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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 또 다른 도전(5) >
종류홍 이사는 옆에 서 있는 중국 측 인사에게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러자 그 중국 측 인사가 잠시 대표실을 나갔다 들어왔는데 그의 손에는 기다란 상자가 하나 들려 있었다.
“혹시 마오타이주(茅台酒)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들어본 적 있다. 중국 사람들이 가장 으뜸인 술을 꼽아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택한다는 명주라고 말이다.
“그럼요. 아주 귀한 술이라고 들었습니다.”
“귀하죠. 무척이나 귀해서 뇌물로 자주 쓰일 정도입니다.”
종류홍 이사는 그렇게 말하며 그 자리에서 상자를 뜯었다. 하얀 병에 중국어로 쓰인 붉은 종이가 붙은 술병은 뭔가 투박해 보이고 고급스러워 보이진 않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 중국스러워 보였다.
“술 좋아하십니까?”
그냥 선물로 주는 줄 알았는데 종류홍 이사는 술병의 주둥이를 뜯어버리며 태연하게 물었다. 이렇게 되니 설사 못 마신다고 해도 마셔야 하는 상황이다.
“그럼요. 남자가 술을 못하겠습니까? 민주씨! 여기 종이컵 좀.”
이렇게 귀한 술이면 좋은 컵에 따라야 할 것이지만 종류홍 이사는 종이컵에 술을 따름에도 거침이 없었다. 저 독한 술을 종이컵 절반 가까이 따랐을 때는 속에서 비명이 나올 뻔했지만 다행스럽게도 거기서 더 들이붓지는 않았다.
“귀주에서 만든 15년 된 진짜 마오타이주입니다. 7000위안짜리죠.”
속으로 백만 원짜리 술을 종이컵에 따랐다는 게 무척이나 미안해졌다.
“귀한 술이군요.”
“그래봤자 2백억짜리 계약의 가치만 하겠습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우현을 빤히 바라보았다. 여기서 뺄 수 없었기에 거침없이 한 입에 털어 넣었다.
“크흠...”
비명이 나올 것 같았다. 식도가 타는 느낌이라는 게 이런 걸까? 입을 열면 마치 드래곤처럼 불길을 뿜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끝까지 입을 닫고 표정을 관리했다. 손에 쥔 종이컵이 삽시간에 구겨지는 것도 몰랐다.
종류홍 이사는 그런 우현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마오타이주를 마셨다. 마치 음미하는 것 같다고 할까? 한 입에 털어 넣어도 죽겠는데 저걸 천천히 음미하는 걸 보니 괴물처럼 보였다.
마치 맛있는 음료수라도 마신 듯한 모습의 종류홍 이사는 찬찬히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게 나의 답입니다.”
무슨 선문답 같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게 종류홍 이사의 스타일인 것 같았다. 자기가 무슨 해탈한 고승이라도 되는 줄 아는지... 겉멋만 잔뜩 들어 보였지만 어쨌든 같이 술을 마시고 화합을 다진다는 뜻 아니겠나?
“장한량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보다 확실한 그의 의중을 알기 위해 물었다. 내심 곤란한 질문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그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비즈니스라는 게 하고 싶은 일만 해서야 되겠습니까?”
이런 쿨함이라니...
“하하하! 그렇죠. 하고 싶은 것만 해서야 일이 되겠습니까?”
“그럼 모레 다시 만날까요? 그동안 관광이나 좀 해야겠어요. 우리 딸이랑 와이프 사줘야 할 물건들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지는군요.”
일어서는 종류홍 이사를 따라 문 앞까지 배웅을 나갔다.
“그럼 계약서 작성해서 모레 뵙겠습니다.”
그가 돌아가자 일단 후다닥 대표실로 올라와 랜디 오 감독을 찾았는데 마오타이주의 술병을 자세히 살피던 강상훈 피디가 답했다.
“안 그래도 올라오라고 했습니다.”
“왜요? 마시고 싶어요?”
“마셔도 됩니까?”
진심으로 마시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럼요. 나 술에 쪼잔한 놈 아닙니다. 그런데 나 아까 그거 마시고 죽는 줄 알았어요. 와... 미친 거 아니에요? 그걸 무슨 종이컵에 반잔이나 따라주지?”
“그러게요. 53도나 되는데... 괜찮으십니까?”
미친... 53도정도 되면 술이 아니라 연료 수준 아닌가?
“53도요? 어쩐지... 지금도 속이 뜨듯하고 막 몸이 노곤해지는 게 한숨 잤으면 좋겠네요.”
“흐흐. 어쨌든 잘 돼서 다행입니다. 저는 아까 장한량이 깽판쳤다는 소리 듣고 가슴이 철렁하고 식은땀이 허리까지 내려왔다니까요? 이거 전부 나가리 되는 거 아닌가 했는데 대표님은 표정 한번 안 바뀌시더라구요.”
“장한량보다는 에이전시의 힘이 더 크다고 생각했거든요.”
마침 랜디 오 감독이 조금 상기된 얼굴로 들어섰다.
“기다리셨죠?”
“왔어? 일단 앉자. 술 좋아해?”
“술이요? 갑자기 무슨 술을...”
우현은 강상푼 피디와 랜디 오 감독에게 종이컵에 술을 따라주었다.
“마오타이주라고 방금 전에 왔다간 장한량 에이전시가 줬거든. 이게 세계 3대 명주 중에 하나일걸? 맞나?”
“아시네요.”
강 피디가 대꾸하고는 웃으며 먼저 술을 홀짝 마셨다.
“크으... 좋다. 향이 기가 막히네. 이거 진짜 맞는 것 같은데요?”
“진짜겠죠. 설마 가짜를 가져왔을라고... 어쨌든 장한량이 걔는 왜 깽판친 거야?”
랜디 오 감독은 답답한 표정을 한 채 고개를 젓더니 종이컵에 담긴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어후... 이거 되게 쎄네요. 와... 장난 아닌데? 크흠... 어쨌든 처음 만났을 때는 분위기 좋았습니다. 시나리오도 한국말을 잘 하는 중국인한테 번역시켜서 그런지 굉장히 재밌게 봤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저희가 배역을 정해주지 않았잖아요?”
“그렇지. 그래도 대충 짐작할 수 있잖아?”
시나리오의 내용은, 누구도 진짜 얼굴을 모르는 국내 최악의 사기꾼이 수사망을 피해 중국에 밀항한 뒤 중국인들에게 사기를 치기 시작한다. 그런 그를 잡기 위해 한국의 검사와 중국의 공안이 역으로 가짜 다단계 조직을 만든다는 건데 속고 속이는 머리싸움이 핵심이다.
랜디 오 감독이나 우현으로서는 장한량이 맡을 역할이 사기꾼을 잡기 위해 검사와 동조하는 중국 공안을 맡아줬으면 했다.
핵심 주연 두 명에 들어가지는 않지만 그래도 주조연 중에서는 가장 중요한 배역이고 마지막 반전의 키를 쥔 인물이기에 당연히 오케이 할 줄 알았다.
“글쎄 배역이 마음에 안 든답니다. 마지막 반전에 대해서도 시큰둥해요.”
“왜? 오히려 인상 깊게 남고 좋은 거 아니야? 거기다 나쁜 역할도 아니잖아?”
한국에서 천만이 넘게 들었던 최동원 감독의 ‘도둑놈들’은 예상외로 중국에서 큰 흥행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영화 관계자들은 좋은 성적을 기대했기에 생각보다 저조한 흥행성적을 보고 당황했다는 후문이다.
이유는 대략 두 가지 정도로 보고 있는데 첫 번째는 개봉시기가 한국보다 늦었다는 거다. 이건 중국과 동시개봉을 하지 못하는 모든 영화가 가진 문제점인데, 중국은 예전 한국처럼 타국에서 영화가 개봉하면 인터넷으로 불법다운로드해서 보는 경향이 아주 높다.
결론적으로 ‘도둑놈들’이 중국에서 정식 개봉했을 땐, 영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이미 다운로드를 받아서 봤다는 것. 이것 때문에 중국은 인구 대비 영화관람객 숫자가 적다. 흥행을 위해서는 반드시 동시개봉을 해야 하는 이유다.
두 번째 이유는 중국의 문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거다. 일단 중국은 나쁜놈들이 주인공인 것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주인공이라면 선해야 한다는 것인데, 어째 정치는 그 수준인지 참 아이러니하다.
어쨌든 ‘도둑놈들’에서 중국 경찰이 나쁜놈 수족이 된다는 것이나 그런 나쁜놈을 혼내주는 것이 도둑인 것도 그렇게 좋아할 요소가 아니라는 거다. 한마디로 중국인들의 성향이 문제였다.
우현이 이 시나리오를 보고 중국시장에 진출해도 되겠다고 한 부분은 여기에 있다. 중국인들이 싫어하는 나쁜 놈들이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 중국 경찰이 나쁜놈들에게 동조하는 등의 안 좋은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건 중국 심의를 받을 때도 무척이나 중요한 문제라 어떤 부분을 봐도 통할 수밖에 없는 시나리오라고 느꼈다.
“그렇죠. 대표님 말씀처럼 그런 문제도 없을 거라고 여겼는데 글쎄 스토리를 아주 바꿔달라는 겁니다. 한국 검사 역이 더 매력적이라는 거죠.”
“그래서? 한국 검사가 중국 공안의 보조역을 맡아 달라 그거야?”
“네, 자기네 투자금이 엄청나게 들어오니까 당연히 자기가 주인공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웃기는 양반이네. 그래서?”
“안 된다고 했죠. 주인공인 한국 검사는 유은하로 정해졌고 너는 그런 유은하와 파트너가 돼는 역이라고 하니 말이 안 통한다면서 그냥 일어나서 나가버렸습니다.”
“아이고야...”
머리가 아파왔다. 이건 우현이 정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중국배우 캐스팅이 늦어지면 크랭크인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크랭크인만 안 되는 게 아니라 아예 엎어질 수도 있는 문제다. 전에도 말했지만 한국시장만 노리기 위함이면 손익분기점 천만짜리 영화를 만드는 건 의미가 없는 일이다.
“일단 기다려 보자고. 종류홍 이사가 책임진다고 했으니 일단 내일모레까지 계약서만 만들어 놓으세요.”
“알겠습니다.”
랜디 오 감독은 아직 이야기를 못 들었는지 고개를 갸웃한다.
“어? 장한량이 캔슬하면서 이번 미팅은 아웃된 거 아닙니까?”
“아니, 나랑 장한량 에이전시는 이야기 잘 끝냈어. 장한량이 판 엎었다는 걸 듣고 난 이후에 결정된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만 말라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그게 바로 돈의 논리 아니겠어? 돈이 된다고 판단한 거야. 아마 장한량이 도저히 못하겠다고 하면 다른 배우를 꽂아 넣을 걸?”
“와우... 굿! 대단한데요?”
랜디 오 감독은 그제야 굳은 얼굴을 펴며 환하게 웃었다.
“그래도 어지간하면 장한량이 했으면 좋겠는데? 걔네 에이전시에서 장한량보다 네임밸류가 높은 남자배우로 누가 있지?”
강상훈 피디가 여전히 술을 홀짝이며 답했다.
“있긴 한데 조금 애매합니다. 바로 SN엔터테인먼트 출신 연기자인 루헌이거든요. 얘가 중국에서는 엄청난 스타인데, 한국에서 미운털이 제대로 박혔잖습니까?
몸값 1억 위안짜리라 쉽게 모셔올 수도 없는데 만약 모셔온다고 해도 국내에서 좋은 반응은 기대할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루헌이 SN엔터를 나가면서 얼마나 시끄러웠나? 현재 한류스타라고 할 수 있는 K팝그룹인 ‘엑스’의 멤버였기에 국내영화에 얼굴을 비춘다면 득보다 실이 훨씬 클 게 뻔하다. 제작사의 이미지를 위해서라도 결코 안 될 일이다.
“그렇겠죠. 아무리 중국시장을 노린다고 해도 이건 한국영화니까 국내시장을 가장 우선시해야 합니다. 루헌은 안돼요.”
“알겠습니다. 일단 계약서 만들어 놓으면서 기다려보죠.”
그렇게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강상훈 피디에게서 슬쩍 술을 빼앗았다. 아무리 술을 즐겨하지 않아도 이런 좋은 술은 하루아침에 다 먹어버리기 아까웠기 때문이다. 물론 다음에 이 술병의 뚜껑을 열 때는 은하와 함께 있는 순간일 거다.
“대표님 딱 한 잔만...”
“내가 술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지금 근무중이잖아요? 술이 아까운 게 아니라니까... 크흠...”
이틀 뒤, 점심을 먹고 와 소파에 퍼져있는데 지여울 피디가 문을 똑똑 두드리고 들어왔다.
“어? 대표님 오침중이셨어요?”
“아... 밥 먹고 왔더니 갑자기 졸음이 밀려와서. 그런데 왜?”
“KBC 양세종 국장님이 한번 들어오시라고 하는데요?”
“양 국장님 안 되겠네. 내가 무슨 그렇게 한가한 사람인가? 자꾸 들어오라고 해?”
물론 농담이다. 양 국장과는 직위를 떠나 그간 마셨던 술이 있는데...
“하하, 좋은 일이니까 들어오라고 하죠. 안 좋은 일이면 전화로 통보했을 테니까.”
“좋은 일?”
오늘 저녁에 있을 미팅에서 좋은 결과를 만드는 것보다 좋을 일이 있을까?
“대표님도 아시다시피 이번 ‘변호사들’이 대박 냈잖아요?”
“설마 시즌 2를 이야기하는 건 아니겠지?”
“어? 그건데?”
우현은 손을 절레절레 흔들며 거부감을 보였다.
“안 돼. 안 되는 일이라고.”
“우리한테 외주를 주겠다고 하는데도요?”
[282]< 또 다른 도전(5) > 끝
ⓒ 영완(映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