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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6]< 내 마음대로(4) >
이렇게 공교로울 때가 있나? 마치 일부러 기다렸다는 듯이 ‘변호사들’보다 1, 2주 앞으로 땡겨 방송하니 말이다.
‘변호사들’ 같은 경우는 양 국장과 협의가 끝난 후 바로 편성확정으로 보도자료를 돌렸다. 아직 기간이 많이 남았지만 미리 편성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이 드라마 홍보에 있어 중요한 단계이기 때문이다.
특히 시즌1에서 시청률 20%의 대박을 낸 작품이기 때문에 시즌 2의 편성확정 기사는 여느 편성 기사보다 조회수나 댓글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많았다.
방송사측에서는 네티즌들이 편성기사만으로도 이렇게 흥분하고 있으니 벌써부터 방영이 기다려진다며 굉장히 기대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편성기사가 나가고 며칠 지나지도 않아 MBS에서 김은선 작가의 차기작을 ‘변호사들’ 시즌 2의 앞에 꽂아버렸으니...
지이잉...
핸드폰을 보니 양세종 국장의 전화다. 마침 딱 전화를 거는 걸 보니 그도 기사를 본 게 틀림없다.
“여보세요?”
“야, 김 대표야. 너 MBS 기사 봤냐?”
“김은선 작가 기사요?”
“봤구나. 이거 어떡하면 좋냐? 지금 난리 났다. 너 알고 있었냐?”
목소리를 들어보니 그냥 가볍게 묻는 게 아니었다.
“전에 국장님하고 시즌 2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난 다음에 이재호 작가랑 시놉시스 관련해서 이야기하다가 말이 나온 게 있긴 했어요.”
“그래? 무슨 이야기?”
“김은선 작가가 MBS 국장하고 만났다는데, 작가들 사이에서 들리는 말이 김은선이 우리 잡으려고 한다는 소리가 나돈다고 하대요? 이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가 없어서 그냥 있었죠.”
“인마! 그런 이야기가 있었으면 진즉에 나한테 이야기하지 그랬어?”
양 국장의 짜증 섞인 버럭에 우현은 미안함을 느끼며 살살 달랬다.
“진정하세요. 그리고 그 때는 그게 진짜인지도 몰랐는데 뭐 하러 미리 걱정합니까? 안 그래도 걱정 많으신 양반이...”
“이제 어쩔 거야? 다른 드라마면 그냥 부딪쳐 보겠는데 이건 이야기가 달라.”
양 국장의 걱정도 이해가 간다. 우현과 논의하면서 ‘변호사들’ 시즌 2에 대해 양 국장이 넘겨준 게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출혈을 감수하면서까지 외주제작에 대한 계약을 진행했는데 만약 김은선 때문에 시청률이 생각만큼 안 나오면 양 국장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 써야 한다.
방송사 입장에서 시청률은 상당히 민감하며 중요한 문제다. 같은 10시 드라마라고 하더라도 그 드라마의 시청률에 따라 광고 단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15초짜리 하나의 단가가 어떤 드라마는 천만 원이고 어떤 드라마는 천오백만 원, 이런 식이다. 때문에 시청률에 따라 방송사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은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동시간대에 김은선 드라마와 ‘변호사들’ 시즌 2가 붙었을 때, 광고주들 입장이라면 같은 광고 단가라고 가정했을 때 당연히 김은선 드라마 앞에 광고를 넣기 희망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KBC로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단가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
“아직 캐스팅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으니까 일단 기다려보자구요.”
아무리 편성을 확정지었다고 해도 중요한 건 캐스팅이 잘 되느냐다. 특히 주연배우 캐스팅은 편성만큼이나 중요하다.
“김은선이 하는 드라마인데 캐스팅이 문제겠냐?”
“잘 봐요. 우리 입장이야 시즌 2를 준비하는 거라서 이미 스태프 거의 확보됐고 캐스팅도 착착 진행중이라구요. 그런데도 일정이 빡빡해요. 그럼 저쪽은 어떻겠어요? 아마 기사는 내보내놓고 정신없이 움직일 걸요?”
“그래서?”
“제가 초를 쳐볼게요.”
“초를 쳐? 어떻게?”
“일단 국장님도 가만히 계시지 말고 대형 기획사들 중에 이번에 김은선 레이더에 걸릴 것 같은 애들 미리 단도리 좀 해봐요.”
그제야 양 국장도 우현이 뭘 하려는지 알아챘다.
“흐음... 오케이. 알겠어.”
전화를 끊고 한숨을 푹 내쉰 우현은 지 피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아... 가서 이번에 김은선 작품 가능한 톱배우 리스트 뽑아가지고 와봐.”
지 피디도 눈치가 빨라 우현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아챘다.
“알겠어요. 회사별로 정리해서 가져올게요.”
그녀가 나간 지 대략 1시간쯤 지났을 때 다시 대표실 문이 열렸다.
“스케줄 가능한 배우들만 추렸어요. 파인프로덕션에서 각 회사로 스케줄 확인 가능여부 물어봤기 때문에 거의 정확하다고 보면 돼요.”
만약 파인엔터에서 다른 기획사에게 소속 아티스트 스케줄을 물어보면 아주 이상하게 생각하겠지만 제작사인 파인프로덕션에서 스케줄을 물어보면 캐스팅 때문이라는 핑계가 있어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거다.
“잘했어. 흐음... 별로 안 되네, 남배우 셋, 여배우 넷. 이게 다인 거지?”
“네. 다들 영화나 다른 드라마 스케줄 때문에 겹쳐서 이들밖에 시간이 안돼요.”
아무리 좋은 배역이라고 해도 이렇게 급하게 제작을 진행해버리면 배우들은 스케줄 상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이중에 누굴 고를 것 같아요?”
앞뒤 자르고 물어봤지만 지 피디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남주는 무조건 오형준, 여주는 음... 임혜진 아닐까요?”
둘 다 연기 경력이 10년에 가까운 톱스타들이다.
“오형준은 마이더스, 임혜진은 풀잎액터스네? 일단 오형준은 내가 커버할 수 있는데, 임혜진은 방법이 없겠어.”
마이더스의 백창준은 우현이 꽉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또 다른 대형매니지먼트사인 풀잎액터스는 좋은 배우들이 많고 대표도 좋은 사람이라 척을 질 수 없다.
“그럼 만약 MBS에서 오형준을 포기하고 다른 남주를 구한다면 어떡하실 거예요? 하나는 DH엔터고 나머지 하나는 일인 기획사나 다름없는 작은 회사인데...”
“하는데 까지 해보고... 양 국장이 뭐라도 해보겠지. 아, 맞다. MBS가 최근까지 파업했잖아. 소속 스태프 상태가 별로 안 좋을 텐데?”
지여울 피디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렇죠! 맞다, 맞아. 잠시만요.”
그녀가 후다닥 나가더니 10분쯤 뒤에 다시 후다닥 들어왔다.
“대표님도 아시는 것처럼 파업기간이 길었잖아요. 그래서 MBS에서 하는 대부분의 드라마는 다 외주를 줬었죠. 그동안 실력이 있건 없건 드라마국에 속한 촬영 스태프들 상당수가 파업 중에 이직했다고 해요.
파업에 끝까지 참여했던 스태프가 속속 자신의 자리로 복귀했다고는 하지만 파업 전에 비해 인력이 턱없이 모자라는 건 맞는 것 같아요.”
“남은 인력들 실력이 어때?”
“MBS가 보유한 인력들 수준이야 사실 국내 최고였죠. 사실 케이블 드라마들이 지상파를 치고 나간 지는 얼마 안 됐잖아요. 케이블 드라마를 찍은 외주제작사 스태프들이 어디에서 왔겠어요? 다들 지상파를 관두고 나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죠.”
“그럼 남은 사람들 중에 실력 있는 사람들은 얼마 없다는 거네?”
“맞아요. 알아보니 촬영, 조명, CG... 남은 사람들 중에 제대로 드라마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안 된다고 해요. A급 촬영팀으로만 꾸리면 간신히 2팀 정도 나올까?”
“딱 드라마 한편 만들 수 있을 정도네.”
“그렇죠. 어차피 모든 드라마를 다 외주를 주고 있었으니 MBS에서도 승부를 걸어볼 만했을 거예요.”
“좋아. 그럼 거기 촬영감독이랑 조명감독 접촉해봐.”
“대우는 어느 정도까지 해줄 수 있는데요?”
“최고 대우 해준다고 하고 찔러 봐.”
“알겠어요. 그런데 괜찮으시겠어요? MBS한테 선전포고 하는 격이잖아요.”
지 피디의 걱정에 우현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미쳤어? 제작사가 방송사한테 선전포고 하게?”
“그럼요?”
“적당히 으르렁대기만 할 거야. 가만히 있지는 않는다고 보여만 주는 거지. MBS도 알 거 아냐? 파인프로덕션 엿 먹이는 중이라는 거. 가만히 당하기만 하면 그게 바보지.”
“그럼 알겠습니다.”
적당히 으르렁댄다는 게 어떤 건지 그녀는 아직 감을 잡지 못한 표정이었지만 더는 묻지 않고 대표실을 나갔다.
일주일이 지나고 또 며칠이 흘렀을 때, 포털에서 김은선 작가의 신작에 대한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캐스팅 기사까지 나왔는데 지 피디의 예상대로 남주는 오형준, 여주는 임혜진으로 말이 나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MBS에서는 기대감을 뿡뿡 뿜어대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또 며칠이 흘렀을 때,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대표님, MBS의 유병세 피디님이 찾아오셨는데요?”
유병세 피디면 이번에 김은선 작가 작품 연출을 맡은 이다.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잠시 뒤, 30대 중반의 젊은 남자가 성큼성큼 대표실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우현이 앉으라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소파에 덜썩 앉고는 입을 열었다.
“김우현 대표님 되시죠?”
화가 난다기 보단 왜 저러는지 짐작이 되기에 얕은 미소를 보이며 답했다.
“네, 무슨 일로 오셨죠?”
“아무리 잘 나가신다고는 하지만 너무 하신 거 아닙니까? 멀쩡히 일 잘 하는 스태프를 이렇게 빼 가시면 안 되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드라마 촬영의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촬영감독과 조명감독을 영입하는데 성공했다. 아마 MBS 드라마국이 뒤집어졌을 거다.
“파인프로덕션은 능력 있는 사람이 더 필요합니다. 좋은 대우를 해주고 영입하는 건 당연한 일이죠.”
“그래도 이건 심하잖습니까?”
“심한 건 내가 아니라 MBS입니다. 이봐요, 유병세 피디님, 아직 상황파악이 안 됐나 봐요? 지금 누가 먼저 엿을 날린 건지 모르시는 거예요?”
“그게 무슨...”
“잘 모르겠으면 가서 드라마국장이랑 김은선 작가한테 물어보세요. 누가 먼저 싸움을 걸었는지. 그러고 나서 다시 찾아오든가 하세요.”
그제야 유병세 피디는 파인엔터와 방송사간에 무슨 사연이 있음을 알았나보다. 그 정도 눈치도 없이 무작정 달려 나온 걸로 보아 확실히 경험이 적은 피디다.
“흠, 흠...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가서 확인해보고 다시 연락드리도록 하죠.”
그가 나가고 지 피디가 들어오자 우현이 고개를 까딱거리며 물었다.
“아까 나간 그 친구... 내가 처음 보는데?”
“아... 계속 조연출 하다가 MBS가 파업하면서 연출로 올라섰어요. MBS가 단편이 없어서 예능 쪽 연출 도와주다가 얼마 전에 ‘고시원 청춘들’이라는 미니시리즈 하나 했었어요. 시청률도 나쁘지 않았는데, 아세요?”
“그래, 기억나. 하하, 웃기네. 김은선이 급하긴 급했나보다. 갓 입봉한 친구랑 작품을 찍을 생각을 하다니 말이야.”
“대본에 대한 확신이 있으니까 상관없었을까요?”
“그랬을 거야. 자신이 적어준대로만 찍어도 잘 될 거라 확신할 테니까.”
“대단한 자신감이네요.”
몇 시간 뒤, MBS 방송국 번호가 찍힌 전화가 걸려왔다. 받아보니 놀랍게도 이번에 새로 부임한 드라마국장이었다. 그는 서로 간에 오해가 있는 것 같으니 만나자고 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다.
곧바로 상암동으로 출발했다. 이런 일이 아니라고 해도 신임 드라마국장과 언젠가는 만나려고 했었기에 이왕이면 일이 잘 풀리길 바랐다.
“반가워요. 내가 이번에 국장 맡게 된 정우찬이에요.”
신임 드라마국장은 50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전임 국장이었던 최규식 국장이 워낙 나이가 많아 드라마국이 확 젊어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네, 김우현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또 뵙네요. 잘 지내셨죠?”
자리에는 신임 정우찬 국장 외에 김은선 작가도 자리해 있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우현의 인사에 고개만을 까딱하며 몹시도 심기가 불편함을 내보이고 있었다.
“누구 때문에 잘 못 지냈네요.”
“그런가요? 나랑 똑같네? 그나저나 국장님, 이번에 김은선 작가님이랑 드라마 하신다면서요? 이야... 취임하시자마자 대박 나겠네. 축하드립니다.”
[286]< 내 마음대로(4) > 끝
ⓒ 영완(映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