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 내가 스타로 띄어줄게-270화 (270/301)

=======================================

[270]< 내 생각은 그게 아니었는데...(3) >

며칠 뒤, 다행스럽게도 이명준 감독 측에서 연락이 왔다. 유지나를 캐스팅하고 싶다는 뜻을 캐스팅 디렉터를 통해 정식으로 전해온 것이다. 은하를 고집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나본데 의외인 것은 유지나 말고도 좋은 여배우가 있음에도 지나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지나 씨가 그만큼 매력적이라는 뜻이죠.”

지여울 피디는 뭐가 문제냐는 듯 물었지만 왠지 찝찝했다.

“알지. 그걸 어필하기도 했고... 그래도 너무 쉽게 설득당한 거 같아서 말이지. 들어보니까 이거 마이더스 윤혜선한테 먼저 시나리오가 갔다고 하던데 왜 지나로 돌렸을까?”

“맞다. 이거 원래 대표님이 먼저 컨택한 거였죠? 우리한테 온 게 아니라...”

“그랬지.”

“그럼 원래부터 유지나 씨를 밀고 싶어서 컨택한 거고 이렇게 될 줄 알았던 거 아니에요? 그런데 왜 갑자기 찝찝하게 생각하세요?”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거든. 내가 유지나만 열심히 밀어 붙여서 설득시켰다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명준 감독이 은하를 꺼내들었단 말이야. 그래서 나는 은하를 거부하고 지나를 들이민 상황이란 말이지. 준 감독 입장에서 기분이 좋았을까? 그럴 리 없단 말이야. 그래서 난 반쯤 포기하고 있었어. 그런데 바로 마음을 돌려서 지나를 선택하니 오히려 내가 당황스럽네.”

“에이... 이명준 감독이 쿨한 성격이라고 생각하세요.”

“글쎄... 전에 만나봤을 때는 그런 느낌을 못 받았었는데... 어쨌든 지금 지나 좀 불러 봐. 이야기 좀 나눠봐야겠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저녁 약속 잊지 않으셨죠?”

“그럼, 당연하지.”

랜디 오 감독을 영입하기 위해 약속을 잡은 건데, 지 피디에게 어떻게 약속을 잡았냐고 물어보니 그에게는 후원자를 소개시켜주고 싶다고 하며 불러냈다고 한다. 이렇게 센스 있을 데가...

지나는 오후 늦게 나타났다. 요즘 집순이로 캐릭터를 잡았는지 특별한 스케줄이 아니면 절대 집 밖을 안 나온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지나야, 조금... 뭐랄까...”

“살쪘다구요? 알아요, 안다구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온 그녀는 체형을 가리는 펑퍼짐한 옷을 입고 왔음에도 얼굴에 통통히 오른 살은 감추지 못했다. 못해도 최소 5키로는 쪘을 거라는 걸.

“중국에서 많이 힘들었니?”

지나는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얼굴을 감싸 쥐며 말했다.

“저 진짜 죽는 줄 알았어요. 말도 잘 안 통하지, 음식은 입에 안 맞지, 한 번은 야외에서 화보촬영을 하는데 글쎄... 화장실이... 와... 그 때는 진짜로 욕 나왔어요. 진명 오빠가 대표님 대신에 저한테 욕 엄청 먹은 거 아세요? 진명오빠는 중국 갔다 와서 100원짜리 동전 크기 만한 원형탈모 생겼다고 하던데요?”

원래 매니저라는 직업이 욕받이 노릇도 하는 거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게 그렇다. 우현도 은하 한창 성질 더러울 때는 둘만 있는 곳에서 화풀이 대상이 되곤 했다.

“크흠... 그렇게 힘들었어? 그래도 돈 많이 벌었잖아. 정산 들어올 때를 생각하자. 아마 그 때 그 감정들이 눈 녹듯이 녹아내릴 거야. 아마 그 때가 되면 날 끌어안고 뽀뽀하고 싶어질 걸?”

지나가 중국에 가서 한 달여간 프로모션으로 계약한 돈은 충분히 그럴 만했다.

“그럴까요? 아직 통장에 숫자가 안 찍혀서 그런지 가슴속에 화만 가득 찼어요. 그나마 먹는 걸로 스트레스 풀지 않았으면 못 견뎠을 테니 자꾸 우려하는 눈빛으로 저를 보지 마세요.”

“뭐를? 난 전혀 우려하고 있지 않은데?”

“지금 제가 얼마나 쪘을지 걱정하고 있잖아요? 내가 모를 줄 알아요?”

하여튼 여배우들 치고 눈치 없는 친구들은 없다.

“아니야, 크흠... 어쨌든 차기작 때문에 불렀는데 이명준 감독 차기작 이야기 들어봤어?”

“어? 이명준 감독이요? 그 감독님 한 동안 작품 안 하지 않았나?”

“아는구나. 그 감독 시나리오 보고 내가 컨택했었거든. 네가 괜찮을 것 같다고 일단 말은 해놨어. 다행히 이명준 감독도 오케이 했고. 너한테 이제야 알려준 건 너 힘들었는데 괜히 안 될 수도 있는 거에 신경 쓰지 말라고 말 안 했던 거야.”

“하긴 괜히 힘만 빼고 안 되면 속만 상하죠. 감독님이 오케이 하셨다니까 까일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거죠?”

“그렇지. 일단 네가 좋으면 나도 계속 진행해보려고. 이명준 감독이 오랫동안 준비한 작품이고 시나리오 보니까 나쁘지 않더라. 흥행은 기대해도 되겠어. 단지... 조금 걸리는 게 있다면 네가 맡은 배역이 좀 작아.”

지나는 탁자 위에 올려진 트리트먼트를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흐음... 진짜네. 조금 작긴 하구나.”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명준 감독은 은하를 원했어.”

은하를 원했다는 말에 지나가 순간 움찔했다. 그렇게 솔직하게 말할 줄은 몰랐을 거다. 지나는 거기에 대해서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

“은하로서는 이렇게 작은 배역을 할 이유가 없었어. 하지만 지나 너는 다를 거라 생각했지. 배역이 작긴 하지만 넌 아직 영화로 큰 흥행을 맛 본 적이 없으니까. 그래서 배역이 작아도 너를 추천한 거야. 한 번쯤 큰 흥행을 맛 본 배우와 아닌 배우는 차이가 있으니까.”

“그건 알고 있어요. 그래도 이렇게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시면 어떡해요? 저 조금 섭섭하단 말이에요.”

섭섭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일 거다. 여배우 자존심이라는 게 머리로 이해한다고 쉽게 수그러드는 게 아니니까. 어찌 보면 지나가 착한 거다. 은하였다면...

“미안. 그래도 최소한 내가 어떤 의도로 이 작품을 너에게 추천했는지는 네가 정확히 알았으면 했어. 그래야 어떤 일이 생겨도 제대로 대처할 수 있으니까.”

“네?”

그녀는 우현이 하는 말을 다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우현은 굳이 더 이해시켜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이해할 수 있을 거다.

“뭐, 중요한 건 흥행이 필요한 너에게는 딱 맞는 작품이 될 것 같다는 거야. 당연히 네가 싫다고 하면 다른 작품을 찾을 거니까 너는 부담 없이 할 건지, 말 건지만 결정하면 돼. 어때?”

지나는 입술을 깨물며 시나리오를 다시 한 번 천천히 읽어보았다. 그러다 결정했는지 입을 열었다.

“하죠, 뭐. 아... 이제 야식 먹는 것도 끝났네.”

“그래, 좀 빼야겠다.”

“알았거든요? 그래도 일주일은 시간을 주세요. 어느 정도 사람 꼴은 하고 나가야 하니까.”

“일주일 가지고 되겠어?”

“부족하죠. 그래도 대충 메이크업이랑 옷으로 가릴 수는 있으니까, 그 때 제작진이랑 미팅 잡으시면 될 것 같아요.”

“그래, 내가 그쪽에다가 오케이 싸인 보내 놓을게. 그리고... 너무 마음 상해하지 마. 내 마음 알지?”

“그럼요. 만약 다른 사람한테 그 이야기를 들었으면 많이 화가 났을 거예요. 미리 이야기해줘서 고마워요.”

지나가 이해해주니 다행이다. 말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지나의 말처럼 그 이야기를 이명준 감독이나 다른 이에게 처음 듣는다면 당황해 표정관리도 못 할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은 바로 그 뜻이었다.

지나가 가고 그날 저녁, 강남의 한 실내포차에서 지여울 피디와 함께 해물파전에 막걸리를 시켜놓고 랜디 오 감독을 기다렸다.

“저기요! 여기, 여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지 피디가 손을 흔드는 상대는 누가 봐도 훈남이라고 생각될 만큼 잘생긴 청년이었다. 진심으로 반기는 지 피디를 보니 어째 사심이 가득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안녕하십니까!”

외국에서 오래 살면 어설픈 외국물을 먹고 와 시건방을 떠는 이들이 간혹 있다. 그런 면에서 랜디 오 감독은 잘생긴 인상만큼 예의도 발랐다.

“이거, 더 좋은 곳에서 대접해드리고 싶은데...”

“아닙니다. 미국에 있을 때, 드라마나 영화를 많이 봐서 파전에 막걸리를 먹어보고 싶었거든요. 날씨도 우중충한데 딱 맞지 않습니까? 원래 한국에서는 날씨가 안 좋으면 파전에 막걸리를 먹는다면서요?”

“하하, 맞습니다. 날씨가 딱 막걸리 하기 좋은 날이죠.”

이후 막걸리 잔이 몇 번 돌고 나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미국으로 돌아가서 작품을 준비하실 계획이시라구요?”

“네, 이것 좀 보시겠어요?”

랜디 오 감독은 미리 준비한 시나리오와 콘티를 우현과 지 피디에게 보여주었다. 일단 우현이 투자자인줄 알고 온 이상 그것을 무시하지 않고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내용은 평범한 가정의 남편이 실수로 핸드폰이 바뀌면서 위험한 첩보작전에 말려들게 되는 스릴러 영화였다. 배경은 당연히 미국인데 내용 자체가 상당부분 CG처리가 필요하고 수많은 엑스트라가 필요해 엄청난 제작비가 소요될 것으로 예상됐다.

“스케일 크시네요.”

“조금 그렇죠?”

본인도 그걸 인정하는지 쑥스러워한다. 아무래도 상업영화에 첫 발을 내딛는 감독이니 쉽사리 투자 받기 어렵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자리까지 나왔겠지만.

“아시겠지만 아직 상업영화에서 어느 정도의 성과를 내본 적이 없으시기 때문에 헐리우드에서 이걸 제작한다는 건 힘들 겁니다.”

“...”

“본인도 아시죠? 단편영화로 상당히 주목받고는 있지만 헐리우드는 쉽사리 도박을 하지 않아요. 자기들만의 기준을 세우고 거기에 맞는 진행을 원하죠.”

어찌 보면 한국의 대표 영화투자자이자 제작사인 CS그룹보다 더 한 곳이 바로 헐리우드다. CS감성이라는 것도 사실 대한민국에서 통하는 흥행코드의 일부분이기에 자신들의 돈을 지원받아 만드는 영화는 자신들의 공식을 지키도록 유도하는데 이것 때문에 CS를 욕하는 감독과 관객들이 상당하다.

반면에 헐리우드는 제작자가 감독의 연출에 한국보다 훨씬 더 깊숙이 관여하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서슴없이 칼질하고 감독을 교체해 버리는 일도 빈번하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

“그러지 말고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우리가 랜디 오 감독이 만들 영화를 제작해드리죠. 대신 본인의 능력을 증명해 준다면요.”

“능력을 증명하라구요?”

“상업영화에 대한 감각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야 투자를 받고 제작을 해드릴 수 있죠. 아무런 근거도 없이 수백억을 투자해 달라는 말은 아니죠?”

바보가 아니라면 그게 얼마나 황당한 요구인지 알 수 있을 터였다.

“그건 맞습니다만... 그럼 어떻게 증명하면 될까요?”

지여울 피디는 가방에서 시나리오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지금 보시는 시나리오는 우리가 충분히 검토하고 상업적인 성공을 자신하는 작품이에요. 마침 이걸 만들 수 있을 만한 감독을 찾고 있었죠. 랜디 오 감독님이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데... 어떠세요?”

랜디 오 감독은 지 피디가 건네준 시나리오를 쉽사리 열어보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시나리오 작가를 통해 데뷔하라는 말인가요? 이건 좀...”

“왜요? 자존심이 상하나요?”

우현의 직설적인 물음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건 제 자존심 문제이기도 해요. 아무리 상업영화를 지향한다고는 하지만 데뷔 때부터 남의 시나리오를 가지고 뜨기는 싫습니다.”

괜한 변명으로 시간 낭비하고 허세를 부리는 것보다는 솔직한 모습이 보기 좋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솔직하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하네요. 그럼 헐리우드에서 성공하기를 빌겠습니다.”

우현이 더 설득하는 걸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버리니 랜디 오 감독은 떨리는 눈동자로 바라보기만 했다. 이에 눈치 빠른 지여울 피디가 우현의 소매를 잡고 매달리듯이 말했다.

“대표님, 헐리우드에서 시나리오 하나만 가지고 상업영화로 데뷔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아시잖아요? 잠깐만 앉아보세요.”

우현이 못이기는 척 자리에 앉자 지 피디가 랜디 오 감독에게 특유의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감독님, 나랑 내기 하나 하실래요?”

이번에는 우현이 놀라 지 피디를 바라보았다. 뭘 하려고...?

[270]< 내 생각은 그게 아니었는데...(3) > 끝

ⓒ 영완(映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