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9]< 이것도 운명이다(2) >
그래, 전에 강상훈 피디로부터 설명을 들은 적이 있다. 5월이 되면 뉴욕에서 광고 업프론트(Upfront) 행사가 열린다고. 그 때 정규편성이 될지, 나가리가 될지 결정 날 것인데 만약 정규편성이 되고 해당 방송사에서 별이를 보고 매력을 느낀다면...
“너무 우리끼리 김칫국 마시는 것 같으니까 일단 별이한테는 함구할게요. 우리끼리만 알고 있자구요.”
“당연하지, 에휴... 나 한국가면 은하한테 등짝 얻어맞는 거 아닌지 몰라.”
“하하하! 괜찮습니다. 은하는 지금 대작 영화 들어갔어요. 아, 그거 못 들으셨죠? 랜디 오 감독 영입한 거.”
그녀는 집필에 정신이 없어 회사사정은 듣지 못했던 것 같다.
“랜디 오? 한국사람이 아니야?”
“한국사람이긴한데, 미국에서 자랐어요. 한국말도 꽤 해요. 헐리우드에서 데뷔하려고 단편영화 하나 만든 걸 봤는데 재능이 보통 아닌 거 있죠? 그래서 제가 납치해와서 3백억짜리 대작 하나 맡겼어요.”
한두 푼도 아니고 3백억이라는 말에 당연히 놀랄 거라 생각했는데 윤 작가는 의외로 별거 아닌 것처럼 반응했다.
“우리 김 대표 배짱이 장난 아니네? 투자는 다 받았고?”
“네, 투자는 전부 받았어요. 중국에서 지분참여로 2백억 들어오기도 했고... 그런데 작가님은 안 놀라네요? 다른 사람들은 제작비로 3백억 쓴다고 엄청나게 걱정하던데?”
“하하, 나도 이제 간이 커져서 그런가봐. 이거 50분도 안 되는 파일럿 하나 만드는데 얼마 들었는 줄 알아?”
“맞다. 그게 궁금하긴 했어요. 오래전 영국왕실의 공주가 주인공이니 제작비가 엄청나겠네요?”
“여주인공이 마지막 주에 영국까지 날아가서 촬영하고 올 거야. 어느 고성에서 촬영한다고 하는데, 사진으로 보니까 꽤나 멋지데? 제작비가 궁금해서 슬쩍 물어보니까 대략 천오백만 달러 생각한다고 하더라구.”
“천오백만 달러면... 대략 160억 정도 되나?”
“그렇겠지? 하여튼 고작 파일럿 하나 만드는데 그 정도 돈이 들잖아. 정규편성 될지 확정도 안 된 작품을 말이야. 그걸 봐서 간이 커진 건지 김 대표가 영화 하나 만드는데 3백억 쓴다고 해도 별 느낌이 없네?”
“이래서 사람은 큰물에서 놀아야 하는가봅니다, 하하하!”
그렇게 수다를 떨다 별이의 촬영이 끝나고 나서 같이 저녁을 먹으며 미드를 만드는데 어떤 과정이 필요하고 어떤 노력이 드는지 장시간에 걸쳐 이야기를 나눴다.
실제 미드 제작에 참여한 윤 작가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경험을 하면서 더 빨리 이곳에 왔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헐리우드에 있는 작가들이라고 대단한 사람들 같았지만 막상 이야기를 나눠보니 다 똑같은 사람들이었다고...
실제 그녀가 한 일은 메인 작가가 역사를 바탕으로 이야기의 뼈대만 세운 것에다 캐릭터와 이야기에 살을 붙이는 것이었다고 한다. 사실상 그녀의 또 다른 창작물이나 다름없는 셈이었다고.
벌써부터 제작사에서 윤 작가에게 다른 시놉시스를 써보지 않겠냐는 말까지 나왔다고 한다. 물론 우현은 윤 작가의 차기작은 반드시 파인프로덕션에서 만들어야 한다며 그녀를 철저히 단속(?)했다.
사흘간의 촬영 후 별이와 우현은 먼저 한국으로 들어왔다. 윤 작가는 촬영이 다 끝난 이후에 올 수 있기에 일주일은 더 있어야 한국에 올 수 있을 거다.
마침 주말이라 이틀 더 쉬고 사무실에 복귀하니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어? 아침부터 어쩐 일이에요?”
보통 작가를 비롯한 예술, 창작계통에 있는 사람들은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난다. 그렇기에 회사에선 특별한 일이 아니면 점심이 지나기 전에는 연예인들이 모습을 보이지 않는데 갑자기 이주희 작가가 아침 댓바람부터 우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아침에 운동을 해서요. 캐나다는 잘 다녀오셨어요?”
진짜 운동때문인지 그녀는 화장도 안 한 맨얼굴에 츄리닝을 입고 있었다.
“네, 관광 삼아 잘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웬 운동이에요?”
“글만 쓰다보니까 몸이 완전히 망가졌지 뭐예요. 허리도 아프고 두통에, 소화불량에... 그래서 얼마 전부터 운동하고 있는데, 이게 운동을 하다보니까 체력은 체력대로 딸리고 배는 고프고... 하여튼 요즘 정신없어요.”
전작이었던 ‘변호사들’을 마치고 스트레스가 심했는지 그녀는 영 얼굴이 안 좋아보였다.
“그래도 운동 꾸준히 하면 조금씩 나아질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어요. 어쨌든 전에 ‘변호사들’ 시즌 2 하신다고 한 거... 거절해서 미안해요.”
“아... 괜찮아요. 이재호 작가님이 해주신다고 하셔서 크게 문제는 없었어요.”
“그래도 시즌 1을 제가 했었으니 제가 하면 수월할 텐데... 제가 하고 싶은 작품이 있거든요.”
“하하, 괜찮아요.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그런데 하고 싶은 작품이 어떤 거예요? 지금 시놉 가지고 왔어요?”
그녀의 주변을 둘러보니 작은 차키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요, 아직 만드는 중이에요. 그것보다... 전에 송유리 작가라고 기억나세요?”
“아... 그럼요. 당연히 기억하죠.”
“사실 그 친구가 내 대학 후배거든요. 전에 시놉시스 보고 대표님께서 진행해보자고 하셨다가 대본보고 까셨다면서요?”
“하하하! 맞아요. 3회까지는 괜찮았는데 4회부터 무너지는 게... 순발력이 부족해서 그런가? 일단 시간을 더 줘 보려고 돌려보냈어요. 다음에 다 만들면 가지고 오라고 했었는데... 그런데 왜 이 작가님이...?”
생각해보니 지금쯤 16회짜리 대본을 다 쓰고도 남을 시간이긴 했다.
“아 글쎄... 내가 며칠 전에 그 얘를 만났거든요. 그런데 얼굴이 반쪽이 되가지고 골골거리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뭐 때문이냐고 했더니 대표님께서 말씀하신 그 이야기를 하는 거 있죠? 나는 그걸 며칠 전에야 알았지 뭐예요?”
“그래요? 왜 얼굴이 반쪽이 됐대요?”
“아무리 써도 재미가 없는 것 같대요. 왜, 이 바닥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걸린 ‘내 글 구려병’ 같은 건데 조금 심한 것 같아요.”
메인작가가 보조작가를 두는 이유 중의 하나도 자신이 쓴 글이 재미있는지 가장 먼저 보조작가가 검수해주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보통 자신은 재미있다고 쓰지만 중립적인 의견을 내줄 수 있는 사람이 옆에서 조언을 해주면 그것보다 도움이 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주변에 그렇게 중립적인 의견을 말해 줄만한 사람이 없다보면 자신이 쓴 글에 자신이 없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특히 대중에게 평가를 받아 본 적 없는 신인작가들은 대부분 이런 마음으로 글을 쓰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작가는 송유리 작가가 쓴 거 한번 봤어요?”
“대표님께서 재밌다고 말씀하셨다고 하길래 보여 달라고 했더니 엄청나게 고민하는 거 있죠? 어찌어찌 달래고 뺐다시피해서 봤는데, 너~무 재밌는 거예요!”
진짜 재미있었는지 ‘너무’를 엄청나게 강조한다.
“그래요?”
“네, 그래서 고민하지 말고 얼른 대표님한테 가져다주라고 등 떠밀었죠. 얘가 내 말을 믿고 오늘 회사로 온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 때 대표님이 냉정하게 말해줬던 게 약이 된 것 같지만 그만큼 두려움이 생긴 것 같아요.”
“흐음... 두려움은 어차피 작가 스스로가 극복해야죠.”
작가도 냉정한 조언과 악플을 극복해야 하지만, 사실 그 정도는 연예인에 대한 악플과 악의적 기사에 비하면 정말 별거 아니다.
물론 드라마가 방영이 되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달리는 댓글들은 하나같이 가슴을 후벼 팔만큼 냉정한 말들이 되기에 드라마를 하는 중간에는 보조작가가 댓글과 기사, 시청률을 토대로 해 불필요한 이야기는 걸러(?)서 이야기해준다.
“맞아요. 특히 시청률 잘 나오고 재밌다는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면 그런 증상도 많이 사라지니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아요. 사실 저도 대표님 만나기 전에는 내가 이렇게 돈 많이 버는 작가가 될지 몰랐다니까요?”
이래서 누군가의 재능을 냉정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대단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한참을 이주희 작가와 수다를 떠는데 누군가 대표실 문을 노크했다.
똑똑...
“송유리 작가님 오셨는데요?”
“들어오라고 하세요.”
민주의 뒤를 따라 들어온 송유리 작가는 여전히 예쁜 얼굴이지만 얼굴에 그늘이 져서 누가 봐도 고민이 많은 것처럼 보였다.
“안녕하세요.”
“글 다 쓰셨다면서 왜 이제야 왔어요?”
“그게... 아직 탈고하기엔 부족한 게 많은 거 같아서...”
말하는 것만 봐도 전과 달리 자신감이 팍 떨어져 있었다. 원래 한번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는 법이라 아마 저대로 놔두면 1년이 지나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일단 대본 좀 보죠.”
“여기...”
그녀는 여느 대학생들처럼 캐쥬얼한 복장에 커다란 백팩을 메고 왔는데 그 백팩에서 엄청난 분량의 대본을 꺼냈다.
“헐...”
옆에서 보던 이주희 작가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을 정도다. 송유리 작가는 낑낑대며 대본을 탁자에 올려놓고 우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보면 된다는 뜻이리라.
“정신이 없긴 없었나보네. 그냥 usb에다 담아 오지...”
“아!”
송 작가는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생각했는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우현은 피식 웃고 4회 대본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참고로 송 작가가 쓴 작품의 내용은 LC트윈스와 아스날을 사랑하는 여자주인공이 두선베어스와 첼시의 광팬인 남자주인공의 부하직원으로 들어가면서 벌어지는 좌충우돌 로맨스다.
전에는 초반에 잘 나가다가 급하게 쓰라고 하니 주인공의 캐릭터가 이상해지고 내용이 산으로 가는 등 실력을 의심하게 하는 글이었는데, 확실히 시간을 두고 써서 그런지 아주 흡족했다.
특히 송 작가가 야구와 축구를 좋아하는지 각 선수단의 색깔을 작품에 녹여내서 대사를 치는 능력이 아주 발군이었다. 일이 그렇게 서투니 사(?)스날을 좋아한다는 둥, 성격이 그렇게 개판이니 첼시를 좋아하냐는 둥 말이다.
내친김에 그녀들을 앉혀놓고 8회까지 읽어 내렸다. 점심시간이 아니었다면 계속해서 읽었을 테지만 일단 그녀들을 굶길 수 없으니 대본을 내려놓았다.
“재밌네요. 송 작가는 사전제작 할 때만 써야겠네.”
“아... 그런가요?”
칭찬인지 욕인지 그녀가 어벙한 표정으로 분간을 못하자 이주희 작가가 그녀의 등짝을 후려쳤다.
“아야!”
“대표님이 지금 너랑 계약하고 싶다고 하신 거야! 이 멍충아!”
송 작가는 등을 감싸 쥐며 괴로운 표정을 짓다가 이 작가의 계약이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 우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말이세요?”
“맞아요. 이것만 계약해도 되고, 원하시면 이주희 작가처럼 전속으로 계약하셔도 됩니다. 물론 우리 입장에서는 전속계약이었으면 좋겠지만 작가님 원하는 대로 하세요.”
“어머, 진짜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두 손을 꼭 모아 우현을 향해 연신 고개를 숙였다.
“아까 사전제작을 해야겠다는 말은 진심이에요. 드라마 후반부터 생방 들어가서 작품 망가지는 것보다는 작품의 완성도를 생각하면 안전하게 사전제작으로 하는 게 낫겠다는 거죠. 어쨌든 글 쓰시느라 수고했어요.”
“감사합니다. 그럼 지금 바로 계약하는 건가요?”
“배고프니 밥은 먹고 와서 합시다.”
“아, 그런가요? 하하하!”
두 뺨에 눈물이 흐른 채로 웃으며 좋아하는 게 웃겼지만 민망해 할까봐 모른 척했다. 그렇게 둘을 데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민주가 황급히 대표실로 들어섰다.
“대표님, 밖에 ‘핫칙스’의 하늘... 아니, 정인주 씨 오셨는데요?”
[289]< 이것도 운명이다(2) > 끝
ⓒ 영완(映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