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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 이것도 운명이다(1) >
“단역이에요?”
“응, 바쁘면 안 와도 되는데 나는 우리 별이 꼭 보여주고 싶어. 보통 미국에서는 동양적인 아름다움이라고 하면 눈이 쭉 찢어지고 광대뼈가 돌출한 여성을 상상한단 말이야, 중국의 루시 리우처럼. 나는 서양에서 생각하는 그런 전형적인 동양 여성이 아닌 다른 매력적인 한국의 여성을 보여주고 싶어.”
일리 있는 말이긴 한데...
“누구도 동양에 그런 여성만 있다고 생각하진 않을 걸요?”
“그렇지. 하지만 프라임타임에 나오는 미드에 한국의 미인이 나온 적은 없잖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다.
“알았어요. 그런데 아시죠? 요즘 별이 엄청 잘 나가는 거. 아직 정규편성 확정된 것도 아니고 파일럿에 단역으로 나온다고 하면 여기서 말 나올 게 뻔한데.”
“그건 김 대표가 알아서 잘 얘기해 봐. 대신 내가 여기서 우리 별이 괄시당하지 않게 잘 봐줄 테니까. 그리고 내가 우리 별이 꽂아주려고 얼마나 침을 튀기며 밀어붙였는데? 얘들은 고작 단역 하나도 오디션을 봐야 한다고 빠락빠락 우겨가지고 힘들었어. 그나마 한국말을 써야 하니까 그냥 넘어가주더라고.”
“하하하! 알았어요. 기간은 어느 정도나 걸려요?”
“넉넉잡고 사흘. 촬영은 캐나다에서 하는 거 알지? 관광까지 생각하면 일주일 잡고 와도 돼.”
“별이 바쁜 거 알면서... 여유 있게 나흘 잡고 보낼게요. 제작진한테 스케줄 확정해서 보내달라고 해주세요. 그리고 이건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차기작 준비는 못하고 계시죠?”
“어머 어머, 나 요즘 하루에 4시간도 못 자. 김 대표도 이럴 때 보면 악덕업주 같다니까?”
움찔한 우현은 얼른 말을 돌렸다.
“그래서 ‘혹시’라고 물어봤잖아요? 저도 ‘우리 윤 작가님이 얼마나 바쁘실까?’, ‘건강은 잘 챙기고 계시나?’ 항상 걱정하고있다구요.”
“흥! 하여튼 말은... 은하나 잘 챙겨. 나는 이제 파일럿 제작만 끝나면 바로 한국으로 들어갈 거야.”
“예, 건강 잘 챙기세요. 그 때 뵙겠습니다.”
생각지도 못하게 별이가 가장 먼저 해외진출을 하게 생겼다. 물론 단역이라 비중은 작지만 일단 미드에 얼굴을 비춘다는 게 의미 있다. 어차피 예쁜 사람 좋아하고 알아보는 건 한국사람이든 미국사람이든 다 똑같으니까.
“흐음... 그래도 지금 별 씨가 이렇게 잘 나가는데 파일럿 단역으로 출연시키는 모양이 조금... 그렇지 않을까요?”
사정을 들은 지여울 피디는 얼굴을 찌푸렸다. 소속사가 해외 진출을 위해 소속배우를 싸구려로 취급한다는 모양새로 보일까봐서다.
“이럴 때 한국사람들한테 잘 먹히는 게 있잖아.”
“네?”
“학연, 지연, 혈연. 원래 한국사람들이 이 세 가지에 껌뻑 죽잖아. 마침 윤해연 작가가 파일럿 제작에 참여했으니까 윤해연 작가를 응원하는 차원이라고 보도자료 뿌리면 되지.”
지 피디는 우현의 설명을 듣고 순식간에 표정이 밝아지며 손뼉을 쳤다.
“아... 그런 수가 있었네요.”
미국의 연예계 시스템은 한국과 다르다. 힘 있는 기획사가 잘 훈련한 아티스트를 미디어에 연속적으로 노출해 스타가 되게끔 유도하는 국내와는 달리 바닥부터 시작해 차츰 인지도를 쌓아야 한다.
현재 미드에 출연하는 모든 출연자들은 최소 수십, 수백 번의 오디션을 본 사람들이며 설사 주연으로 출연한 적이 있더라도 다른 작품에 출연하기 위해서는 오디션을 거쳐야 한다. 한국과는 차원이 다른 경쟁률이다.
윤해연 작가가 단역으로 별이를 부른 이유도 거기에 있었고 우현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기에 승낙한 것이다.
물론 아시아시장에서 이미 톱스타가 된 이후라면 바로 헐리우드에 진출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아시아 전역을 휩쓸 만한 대작 영화에 출연해야 한다. 지금 랜디 오 감독이 준비하는 그런 영화나 세계 3대 영화제 수상작 정도는 돼야 한다는 말이다.
지 피디가 보도자료를 뿌리기 위해 홍보팀에 가자 바로 별이를 사무실로 불렀다. 요새 ‘결혼시대’ 촬영으로 한창 바쁜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마음만 먹으면 하루 촬영은 오전이나 오후로 몰아버릴 수 있기에 큰 무리는 아니었다.
오후 3시쯤에 사무실에 도착한 별이는 막 촬영을 하고 와서 얼굴의 메이크업조차 지우지 못한 상태였다.
“부르셨어요?”
요즘 시청률도 좋고 네티즌들과 기자, 방송관계자들 모두 반응이 좋아서 그런지 별이의 얼굴은 ‘나 오늘 기분 좋아요’라고 쓰여 있는 것 같았다.
“촬영 힘들지?”
“하나도 안 힘들어요. 요즘 감독님이랑 스태프들도 엄청 잘 해주시거든요.”
감독을 비롯한 스태프 입장에서는 별이가 예쁠 수밖에 없을 거다.
“다행이네. 그래도 혹시 현장에서 불만이 생긴다거나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고.”
“하하, 그럼요. 그런데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신 게 어떤 거예요?”
“너 다음 주까지 촬영하고 끝이잖아? 종방연 마치고 바로 캐나다 좀 갔다 올래?”
생각지 못한 캐나다행에 그녀가 어리둥절한 것은 당연했다.
“캐나다요? 갑자기 웬 캐나다?”
“너 윤해연 작가님이 미국에서 ‘미씽유’ 리메이크 하는 거 알고 있지? 작가님이 전화해서 너 단역으로 얼굴 한번 비춰줄 수 있겠냐고 하더라.”
“우왓! 저 미드 데뷔하는 거예요?”
별이는 소파에서 튕기듯이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그녀가 생각보다 더 흥분하는 듯하자 괜히 민망해졌다.
“야, 야. 단역이라니까. 단역이야.”
“단역이라도 어디에요? 그거 기사 보니까 잘 하면 정규 프라임타임에 들어갈 수도 있다면서요? 그러면 시청자가 못해도 천만일 텐데 거기에 얼굴을 비추는 거잖아요? 꺄아악! 대박!”
“야, 너 지금 한국에서 스타야. 헐리우드 너무 신봉하는 거 아니냐?”
“미국이라서 무조건 신봉하는 게 아니구요. 느낌이 다르다구요. 헐리우드는 그냥 꿈같은 곳이었는데... 아아... CSI, 프렌즈, 워킹데드, 프리즌 브레이크... 제가 거기에 나온다는 거잖아요? 지금 어떻게 흥분을 안 할 수가 있겠어요?”
생각해보니 별이는 오랜 연습생 생활을 미드를 보며 버텼다고 들었다.
“그래, 어쨌든 이번에 윤해연 작가님이 힘 좀 썼나봐. 촬영기간은 사흘 정도 된다고 하니까 잘 다녀와.”
“단역이라면서요? 무슨 사흘씩이나 찍어요?”
“설마 사흘 동안 내내 촬영하겠어? 온 김에 관광도 하고 편하게 지내다 가라는 뜻이겠지.”
“아아...”
우현의 설명에 별이는 바로 납득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정말 촬영을 사흘 동안 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며칠 뒤, 지나가 출연하는 ‘무조건 잡는다’가 크랭크인을 하게 됐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작품을 들어가게 됐으니 잘 됐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다시 순식간에 2주가 지나 별이가 캐나다로 떠났다. 이미 기사로 윤해연 작가의 미국시장에 대한 도전을 떠들썩하게 보도해놨기에 별이의 캐나다행에 태클을 거는 기자는 없었다.
원래 캐나다에는 매니저만 동행하기로 했었지만 우현도 따라가기로 결정했다. 단역이라 굳이 따라갈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혹시라도 있을 사고나 트러블에 대비해 우현이 따라나선 것이다. 때마침 우현이 할 일이 없기도 했다.
캐나다에 도착하니 이미 제작진과 윤해연 작가가 마중 나와 있었다. 그녀는 몇 개월의 타지 생활이 힘들었는지 우현을 보자 왈칵 눈물을 보였다.
늙어서 주책이라며 요란하게 수다를 떨고 난 후 미리 예약해 놓은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바로 촬영현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현장에 도착해서 별이의 대본을 확인하니 단순히 단역으로 얼굴 한번 비추고 지나갈 것이 아니었다.
“대사가 상당히 많은데? 그리고 주인공하고 꽤나 많이 부딪치잖아?”
영어 대사가 없을 뿐이지 한국어로 부산스럽게 수다를 떨거나 대화가 안 통해 바디랭귀지로 주인공과 대화를 시도하는 장면도 있었다.
“이 정도는 별거 아니잖아? 너무 눈치 보지 마. 별이는 연기 잘 해서 이 정도 연기는 발로 해도 돼.”
제작진이 오디션을 보려 했었다는 게 이해가 될 정도였는데 윤 작가는 자신만 믿으라며 큰 소리를 떵떵 쳤다.
“그러니까 미국으로 유학왔다가 주인공이랑 같은 방을 쓰는 역인 거네요?”
“그렇지. 주인공이 공장에서 일하기 전에 잠깐 같이 사는 유학생 역이야. 비호감도 아니고 연기하기에 따라서는 충분히 매력을 보여줄 수 있을 거거든? 특히 한국어잖아. 그게 뭐겠어? 애드립을 할 수 있을 만큼 내가 대본에 여유를 뒀다는 거지.”
확실히 윤 작가가 별이를 많이 배려했다.
“한국말로 애드립 해도 못 알아듣잖아요? 아, 자막이 있나?”
내심 생각보다 많은 대사와 역할에 곤혹스러워 하는 별이에게 윤 작가가 어깨를 토닥이며 자상하게 말했다.
“말이 달라지면 행동이나 표정이 달라져. 자기는 충분히 매력적이야. 알지? 너무 긴장하지 말고, ‘나의 매력을 충분히 보여준다’라는 생각으로 연기해. 이 아줌마 믿지?”
윤 작가의 배려에 별이도 손을 가슴에 대고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
“아휴, 아줌마라뇨... 작가님께서 좋은 기회 주셨으니까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제가 또 간은 크거든요, 헤헤.”
1시간 뒤 촬영이 시작됐고 별이의 촬영은 오후 내내 이어졌다. 어차피 대사를 조금 더듬어도 알아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별이는 생각보다 대담하고 과감하게 연기했다.
“굿! 베리 굿!”
낙하산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처음에 별이를 바라보던 제작진들의 눈빛은 상당히 차가웠었다. 하지만 대사는 알아듣지 못해도 말하면서 표현하는 행동과 표정은 너무나 사랑스러워 촬영 중반에 이르렀을 때는 연신 ‘굿’을 외쳤다.
촬영하는 내내 윤 작가와 우현은 별이의 연기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리메이크 성공시킨다고 정신없었을 텐데 이렇게 신경 써주시고... 너무 고마워요.”
“나는 사실 미드에 대해 자격지심 같은 게 있었어. 선진화된 시스템도 그렇고,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투자를 받는 것도 그렇고, 또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것도... 그런데 내가 만든 콘텐츠가 미국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니까 나만 좋은 게 아니라 별이도, 은하도, 지나도 생각나는 거야.”
“그래서 억지로 배역 하나 만드셨어요?”
“흐음... 억지로라기보단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고 봐야지.”
“하하하! 이제 경지에 이르셨네. 필요하다고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만들어지시고... 대단하십니다.”
그녀는 우현의 엄지척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쫌 실력 있잖아? 아하하! 어쨌든 파일럿은 분량이라고 해 봐야 꼴랑 50분 분량이야. 사흘 동안 촬영이라고 해도 고작 별이의 얼굴이 나오는 순간은 5분이나 될까?”
“5분이면 충분합니다. 아니, 차고도 넘치죠.”
“오호... 역시 야망 있는 남자라니까?”
“이왕 이 정도까지 판을 깔아주셨으니 이제는 별이에게 맡겨봐야죠. 그리고... 관계자들에게 제대로 어필만 되면...”
윤 작가가 나지막하게 우현의 말을 이었다.
“정규편성에서 별이의 분량을 요구하겠지.”
애초에 윤 작가는 이걸 노렸던 거다. 대단하다.
“왜 처음에 단역이라고 했어요? 나랑 별이는 진짜 얼마 안 나오는 줄 알았어요. 별이는 아예 대사 한 줄 없는 거 아니냐고 생각했었다니까요?”
“기대할 거잖아. 아직 아무것도 확정된 건 없어. 감독이 별이 분량을 얼마나 써줄지도 모르겠고, 정규편성은 더더욱 확정되지 않았잖아. 그런데 어떻게 ‘분량이 좀 되니까 기대 단단하게 하고 와’라고 말해? 그냥 단역이니까 관광하는 셈 치라고 말해야 서로가 편하지.”
맞는 말이다. 윤 작가가 그렇게 말했기에 우현도 가벼운 마음으로 올 수 있었다.
“그럼 이제 촬영 끝나고 나면?”
“5월이야. 5월에 결과가 나올 거야. 뭐... 나는 이거 끝나면 바로 한국으로 뜰 거지만.”
[288]< 이것도 운명이다(1) > 끝
ⓒ 영완(映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