아니 글쎄, 그게 말이죠...”

오전에 은하와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니 윤 작가의 눈빛이 진지하게 바뀌었다. 그녀는 우현의 말을 다 듣고 나서 한참 고민하더니 슬쩍 운을 띠웠다.

“대충 무슨 일인지 알 것 같은데... 사실 한국에 들어와서 은하랑 며칠 동안 붙어있었잖아. 그런데 그 정도일 줄은 몰랐네.”

“네? 별이 때문에 그렇게 속상해 해요?”

윤 작가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우현을 빤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남자들은 돌려 말하면 안 된다니까. 하여튼 단순해가지고...”

“그럼 그것 때문에 삐진 게 아니에요?”

“삐지긴 누가 삐졌다고 그래? 은하 성격에 그런 것 가지고 삐질 애야?”

그러고 보면 은하는 지금껏 누굴 자신과 비교한 적이 없었다.

“그럼 뭐 때문인데요? 여행이 가고 싶어서 그런가?”

“여행 같은 소리 하네. 진짜 이런 머리로 어떻게 로코물들을 그렇게 분석해대지? 진짜 미스터리하다.”

“크흠... 그래서 결론이 뭔데요?”

윤 작가는 허리를 뒤로 젖히고 팔짱을 끼더니 비릿하게 웃었다.

“말해줄 수는 있는데... 감당할 수 있겠어?”

이건 또 무슨 시츄에이션인지? 어째서 장르가 로맨스에서 스릴러로 변한단 말인가?

[291]< 이것도 운명이다(4) > 끝

ⓒ 영완(映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