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 내가 스타로 띄어줄게-273화 (273/301)

=======================================

[273]< 이건 음모라니까?(1) >

지여울 피디는 우현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는지 탁자를 짚으며 상체를 앞으로 바짝 내밀었다.

“대표님, 지금 하늘이 얼마나 잘 나가는지 알고 그러시는 거죠? 지금 저는 막 호박이 자기 스스로 굴러들어오는 걸로 보이는데요?”

“응, 나도 그래. 호박이 막 굴러들어왔네. 그런데 내가 호박을 별로 안 좋아해서 말이지. 어쨌든 그건 내가 알아서 처리할 거고, 지 피디는 저녁에 있을 미팅에 집중해줘.”

“그거 계약서 미리 준비해놓으란 말이죠?”

“역시 지 피디는 척하면 척이라니까.”

지 피디와의 회의를 끝내고 하늘이 기다리고 있을 작은 회의실에 들어서니 그녀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30대 중반의 여성이 눈에 띈다. 그녀가 바로 ‘우리들의 찬란했던 시절’ 시즌 1, 2, 3로 대박을 쳤던 이혜정 작가일 거다.

“어머, 안녕하세요? 김우현 대표님 맞으시죠?”

가장 먼저 이혜정 작가가 일어나 인사했고 뒤를 이어 하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김우현입니다. 일단 자리에 앉으시죠.”

셋 다 자리에 앉자 미묘한 정적이 흘렀다. 우현은 굳이 자신이 먼저 이야기를 꺼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들은 우현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주길 기대하는 것 같다.

“먼저 이렇게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죄송해요.”

하늘 대신에 이혜정 작가가 먼저 입을 열었는데, 매니저 없이 왜 그녀가 하늘 매니저처럼 저러는지는 조금 궁금했다.

“아니에요. 그냥 조금 당황스러웠거든요. 아직 작품에 대한 캐스팅을 진행하는 중도 아니기 때문에 하늘 씨랑 이혜정 작가님이 왜 찾아오셨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그러셨구나. 일단 오늘 찾아뵌 이유는요...”

우현은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하늘 씨에게 직접 듣죠.”

간혹 연예인들과 대화할 때 중간에 매니저나 또 다른 인물들이 끼어들어 대변인처럼 말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자신도 소속 연예인들을 대변해서 말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하지만 회사를 옮기거나 회사와 재계약을 하는 등의 중요한 문제는 꼭 당사자의 입을 통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나중에 어떻게 말을 바꿀지 모르기 때문이다.

167정도의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는 하늘은 보통의 여배우들처럼 아름답다기보다는 귀여운 면이 있었다.

아무래도 걸그룹 출신이기에 여배우들과 외모를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그녀만이 가진 발랄한 매력은 분명 다른 여배우들과의 차이점이다.

그녀는 잠시 이혜정 작가와 시선을 맞추다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 ‘핫칙스’와의 계약이 종료될 예정이거든요. 그래서 회사를 옮기려고... 아하하!”

어색한 웃음으로 마무리 했지만 뒤이어 들려온 우현의 물음에 자세를 바로 했다.

“하늘 씨를 원하는 회사가 있을 텐데요? 미안하지만 우리는 당분간 새로운 가수를 영입할 예정이 없습니다. 지금은 유니랑 파이브걸즈를 케어하기에도 버거운 상황이거든요.”

“전 배우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제부터는 가수 하늘이 아니라 정인주라는 실명으로 활동하고 싶어요.”

그녀는 꽤나 진지한 얼굴로 말했지만 우현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배우 역시 영입할 생각이 없어요. 다른 회사를 알아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단호한 우현의 대답에 하늘은 물론이고 이혜정 작가도 적지 않게 당황한 눈치다.

“대표님, 우리 하늘이 지금 배우로서 입지를 다지는 중입니다. 이제는 연기력도 인정받고 있구요. 벌써 지상파에서 미니 여주까지 맡았다는 거 아시죠?”

우현은 이 작가에게 그 드라마의 시청률이 5%로 마감했다는 걸 알고 있냐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늘 씨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당분간 어떤 배우도 영입할 생각이 없는 겁니다. 미니 주인공 급인 여배우를 케어할 여유가 없어요.”

“대표님, 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씀이신가요?”

거짓말이지만 이게 가장 적당한 변명이다.

“그럼요. 보니까 매니저를 따로 데리고 오는 게 아닌 것 같네요? 게다가 코디, 메이크업도 다 채용해야 하고 지하철 타고 다닐 게 아니니 밴도 마련해야 할 거 아닙니까?”

이런 말을 들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나보다. 둘 다 벙찐 표정으로 서로 눈을 맞추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이렇게 잘나가는 파인엔터가 배우 하나를 영입하기 힘들 정도로 어려운 사정인지는 몰랐네요.”

이혜정 작가는 눈빛에 노기를 띠며 항의하듯이 말했다.

“아시죠? 얼마 전에 파인프로덕션을 인수했잖습니까? 그러다보니 회사에 여유가 없습니다. 한 1년 정도가 지나면 회사에 여유가 생길 것 같은데 그 때에는 저희가 기쁜 마음으로 맞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다. 1년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놀고 있으라는 소리니까 말이다.

“어쨌든 죄송합니다.”

“하아... 알겠어요. 아... 짜증나.”

하늘은 실망을 넘어 화가 나는지 우현이 자리에 있음에도 거친 언사를 내뱉었지만 우현은 미소를 보이며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가식적인 미소가 아니라 미안한 마음이 담긴 미소였다. 솔직히 하늘이라는 친구가 톱스타의 자질을 가진 배우가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거절한 거다.

물론 소속 배우가 많아질수록 회사의 매출이 커질 테지만 신경써야할 일은 더더욱 많아질 것이기에 어떡해서든 일을 줄여보려는 수작인 거다.

점심을 먹고 난 이후, 지여울 피디가 랜디 오 감독에게 내밀 계약서를 새로 작성해서 가지고 왔다.

“아까 하늘이 그냥 보냈다면서요?”

“응, 우리 회사랑 안 맞아. 그래서 보냈지.”

“그럼 이혜정 작가는 뭐였어요? 왜 왔지?”

“보모 역할인 것 같아. 소속 그룹에서 혼자 떨어져 나오려는 게 눈에 보이더라구. 당연히 매니저도 없이 회사를 골라야 하는 상황이니까 많이 친한 이 작가가 도움을 주려고 했나 봐. 그런데 이 작가도 누굴 도와줄 짬빱은 아닌데...”

“하하하! 그래도 이제는 나름 이 바닥에서 주목받는 작가예요. 어딜 가든 말빨이 먹힐 거라고 생각했을 텐데 속상했겠다.”

“그럴 거야. 그래서 최대한 정중하게 이야기해서 보냈어.”

“대표님이 보시기에 하늘이 지금보다 더 잘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신 거죠?”

“응, 내가 보기에는 그래.”

“흐음... 나중에 이혜정 작가가 우리 배우 안 쓰려고 하는 거 아니에요?”

지 피디는 걱정스럽게 말했지만 우현은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걱정 하지 마. 어차피 이혜정 작가 작품은 내가 별로 하고 싶지 않거든.”

“정말요? 케이블에서 20%를 낸 작가예요. 김은선 작가 빼고 이런 일을 한 작가는 이혜정 작가 혼자인 거 아시죠?”

지여울 피디는 믿을 수가 없다는 듯 소파에 등을 딱 기대고 마치 괴물을 본 것과 같은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했다.

“알지, 그리고 그게 일본 만화를 상당수 표절했다는 것도 알지. 아다치 미츠루라고 알아? H2라고 아주 유명한 만화가 있는데 그 내용을 상당수 베꼈거든.”

“어? 그건 저도 알아요. 하지만 시즌 2때에 말이 많았던 거잖아요? 시청률 20%를 넘었던 시즌 3에서는 표절에 대한 논란은 없었단 말이에요.”

“표절이라는 게 중독과 같아서 한번 표절했던 작가는 또 하게 돼있어. 에피소드를 혼자 만들 능력이 안 돼서 만화 내용을 빼다 박을 정도로 베낄 정도면 작가로서는 아주 악질이라고 할 수 있지. 난 그런 작가 작품에 내 배우 쓰고 싶지 않아.”

“대표님은 가만 보면 시청률만 잘 나온다면 어떤 작품이든 다 할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까다로운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다른 회사라면 아무리 표절작가라고 하더라도 무조건 하려고 할 텐데.”

“표절이라는 건 반드시 피해자가 있을 수밖에 없거든. 누군가는 잘 나가는 그 작품을 보면서 피눈물을 흘릴 수도 있는데, 내 배우를 그런 작품에서 연기하게 두는 게 싫을 뿐이야. 어쨌든 이제 하늘인지 바다인지 하는 걔는 잊어버리자구.”

“알겠습니다. 여기 랜디 오 계약서 보면 말이죠...”

이때까지만 해도 고작 배우 영입을 거절한 게 그렇게 큰 여파를 가져오게 될지 몰랐다.

저녁에 강남의 한 곱창집에서 만난 랜디 오는 우현을 무슨 귀신 쳐다보듯이 바라보았다.

“믿을 수가 없었어요. 도대체 어떻게 맞출 수 있었죠? 아니, 7%라는 수치는 어떻게 나온 겁니까?”

우현은 그의 앞접시에 잘 익은 막창 한 점을 올려준 후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사실 이 내기는 당신한테 불리한 거였어요. 나는 오랫동안 드라마와 영화를 봐오며 대한민국 시청자들의 기호를 아주 잘 알고 있었고 캐스팅 된 배우들의 연기력과 흥행성을 판가름할 수 있었죠. 단지 시놉시스만으로는 나도 판단하기 쉽지 않아요.”

“그건 나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나는 오늘 아침 그 충격적인 결과를 보고 내내 어떻게 당신이 그렇게 근접한 수치를 낼 수 있었는지 고민했어요. 방금 말했던 부분들도 내가 고심 끝에 떠올렸던 내용들이었구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요.”

보통 제작사 대표에게 당신이라는 말은 하지 않지만 오랜 세월 외국에서 살아왔던 그이기에 이해했다.

“나머지는 내 감입니다. 그리고 나를 이 자리까지 올라오게 한 원동력이 바로 그 감이죠.”

“감? 도대체 어떤 감입니까? 그냥 7%일 것 같다?”

쉽게 넘어갈 것 같지 않아 자세히 풀어 설명해주기로 했다.

“좋아요, 일단 시놉을 보면 전생을 기억하는 남자가 현생에서 전생의 원수였던 여자와 만나 사랑에 빠진다는 건데... 어찌 보면 클리쉐를 비틀어 독특하게 보이죠?”

“맞아요. 나는 분명히 시청자들이 흥미를 가질 거라 생각했어요.”

랜디 오 감독은 살짝 흥분했는지 상기된 얼굴이었다.

“내가 봐도 시놉은 나쁘지 않았어요. 하지만 문제가 몇 가지 있었는데 일단 첫 번째가 캐스팅이었죠.

남주는 연기력이 상당하고 마스크도 괜찮아 나쁘지 않지만 하필 여주가 아이돌 출신이었어요. 시청자들은 또 다 된 드라마에 아이돌 뿌린다며 실망을 표했으니 첫 방에 좋은 성적을 기대할 수는 없죠.”

“그럼 두 번째 문제는 뭡니까?”

“작가가 아주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거든요.”

“네? 방금 시놉시스가 좋다고 하셨는데요?”

“드라마가 시놉시스대로 끝까지 흘러가면 제작사 대표나 방송곡 관계자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한국 드라마는 미국 드라마와 달리 사전제작이 아니에요. 끝을 향해 갈수록 생방이나 다름없는 시스템이 되기 때문에 날림 쪽대본이 횡행하죠.

그 쪽대본으로 끝까지 퀄리티를 유지할 수 있는 작가는 흔치 않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을 쓴 작가는 전작에도 초반에 재미있는 전개로 시청률을 끌어올렸다가 막판에 이해할 수 없는 전개로 엄청나게 욕을 얻어먹었어요.

그렇게 몇 번 데이고 나니까 시청자들도 그 작가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문제는...”

우현은 잘 익은 곱창에 소주를 곁들여 먹으며 말을 이었다.

“문제는요?”

“상대가 나빴어요. 경쟁작인 사극 ‘왕의 천하’가 좋은 몰입감을 보여주며 시청률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잖아요? 게다가 부가적으로 그 예고편은 정말... 시청자들에게 아무런 기대를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려서 말이죠.”

“그럼 시놉시스 퀄리티에 맞는 캐스팅을 했고 작가의 전작도 나쁘지 않은 상태에서 경쟁작도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면 몇%나 나왔을 것 같습니까?”

“못해도 12나 13%는 나오지 않았겠어요? 물론 캐스팅에 따라 달라지겠죠. 막말로 은하가 나왔으면 15% 이상도 나왔을 테고.”

“으음...”

그는 소주를 들이키며 우현의 말을 곱씹었다.

“자, 솔직하게 내 생각을 말하자면 감독님이 우리 회사에서 대한민국 최고의 상업영화 감독이 됐으면 좋겠어요.

헐리우드에서 제작자의 간섭을 받으며 그들이 원하는 작품을 만들어 주는 것보다 당신이 원하는 작품을 하면서 성장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물론 헐리우드의 배우를 쓰며 영화를 만들고 싶겠지만 그건 제작자의 손발을 대신할 뿐이죠. 당신의 생각과 영혼이 들어간 작품이 아니잖아요?”

“...”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합시다. 내 감을 봤잖아요? 내가 준 시나리오, 그거 대박 날 시나리오예요. 당신이 만들어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하지 않아요?”

이건 도발이나 마찬가지다. 이 시나리오로 대박을 내지 못하면 네 능력이 그것 밖에 안 된다는 말이니까.

[273]< 이건 음모라니까?(1) > 끝

ⓒ 영완(映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