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 내가 스타로 띄어줄게-272화 (27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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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 내 생각은 그게 아니었는데...(5) >

“좋은 마음가짐이군요.”

이명준 감독은 전혀 문제가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 올리며 우현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얄미워 뒤통수라도 한 대 때려주고 싶었지만 억지로 표정을 관리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나는 이 작품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마음이 생각보다 굳건해 충분히 기분 나쁠 상황에서도 전혀 흔들린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우현은 순간적으로 지나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냥 포기하고 다른 작품을 해도 될 것이고 아니라면 이 감독과 기싸움 정도는 벌여도 무방할 것인데 왜 이렇게 숙이고 들어가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열심히 할게요.”

지나는 다시 한 번 이 감독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후 계약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이명준 감독은 더는 태클 걸지 않고 묵묵히 지나가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걸 바라보았다.

일단 지나가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버린 후였기에 우현 역시 이 감독에게 고개를 숙였다.

“우리 지나 잘 부탁합니다.”

“잘 해줄 게 있겠어요? 내가 무슨 힘이 있나...”

그는 우현의 인사를 본척만척하며 자리를 떠 버렸다. 열이 머리 꼭대기까지 올랐지만 참았다. 지나가 하고 싶다고 저러는데 자신이 초를 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하하, 우리 이 감독님이 조금 예민하신가 봐요. 아시잖아요? 5년을 공들인 작품이니까... 이해해주십쇼.”

박유한 팀장은 자신이 잘못한 것처럼 안절부절 못하며 연신 허리를 숙였다. 유지나 캐스팅을 강력하게 밀었던 회사의 입장에서 만약 우현이 자리를 엎어버리고 나가버렸다면 상당히 곤란했을 거다. 당연히 고마울 수밖에...

“잠깐 내려가 있을래? 팀장님과 이야기 좀 하고 내려갈게.”

지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자리를 떴다. 혹시나 계약을 파기할까봐 걱정이 됐었나 보다. 지나가 회의실을 나가자 우현이 의자에 풀썩 앉으며 물었다.

“도대체 저 인간 왜 저렇게 꼬였어요? 뭐 문제 있답니까?”

박유한 팀장은 얼른 녹차를 새로 타서 우현의 앞에 가져다놓으며 말했다.

“원래 이명준 감독은 윤혜선을 여주인공으로 쓰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윗선에서 파인엔터가 이명준 감독 시나리오에 관심을 둔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김우현 대표님이 유지나를 밀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들리자 바로 이 감독에게 푸시를 넣었죠. 윤혜선보다 유지나로 하자구요.”

그가 말한 윗선이란 투자를 결정하는 샤롯엔터테인먼트 수뇌부를 말하는 것이다.

“그건 말하지 않아도 대강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캐스팅 하다보면 이런 일 다반사 아닙니까? 투자자가 감독만 믿고 모든 걸 용인해주는 경우가 많았나요? 솔직한 말로 봉준후 감독 정도 아니면 투자자 쪽에서 캐스팅 걸고 넘어지는 거 다반사 아닙니까?”

“하하, 그게 그렇긴 한데... 이명준 감독님이 이 바닥에서 쌓은 인지도나 경험은 무시할 수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지금도 이명준 감독님은 후배들에게 상당한 존경을 받고 있으시구요.”

“아니 그럼, 그렇게 자존심이 상하면 지나를 까면 될 거 아닙니까? 내 참 어이가 없어서 진짜... 지나가 극구 하겠다고 하니 어쩔 수 없지만 정말 찝찝합니다. 아니, 내가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우리 지나가 윤혜선보다 못한 게 뭡니까?”

이건 정말 지나가 자신의 배우라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평가해도 전혀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게... 하... 이거 참...”

말할 듯 말 듯 애간장을 태우는 것이 답답해 박 팀장한테 소리쳤다.

“아 얘기 좀 해봐요! 뭐예요?”

“그게... 유지나 씨가 알아주는 글래머 아닙니까? 이게 스릴러라서 심각하고 진지한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카메라 앵글을 바스트로 잡으면 관객의 시선이 자꾸 아래로 내려간다고...”

아 정말 이걸 싫어할 줄은... 한 마디로 자신이 생각한 스토리를 여배우의 가슴 때문에 조금이라도 가리는 게 싫었다는 말이다.

“알겠습니다. 일단 현장 체크 좀 잘 해주세요.”

“아유, 그럼요. 현장 분위기 실시간으로 잘 체크하겠습니다.”

나름 항변 아닌 항변을 하고 지하로 내려가니 지나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우현을 반겼다.

“하하, 이야기 잘 하셨어요?”

“그냥 좀 투덜거린 거지 뭐. 그런데 왜 하겠다고 했어? 전에 내가 이거 소개시켜줬을 때는 이렇게까지 적극적이지 않았잖아?”

“그랬었죠. 분량이 많지 않아서 꼭 해야 하나 싶기도 했고... 그런데 친한 동생이 이 작품에 제작진으로 투입하게 됐거든요.”

“응? 누구?”

“이름은 말해도 모르실 거예요. 촬영팀으로 들어갔다는데 회의에서 제 이야기가 나왔대요. 그런데 거기에 있는 모든 스태프들이 저보다 윤혜선이 더 낫다고 했대요.”

“헐... 그 동생 이름이 뭐라고?”

정말 친한 동생이 맞나? 그런 이야기는 차라리 하지 않느니만 못 한 것인데...

“하핫! 걱정 말아요. 진짜 친한 동생이에요. 남자라서 질투를 느끼는 것도 아니구요. 으음... 처음 듣고 엄청 충격을 먹었거든요. 화가 나기도 하고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고... 그래서 다시 전화해서 물어봤어요. 왜 내가 윤혜선보다 못하냐고.”

“그래서?”

솔직히 궁금했다. 우현이 생각하기에 연기력, 외모, 몸매 등 어떤 것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어봤더니 그래요. 윤혜선이 착하대요. 하하, 웃기죠?”

“착하다고? 그게 다야?”

이건 무슨 쌍팔년도 이상형 찾기도 아니고 착하다고 뽑는 건 무슨 기준인가?

“네, 윤혜선이 그렇게 스태프들에게 잘 한대요. 아무리 촬영이 힘들어도 생글생글 웃고 분위기를 띄운대요. 단 한 번도 스태프를 향해 짜증낸 적이 없대요. 그래서 윤혜선과 일하는 건 일하는 것 같지도 않대요. 웃기죠?”

“그게 전부야?”

윤혜선이 착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설마 그게 이유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요, 아마 착하다고 한 건 뒤에 할 이야기 때문에 억지로 만들어 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게 뭔데?”

“제 연기력을 믿을 수 없대요. 항상 연기가 똑같아서 이번에도 어떻게 연기할지 보인다네요.”

“아... 그건 걔들이 잘 못 본건데...”

지금까지 지나의 필모를 보면 액션영화였던 ‘붉은 여우’를 제외하면 거의가 멜로영화나 멜로드라마였다. 그러다보니 극 중 연기가 진지하고 심각했으며 우는 장면도 많았다.

로맨틱 코메디를 하기 싫었던 지나는 계속 이런 작품을 선택해왔으니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제작진 입장에서 보면 비슷한 캐릭터만 하다 보니 똑같은 연기만 한다고 느낄 수 있다. 반면에 윤혜선 같은 경우는 독립영화를 찍다 스타로 올라선 경우였고 멜로와 스릴러, 로맨틱 코메디까지 다양한 장르를 섭렵해왔다. 그러니 지나의 연기력이 부족하다고 착각할 만했다.

우현이 봤을 때는 지나의 연기력은 전혀 부족하지 않다. 연기의 기초가 되는 발음이나 발성도 부족하지 않고 미세한 표정연기도 아주 자연스럽다.

“그래서 저를 돌아보니까 촬영장에서는 그냥 평범했던 것 같아요. 적당히 웃어주고 적당히 집중하고... 조금은 덜 예민하게 굴었으면 스태프들이 덜 피곤했을 거라는 생각도 들고, 조금 더 웃어줬으면 분위기가 더 살아났을 거라는 생각도 들고...”

“쓸데없는 생각이야. 스태프들에게 잘하는 것도 당연히 중요하지.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건 연기를 잘하는 거야. 그리고 넌 윤혜선 만큼 다양한 배역을 소화해본 적이 없었던 것뿐이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아까 이명준 감독이 그만 두라는 식으로 말했을 때 참고 넘겼어요. 눈빛이 그랬거든요, 어디 연기도 못 하는 게...”

“그냥 다른 영화에서 보여줘도 되잖아? 꼭 이명준 감독과 같이 일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니야?”

지나는 처음으로 밝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대표님께서 추천하신 거잖아요. 이 영화 흥행할 것 같다면서요? 이제 와서 독립영화나 작품성 있는 것만 찍을 생각 없어요. 대표님께서 흥행은 보장해주셨으니까 이 작품 찍으면서 연기만 고민할래요.”

아무 생각 없이 우기는 것은 아니기에 마음이 놓였다.

“그래, 알았다. 하지만 앞으로 나는 이명준 감독이랑 절대 일 같이 할 생각 없다. 앞으로 캐스팅 하겠다고 연락만 해 봐, 아주...”

“그러게... 내가 봐도 이 감독이 너무 쫌생이 같았어요. 우리가 이제 연예기획사이기만 한 줄 아나?”

지나는 팔짱을 끼며 여유롭게 말했다.

“그러니까. 앞으로 파인프로덕션 더 키워서 다른 제작사 작품은 하지 않아도 될 만큼 큰 영화사가 돼야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랜디 오 같은 재능 있는 감독들을 데려와 키워야 한다. 소속 배우들은 지금보다 더 늘어날 텐데 이들의 작품을 최소한 반은 자체적으로 소화할 수 있어야 하니까 말이다.

주말이 순식간에 흘러가고 드디어 문제의 그 드라마가 첫방을 내보냈다. 지여울 피디의 말로는 랜디 오 감독이 첫 방 전에 예측한 시청률은 11%였다고 한다.

우현이 7%를 예측했으니 랜디 오 감독과의 시청률 차는 4%. 어떻게 보면 큰 차이이고 어떻게 보면 근소한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긴장된 마음으로 그 문제의 드라마 1회를 끝까지 다 본 우현은 자신이 이길 거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출근 전부터 지여울 피디로부터 문자를 받았다.

[귀신! 역시 이길 줄은 알았지만 이건 정말 미친 거 아닌가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첫 방 시청률은 전국 집계 6.5%, 수도권 집계 7.2%였기 때문이다.

우현으로서도 이렇게 비슷하게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운이 좋았다. 뒤이어 도착한 문자는 우현의 마음을 더욱 즐겁게 했다.

[랜디 오 감독하고 바로 미팅 잡았어요. 오늘 저녁에 회사로 오겠다네요.]

이 날은 어찌나 출근하는 발걸음이 가볍던지 마치 날아가는 것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사무실에 들어섰는데 생각지도 못한 손님이 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 아, 예. 안녕하세요. 그런데 무슨 일로...”

민주가 미처 회의실로 안내하기도 전에 마주친 사람은 현재 걸그룹인 ‘핫칙스’의 멤버인 하늘이었다.

당연히 무대의상을 입고 있지 않았고 청바지와 보라색 블라우스 위로 무릎까지 내려오는 롱패딩을 입고 있었다.

“김우현 대표님을 만나고 싶어서요.”

심지어 매니저도 없어 보였다.

“혼자 오셨나요?”

“네. 문제 있나요?”

“아뇨, 그런 건 아닌데...”

마침 들어오던 지여울 피디도 하늘을 보고 멈칫하며 자리에 멈춰 섰다.

“일단 잠시 앉아계시겠어요? 아침에 회의가 있어서...”

“알겠어요.”

하늘이 민주를 따라 불투명한 창으로 돼있는 작은 회의실로 들어가자 우현이 지 피디를 돌아보았다.

“오늘 약속 있었던 거 아니지?”

“저도 놀랐어요. 저는 대표님이 부르신 줄 알고... 그럼 왜 왔지? 아!”

지 피디는 연신 손가락을 튕겼다.

“뭔데?”

“계약기간 끝나가서 온 거 같은데요? ‘핫칙스’가 내년 초에 계약 끝날걸요?”

흥분하는 그녀와는 달리 우현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혼자 데려와서 뭐해? 그리고 설사 네 명 다 데려온다고 해도 관심 없어. 심지어 멤버 한 명은 이제 곧 서른이라며? 그런 애들 데리고 와서 뭐해?”

“대표님, 하늘이 미니 주연급인 거 모르세요?”

잘 나가는 케이블 드라마에서 주연으로 캐스팅되며 일약 연기자의 발을 내딛은 하늘은 현재 미니 주연급 대우를 받고 있었다.

“됐어, 난 관심 없고 일단 랜디 오 감독 오늘 저녁에 온다고?”

“네, 꽤나 놀랐나 봐요. 하긴 나 같아도 놀랐겠다. 얼마나 놀랐는지 계속 ‘오 마이 갓’을 외치더라구요.”

사실 우현도 결과를 알고 나서 몸에 소름이 돋았었다. 그런데 대표실 문이 똑똑 울리더니 민주가 얼굴을 내밀었다.

“대표님, 이혜정 작가님께서 오셨는데요.”

“헐... 대박! 이혜정 작가면 하늘을 캐스팅해서 대박 냈던 작가잖아요? 어? 그런데 그 작가는 소속사가 있는데?”

어리둥절한 지 피디와는 달리 우현은 귀찮다는 듯 말했다.

“알았어요. 하늘인지 바다인지 하는 걔랑 같이 있으라고 해요. 조금 있다 나갈 테니까.”

[272]< 내 생각은 그게 아니었는데...(5)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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