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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 내 마음대로(1) >
“외주를 주겠대? 진짜로?”
시즌 1을 자체제작으로 만들어 대박을 낸 걸 외주를 주겠다고 결정했다면 양 국장이 상당히 큰 결심을 했다고 봐도 좋다.
“네, 어떡하시겠어요?”
“어떡하긴... 가긴 가야지. 그런데 제작비를 어느 정도나 주려나? 전이랑 비슷한 규모로 하려면 주인공 싹 다 물갈이해야 하는데...”
한국에서 시즌제 드라마를 하기 힘든 이유 중 하나가 비로 비용문제다. 두 번째 시즌에 들어가게 되면 필연적으로 주연배우들에게 월등히 오른 출연료를 보장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유명 시트콤인 ‘프렌즈’ 같은 경우는 마지막 시즌에 주연배우들 출연료로 회당 10억여 원이 나갔다고 한다. 배우가 6명이니 회당 출연료로만 60억이 나간 거다. 여기 출연자 중 제니퍼 애니스톤은 지금까지도 프렌즈 등의 로열티로 여배우 수입 상위권에 지속적으로 이름을 올려놓을 정도다.
이후 프렌즈를 잇는 코믹 시트콤인 ‘빅뱅 이론’ 역시 배우들의 출연료가 회당 10억을 넘는데, 이걸 보더라도 미국 엔터테인먼트 시장이 국내와는 비교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일단 만나면 알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 양 국장한테 내일 찾아간다고 이야기해줘. 점심 전에.”
“알겠습니다.”
시즌 1의 주인공이 강소연이었기에 이왕이면 그녀와 같이 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우현은 파인프로덕션의 수장 이전에 소연의 매니지먼트를 수행하는 파인엔터의 수장이기도 했다.
그녀를 이 드라마에 합류시키기 위해서는 이전 출연료에 비해 최소 1.5배는 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녀에게 대표로서 면이 선다.
저녁이 되자 장한량의 에이전시인 신화미디어의 사람들이 머물고 있는 강남의 임페리얼 호텔로 향했다. 극비리에 입국했기 때문인지 장한량은 파인엔터를 방문했을 때를 제외하곤 호텔 밖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고 했다.
다행스럽게도 호텔의 중식당에서 만난 자리에 장한량도 모습을 보였는데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는 것이 뭔가 불만이 있어 보이긴 했다.
“관광은 잘 하셨습니까?”
“명동에서 쇼핑도 하고 경복궁도 가 봤지요. 뭐... 규모가 작긴 했지만 아기자기한 면이 있더군요.”
통역을 해주는 젊은 여성의 얼굴이 아주 미세한 변화를 보였다. 아무래도 한국의 문화재를 무시하는 발언이었나보다.
“잘 보셨다니 다행입니다. 일단 여기 계약서입니다.”
신화미디어 측은 통역뿐만 아니라 말만 들으면 누구나 다 아는 국내 대형로펌의 변호사와 대동해 있었다. 그들은 어제도 사무실에 나타나 계약서를 작성하는데 문제가 없는지 살폈었다.
그 변호사가 다시 한 번 계약서를 확인하고 문제가 없다는 싸인을 보내자 종류홍 이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김우현 대표의 능력을 믿고 투자하지만 우리로서는 무척이나 조심스럽습니다. 그래도 이미 결정된 사안이니 믿고 맡겨야겠지요.”
“우리는 좋은 파트너가 될 것입니다. 서로 간에 변함없는 신뢰가 이어진다면 말이죠.”
쓸데없이 경영권을 노리고 엄한 짓 하지 말라는 말이었는데 종류홍 이사는 우현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아챘는지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 말, 자신감으로 받아들이죠. 그 자신감이 계속되길 바랍니다.”
“아, 랜디 오 감독에게 매우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장한량 씨가 꼭 참여해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생각에 변함이 없으신가요?”
질문은 장한량을 향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종류홍 이사에게 고정한 채였다. 종류홍 이사는 장한량을 한 차례 힐끔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다행스럽게도 이 친구가 마음을 바꾸겠다고 하더군요. 아시잖습니까? 배우들은 감성이 예민하고 몇 번이나 생각을 바꾸죠. 고작 배역 문제로 시작부터 삐끗하면 앞으로 남은 일정을 제대로 소화할 수 없을 겁니다.”
장한량에게 시선을 돌리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랜디 오 감독님께는 감독님의 생각을 전부 수용하겠다고 말씀드려주세요.”
믿고 있긴 했지만 이렇게 사람을 바꾸어 놓을지는 몰랐다. 혹시 삼합회인지 하는 폭력조직 소속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분명 장한량 씨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글쎄요. 좋은 기회일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경험은 될 것 같네요.”
뭔가 단단히 삐진 것 같지만 그냥 내버려두었다. 더 건드려 봐야 좋을 게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앉은 자리에서 계약서 작성을 마치고 화기애애하게 자리를 마무리했다. 고작 말 몇 마디로 2백억 투자를 받아냈으니 대단한 일이지만 그리 기쁘지는 않았다. 앞으로 해내야 할 일이산선더미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다음 날, 랜디 오 감독에게 장한량이 마음을 바꿨다는 걸 알려주고 본격적인 제작준비에 들어갔다. 이미 스태프들은 전부 꾸려놨기에 캐스팅과 투자유치 준비에 들어간 거다.
당연히 아침에 홍보팀들이 보도자료를 만들어 뿌렸다. 파인프로덕션 지분 10%를 2백억에 신화미디어에서 매입했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기사가 나간 이후 당연하게도 전화가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홍보팀만으로는 감당이 안 돼 전 직원이 모든 일을 스톱하고 전화를 받기에 이르렀을 정도다.
전화를 걸어오는 이에는 기자뿐만 아니라 영화를 준비하는 감독들과 타 제작사들도 있었다.
점심 전에 KBC의 양세종 국장과 마주했을 때는 포털사이트 실검에 파인프로덕션이 1위로 올라선 이후였다.
“이게 누구야? 이제 엔터테이먼트 재벌이 되신 김우현 대표님 아니신가?”
“그러게 우리 회사 와서 임원 달고 편하게 일하시라니까?”
다른 이가 그랬다면 겸양을 떨었겠지만 양 국장 앞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난 인마, 돈보다 명예가 더 좋아.”
“그러다 스트레스 받아서 없는 머리 더 빠져요.”
“크흠... 안 그래도 요즘 심을까 고민하는 중이다. 어쨌든 오늘 기사 보고 놀라 자빠질 뻔했어. 어떻게 된 거야? 중국 진출하는 거야?”
“영화 하나 만들어볼라고 하는데 제작비를 딱 견적 뽑아보니까 이게 장난이 아니더라구요. 이걸 접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중국 투자받고 제대로 해보자고 마음 먹었죠.”
“견적이 얼마나 나왔는데?”
“3백억이요.”
양세종 국장은 잠시 입을 벌리고 미친놈 보듯 우현을 바라보았다.
“여기가 무슨 헐리우드냐? 3백억짜리를 만들게? 너 그러다 한방에 훅 간다.”
이런 반응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헐리우드 한 번 돼 보죠 뭐. 원래 인생이라는 게 한 방 아닙니까? 그건 됐고, ‘변호사들’ 시즌 2, 우리한테 준다면서요?”
“작가를 네가 데리고 있잖아. 너도 알다시피 요즘 케이블 때문에 시청률이 안 따라올라 와. 그러다보니 광고가 밀려. 우리 입장에서도 시청률 20%를 내줄 작품만 확실히 있다면 일단 밀어줘야 한다는 분위기야.”
“좋아요. 외주를 주겠다고 하면 우리야 좋지. 문제는 제작비를 얼마나 줄 거냐는 건데...”
양 국장은 우현의 말을 자르듯 던졌다.
“많이는 못 준다.”
“뭐야... 그럼 우리가 왜 합니까? 신인배우 쓰라는 거예요?”
“너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저야 당연히 강소연 그대로 쓰고 싶죠. 그리고 우리 작가들, 전에는 기본으로 극본료 지급했지만 이번에는 달라요. 최소 회당 천만 원을 줄 거예요.”
“회당 천만 원? 야, 그거 너무한 거 아니냐?”
“뭐가 너무해요? 이 정도는 받아야지. 솔직히 이 정도까지 퀄리티 있게 만들어 낸 게 누구 덕분입니까? 전부 작가들 덕분이지. 회당 천만 원도 많은 거 아니에요.”
“흐음... 그래도 안 돼. 우리가 줄 수 있는 제작비는 회당 2억까지야.”
양 국장은 어렵게 말했지만 우현은 코웃음을 쳤다.
“그걸 누구 코에 붙입니까? 이번엔 못해도 강소연한테 회당 8천은 줘야 해요.”
평소 받는 출연료에 시즌 2 프리미엄까지 붙이면 회당 8천도 그렇게 많은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회당 8천은 너무한 거 아니냐? 아, 모르겠고 내가 줄 수 있는 건 회당 2억, 대신 판권 넘기고 PPL 수수료도 포기한다. 어때?”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판매대행도 우리가 합니다.”
“어? 야, 그러면 우린 뭐 먹고 사냐?”
“16회 기준으로 고작 32억 투자해서 해외판매 수수료까지 먹겠다구요? 그거 얼마 한다고 그것까지 먹겠다고 그럽니까?”
“나 좋으라고 그러냐? 이 바닥에서 그거 안 챙겨주면 말이 많아요. 알잖아? 그거 윗선에서 다 나눠먹으려고 회사 만들고 한 거... 우리는 딱 광고수익만 먹으라는 말이야?”
보통 외주제작사에서 만든 드라마는 방송사에서 투자받은 것만으로는 들어간 제작비를 다 회수하지 못한다. 때문에 PPL을 받는 것이고 해외 수출을 하는 것인데 막상 해외 수출을 한다고 해도 외주제작사들이 가져가는 돈은 그리 많지 않다.
예를 들어 10억에 드라마를 판다고 가정할 때, 대략 20%정도를 판매대행사에 수수료로 지급한다. 각종 세금을 제외한 나머지 금액을 방송사와 제작사가 50/50으로 나누는데 수수료 금액까지 더하게 되면 결국 판매대금의 절반 이상을 방송사가 가져간다고 보면 된다.
또한 이 PPL 수수료도 웃긴 부분인데, 제작사에서 몇 건 이상의 PPL을 받으면 그 이후부터 받는 PPL수익의 30~40%를 방송사에 줘야하는 계약이다.
지금 양세종 국장은 32억 투자로 광고료 수익과 해외수출시 대행수수료만 먹겠으니 나머지는 네가 다 가져가라는 말이었다.
“광고수익이 얼마 안 되는 것처럼 말씀하시네. 그거 시청률만 잘 나오면 16회 기준으로 100억도 바라볼 정도로 수익이 나오잖습니까? 게다가 시즌 1이 대박났으니 1, 2회만 나가도 광고 완판 될 걸요? 제 말 틀렸습니까?”
“크흠...”
“국장님도 알죠? 원래 파인프로덕션이 영화, 드라마 수출업체였어요. 당연히 우리가 만든 드라마, 우리가 수출하는 게 맞는 거 아닙니까? 대신 드라마는 확실하게 만들어 드릴게요.”
“그래도 그게...”
“이거 회당 제작비 얼마나 나올 것 같아요? 법정물 이거 쉽게 보지 마세요. 말했다시피 강소연만 해도 회당 8천은 줘야 해요. 그럼 다른 배우들은? 최소한 시즌 1에 출연했던 주조연급 연기자들은 전보다 1.5배는 줘야 합니다.
출연료만 해도 전이랑 비교할 수가 없어요. 그걸 우리한테 다 떠넘겼으니 우리도 많이 남는 거 아닙니다.”
이 정도까지 했는데도 양 국장은 쉽게 넘어가주지 않았다.
“너 이번에 중국에서 지분 투자 들어왔으니 우리가 시즌 1만 중국에 싸게 풀어주면 너 시즌 2 파는 거 일도 아니잖아?
지금 중국에서 회당 2억 5천 부르고 있는데 우리 측에서는 3억 이하로는 안 된다고 하고 있거든? 이거 2억 5천에 넘기면 시즌 2는 당연히 비싼 값에 넘길 수 있을 거 아냐?”
“와... 그 윗사람들 챙겨준다고 방송사에서 회당 5천을 포기하는 겁니까?”
“우리만 좋으면 되겠냐? 다들 먹고 살아야지.”
총 제작비가 50억 수준이었던 ‘변호사들’은 아마 광고수익과 각종 VOD판매, 해외 판매로 최소 150억 이상의 수익을 거둘 게 분명했다. 이래서 잘 만든 드라마 콘텐츠 하나는 엄청난 부가수익을 만들어 낸다.
“하여튼 저도 안 됩니다. 이것도 못 따내면 직원들한테 할 말이 없어요.”
“이거 따낸 외주제작사가 어디 있다고 그래?”
“방송사에서 어느 정도나 지원해주느냐에 따라 다른 거죠. 회당 2억이 뭡니까? 2억이... 하여튼 저는 계약서 지저분하게 이런저런 조항 있는 거 싫습니다. 간단하게 하자구요.”
“이야... 너 통 커졌다.”
양 국장은 우현의 배짱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그렇게 되는 걸로 알고 저는 갑니다.”
“뭐가 그렇게 되는 거야? 이러고 일어나면 어떡해, 인마!”
양 국장은 일어나는 우현의 팔을 잡고 버텼지만 이어지는 우현의 말에 스르륵 힘을 풀 수밖에 없었다.
“그럼 국장님이 만드시던가요. 작가들 모아놓고 만들면 될 거 아닙니까? 배우들도 다 새로 꾸리시고... 하여튼 저는 이거 하는 걸로 알고 있을게요. 역시 우리 국장님, 최고!”
우현은 씨익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워보였다.
[283]< 내 마음대로(1) > 끝
ⓒ 영완(映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