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0]< 이것도 운명이다(3) >
“어? 하늘이하고 계약하는 거예요? 아니다, 전에 우리 회사랑 기사난 거 진짜였어요? 이래서 기자들이 아주 없는 말을 하는 건 아니라니까?”
민주의 말을 들은 이주희 작가가 눈을 빛냈다.
“아이고, 그런 거 아니에요. 아직 우리 회사에 오기로 결정된 거 아니라니까요.”
“어머, 그럼 이야기는 하고 있는 중이라는 거네요? 이러지 말고 들여보내요. 나 하늘이랑 친해.”
이주희 작가가 예능작가 출신이었으니 여느 걸그룹들과 어느 정도 친분을 유지했을 거다.
“크흠... 일단 들어오라고 해요.”
잠시 후, 쭈뼛거리며 들어오던 정인주는 소파에 앉아 있는 이주희 작가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뜨며 반가워하다가 얼른 다시 우현과 시선을 마주했다.
“안녕하세요... 어머, 언니!”
“얘! 너 더 예뻐졌다. 연기도 많이 늘었던데?”
“정말요? 감사합니다. 언니 드라마 잘 보고 있어요.”
인주는 이 작가와 대화를 하면서도 곁눈질로 우현의 눈치를 보았다.
“이 작가 말대로 연기가 많이 늘었던데요? 노력 많이 한 것 같아요.”
사실 기대했던 것보다는 많이 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밀연애’에 대한 기사에서도 하늘에 대한 연기가 늘었다는 기사도 있었지만 여전히 부족하다는 기사도 있었다.
그럼에도 늘었다고 칭찬한 건 비록 부족하다고는 해도 노력한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연기를 배워보지 않은 친구가 걸그룹이 전문인 기획사에서 노력해봤자 얼마나 늘겠는가?
“감사합니다. 그래도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뒷말을 차마 잇지 못했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소속사랑은 해결 다 했어요?”
“무슨 문제요? 하늘아, 왜? 소속사에서 파인엔터로 가지 못하게 해? 일단 서 있지 말고 여기 앉아 봐.”
눈치 빠른 이주희 작가가 우현의 물음에 빠르게 치고 나섰다. 인주가 말을 꺼내기 어려워하는 듯하자 먼저 말을 꺼내 아예 파인엔터로 옮기는 것을 기정사실화 해버린 거다.
어차피 이왕 이렇게 된 거,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 작가의 이런 귀여운 참견에 내심 웃음이 나왔다.
인주는 이 작가 옆에 어정쩡하게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입을 열었다.
“아니요, 원래 회사랑 저랑 계약이 이번 달까지라... 회사에서는 계속 하고 싶어 하는데, 언니도 알잖아요? 저도 이제 이십대 중반이고, 아이돌 하기엔 체력도 많이 딸리고, 컨셉을 소화하기도 힘들구요.”
특히 ‘핫칙스’ 같은 경우는 유난히 섹시 컨셉의 노래가 많기는 했다. 그렇기에 그녀들도 무대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노래와 안무를 소화했지만 내심 그만하고 싶었을 거다.
“그렇지.”
“그냥 노래를 부르기 싫어서가 아니라 연기가 정말 좋아요. 부족한 걸 알지만 그래서 더 열심히 배워보고 싶구요.”
간절한 표정으로 말하는 것이 진심인 것 같았다. 거짓말이면 엄청난 연기력을 가진 것이니 그것도 나쁘지 않고...
이 작가는 꼭 그녀를 파인엔터로 영입해야 한다는 얼굴로 연신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렸다. 이 작가가 예능작가일 때 많이 친했나보다.
“그래요. 그럼 계약하도록 합시다.”
“정말요?”
“은하나 강소연 씨급의 최고 대우는 해줄 수 없다는 건 알죠?”
“그 정도는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그녀는 양 손을 흔들며 언감생심 그런 마음은 품지도 않았다는 것을 피력했다.
“좋아요. 3월말까지는 계약된 스케줄 전부 이행하고 4월 1일에 회사로 오세요. 4월 1일 이후 스케줄은 전 회사랑 협의 하에 진행할 테니까 무리하게 스케줄 거절하지 말구요.”
“알겠습니다.”
“음... 그리고 말 놓을게. 이제 우리 식구니까. 괜찮지?”
“아휴, 오히려 제가 부담스러워서 그래주셨으면 했습니다.”
성격 좋은 걸 보니 사회생활은 잘 할 것 같다. 하긴, 저렇게 간이 크니 아무 연고도 없는데 무작정 찾아왔겠지.
“그럼 그 때 보자.”
원하던 결과를 얻어서 그런지 올 때와는 달리 밝은 얼굴로 일어난 인주는 이 작가에게 연신 손을 흔들어 아쉬움을 표하고는 대표실에서 나갔다.
“그럼 전에 대표님이 하늘이를 깠다는 게 진짜였어요?”
어차피 이 작가는 같은 식구였고 나가서 떠들 사람도 아니었기에 그냥 이야기해주기로 했다. 게다가 굳이 숨길 이야기도 아니었고...
“사실 하늘이는 안 받으려고 했어요. 으음...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부담스러웠거든요. 안 그래도 바쁜데 배우 하나 더 들어오면 정말 정신없을 것 같아서요. 요즘에는 유니나 파이브 걸즈는 앨범 작업만 도와주고 다른 건 아예 손도 못 대고 있으니 미안해 죽겠어요.”
“그랬구나. 그런데 마음이 바뀌신 거예요? 설마 저 때문에 계약하자고 하신 건 아니죠?”
괜히 자신이 일을 망친 거 아닌가 해서 눈치를 본다.
“하하, 아니에요. 전에 ‘비밀연애’에서 연기 하는 거 보고 결정한다고 이야기해줬어요. 조금... 부족하긴 했는데 노력한 티가 나서 다시 찾아와서 계약해달라고 하면 해줄 생각이었어요.”
“안 찾아오면요?”
“그럼 굳이 내가 찾아갈 필요는 없잖아요?”
“와... 우리 대표님 은근 냉정하시네.”
“이래서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차지한다고 하잖아요? 우리 송 작가도 용기 있게 미리 좀 찾아오시지.”
가만히 보고만 있던 송 작가가 배시시 웃었다.
“아... 앞으론 그렇게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주희 작가가 손바닥을 쳤다.
“아! 송 작가가 쓴 시놉 여주를 정인주로 하면 어때요? 원래 시놉 상의 여주가 완전히 발랄하잖아요? 딱 인주가 하면 괜찮을 것 같은데요?”
생각해보니 이주희 작가가 왜 이런 이야기를 꺼냈는지 알 것 같았다. 내용 상 여주의 성격이 상사한테도 할 말은 하고 붙임성 좋으며 나서길 좋아하는 성격인데 인주의 이미지와 잘 맞다.
보통 이런 연기가 쉽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막상 이런 캐릭터를 소화하는 건 쉽지 않다. 자칫하면 캐릭터가 재수 없어 보이기도 하고 건방져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작가는 이것까지는 생각하지 않고 그저 인주의 이미지와 잘 맞다고 생각한 것 같은데 우현이 생각해도 인주가 가진 특유의 발랄함과 걸그룹으로 쌓아올린 친근한 이미지가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 같았다.
“일단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천천히 생각해요.”
“이야... 오늘 전속계약도 하고 바로 여배우까지 캐스팅 하는 거야? 우리 송 작가 복 받았네?”
이 작가는 내심 송 작가의 입봉이 기다려지는지 그녀보다 더 들뜬 모습이었다. 그렇게 그녀들과 점심을 먹고 송 작가와 5년 전속계약을 맺었다.
송 작가와 전속계약을 맺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곳은 파인프로덕션 관계자들이었다. 어디서 이야기를 들었는지 지여울 피디가 헐레벌떡 대표실을 방문했다.
“신인작가랑 전속계약 하셨다면서요? 시놉이 아니라 아예 16회 짜리 대본을 가지고 왔다면서요?”
어찌나 급한지 마치 취조하는 것 같았다.
“어디서 듣고 왔어? 빠르기도 해라.”
“어쨌든 맞다는 말이죠? 아싸!”
“왜? 아랫집 식구들이 보채?”
아랫집 식구들은 아래에 있는 파인프로덕션 직원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랜디 오 감독의 대형 프로젝트와 네플릭스 드라마 ‘카운터’까지 제작을 하는 중이지만 물밀듯이 밀려드는 경력자들 때문에 인력이 남아도는 중이다.
인력을 적게 뽑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부족한 인력을 그때, 그때 비정규직으로 단기 채용할 생각은 없다. 앞으로 더욱 커질 회사라는 생각에 실력이 있는 경력직이라면 일단 채용하고 봤다.
회사에서 만드는 영화, 드라마의 흥행을 장담할 수 있는 우현이기에 할 수 있는 정책이었다.
그렇다고 직원들이 아예 놀고만 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촬영을 하다보면 실력 있는 경력자 인력이 부족할 때가 흔하기에 프로젝트 단위로 파견을 보낸다. 때문에 말이 노는 거지 일이 없는 게 아니다. 실제 파인프로덕션에 상주하는 직원들은 전체 직원의 10% 정도에 불과하다.
“지금 아래쪽 분위기가 어떤지 아세요? 대표님이 완성된 대본 가지고 있는 작가랑 계약했다니까 서로 자기가 하겠다고 저한테 전화오고, 사다리 타고 난리예요.”
파견 가서 남의 일을 해주는 것보다 자신의 일을 하고 싶은 거다.
“하하, 진짜? 그래서 지 피디가 이렇게 날라오셨구만.”
“당연하죠. 대본이 이거예요? 언제 출력까지 해오셨대? 송 작가가 뽑은 거예요? 기특하기도 해라.”
원래는 usb에서 출력한 뒤 돌려봐야 할 것이지만 송 작가의 유도리 없는 행동 덕에 아랫집 식구들 일이 줄었다.
잠시 대본을 훑어보던 지 피디의 입가에 가는 미소가 그려졌다.
“이거 다 가져가도 되죠? 재밌는데? 복사해서 나눠줘야겠네.”
“연출 가능한 사람 누구 있지?”
“어머, 벌써 준비하시는 거예요? 장태석 피디, 오해수 피디 있어요. 둘 다 로코 문제없는 사람들이에요. 장태석 피디는 세심하고 자상해서 배우들이 좋아하고, 오해수 피디는 카리스마 있죠.”
대본 다 나왔다고 아예 자리 깔고 앉아 제작을 들어갈 모양새다.
“흥분하지 마. 그냥 알고 있으려는 거니까. 사전제작으로 갈 거니까 편성은 천천히 받아도 될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일단 스태프들 구성해봐.”
“그럼 연출을 정해 주셔야죠.”
“으음... 어느 한쪽 편들어 주면 다른 쪽은 섭섭해 하겠지?”
“어쩔 수 없죠. 일단 A팀, B팀으로 도와가면서 해도 되구요.”
“사전제작에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굳이 대본 다 나왔는데 꼭 사전제작을 해야 할 필요도 없잖아요?”
생각해보니까 그렇다. 대본도 다 나왔는데...
“그럼 A팀 감독을 장태석 피디로 가고 편성 논의해볼게. 지 피디는 스태프들 꾸려보고 제작비 산출해봐. 대본 보면 알겠지만 영국에서 더비경기 촬영해야 할 수도 있어. 제작비 따져서 로케할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촬영할지 결정해야 해.”
“옛썰!”
그녀가 우렁차게 경례를 하고 나갔다. 그런데 우렁찬 대답이 무색하게도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진행이 막혀버렸다. 지상파와 케이블을 막론하고 가을까지 편성이 다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탄탄한 자본으로 사전제작을 한다고 하더라도 무리가 갈 수밖에 없다.
결국 눈물을 머금고 제작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 달이 가고 별이가 출연한 ‘결혼시대’가 시청률 17%를 마지막으로 유종의 미를 거두며 종영했다.
별이는 이제 명실상부 톱스타에 올라섰고 CF단가와 출연료도 전에 비해 최소 두 배가 올랐다. 만약 별이가 걸그룹 출신이 아니었다면 훨씬 더 반응이 극적이었을 텐데 그게 조금 아쉬울 뿐이었다.
그동안 윤해연 작가는 한국으로 돌아와 휴식에 들어갔고 ‘핫칙스’는 하늘이 재계약을 포기하며 공식적으로 해체를 선언했다. 그리고 하늘이 파인엔터와 전속계약을 맺으며 이제 완전히 배우가 됐음을 선언했다.
또 다시 한 달이 흘러 5월이 됐을 때, 은하가 출연하는 네플릭스 드라마 ‘카운터’의 촬영이 순조롭게 끝났다. 네플릭스는 7월로 예정된 드라마 홍보를 위해 벌써부터 포털사이트에 ‘카운터’의 편집 예고편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5월 9일.
“대표님! 대표님!”
강상훈 피디가 대표실로 후다닥 뛰어올라왔다. 붉게 상기된 얼굴을 보니 드디어 기다리던 뉴스가 도착한 듯싶었다.
“됐어요?”
“네, ABC에서 15일에 하는 업프론트 행사에 ‘미씽유’를 포함하기로 했답니다! 아마 지금쯤 윤해연 작가님도 연락을 받았을 겁니다.”
됐다. 정규시즌이 거의 확정적이다.
[290]< 이것도 운명이다(3) > 끝
ⓒ 영완(映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