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 내가 스타로 띄어줄게-269화 (269/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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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 내 생각은 그게 아니었는데...(2) >

“제가 물어보니 그건 대표님을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거예요. 지금 지나 씨를 밀어보려는 상황에서 무작정 거절하기도 뭐하고... 일단 대표님께 여쭤보겠다고 하고 스톱시켜 놓은 상황인데, 어떡할까요?”

어떡하긴... 만나서 이야기 하는 거 말고는 방법이 있을 리 없다.

“그렇게 해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날 부르지? 괜히 쫄리네.”

“하핫! 대표님 카메오 출연 요청하는 거 아니에요?”

“지 피디는 모르겠구나. 내가 은하 처음 키울 때 단역 하나가 펑크를 낸 적이 있었거든. 그 때 내가 분장을 하고 대신 들어갔는데 NG를 열 번을 내고 감독한테 욕을 어마어마하게 먹었었잖아. 그 다음부터는 절대 카메라 앞에 안 서.”

“도대체 무슨 역을 하셨길래 그래요?”

“조폭한테 한 방에 나가떨어지면 되는 씬이었거든. 카메라도 스치듯이 지나가는 거라 가볍게 하면 된다고 감독이 그렇게 얘기했는데도 이상하게 긴장되더라고. 그래서 할 때마다 물속에서 헤엄치는 것처럼 허우적대다 촬영 2시간을 말아먹었지. 나 때문에 은하가 고개도 못 들었잖아. 아... 그 때 생각하면 아직도 등에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아.”

“하하하! 대표님이 그런 흑역사를 가지고 계신 줄은 몰랐네요. 어쨌든 약속 잡을게요. 제발 대표님을 캐스팅하고 싶다는 말은 안 해야 할 텐데요, 하하!”

“내말이...”

지 피디와 농담을 주고받으니 이명준 감독이 자신을 부른 것도 별 생각 없이 그냥 넘어가게 됐다. 어쩌면 지금 한창 ‘미다스의 손’으로 주목받고 있기 때문에 시나리오를 더 다듬고 싶어 부른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며칠 뒤, 충무로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이명준 감독은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요즘 가장 유명하신 김우현 대표님을 만나게 되는군요.”

이명준 감독은 카키색 벙거지 모자를 쓰고 왔는데 상당히 잘 어울려보였다. 그리고 적당히 다듬다 만 수염은 감독이라는 직책에 더해져 중후한 멋을 풍겼다.

“그냥 부풀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캐스팅 디렉터를 통하지 않고 바로 저를 만나자고 하신 이유가...?”

보통 캐스팅을 하고자 할 때는 제작진의 캐스팅 디렉터가 누구를 캐스팅하고 싶다고 회사로 연락해 오는 것이 기본이다. 이렇게 회사 대표를 직접 만나자고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캐스팅 디렉터를 통해 캐스팅 요청을 하면 무조건 거절을 하실 것 같아서요. 그래서 실례를 무릅쓰고서라도 이렇게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어... 누구를 쓰고 싶어서 그러시는지...”

“유은하 씨를 캐스팅 하고 싶습니다.”

“네? 은하를 쓰고 싶다구요?”

“맞아요. 내가 솔직히 유은하의 연기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뢰하지 못했는데, ‘지옥도시’에서의 그 히스테릭한 연기는 무척이나 인상적이었거든요. 꼭 유은하와 같이 하고 싶은데...”

어째 불길하더라니... 하긴 그의 말처럼 캐스팅 디렉터가 유은하를 쓰고 싶다고 연락해 왔으면 단박에 거절하고 이 자리에 나오지도 않았을 터였다.

“죄송하지만 은하는 다른 작품을 검토중이라 힘들 것 같습니다.”

괜한 오해의 여지가 생길 수 있으니 거절해야 할 때는 단호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다시 한 번 생각해주시죠. 비록 역할은 작지만 은하의 연기 인생에 있어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좋은 선배 연기자들에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겁니다.”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연기력이 출중한 선배 연기자는 꼭 이명준 감독의 작품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은하가 이제 막 떠오르는 신예도 아니기에 연기지도를 받을 군번도 아니다.

은하 정도 되는 톱스타는 아무리 대단한 감독과의 작업이라도 서로간의 생각을 교환하고 의견을 조율할 뿐, 감독에게 직접적인 연기 지도를 받지 않는다.

단순히 톱스타라서가 아니다. 은하의 연기경력과 관객동원력을 인정하는 거다. 진정 좋은 감독이라면 설사 아역연기자라고 할지라도 연기지도보다는 아역의 생각을 들어주고 그 아이가 연기를 편하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에 주력할 뿐이다.

한 마디로 은하에게 좋은 경험이 되니 출연하라고 하는 건 감독의 오만일 따름이다.

“물론 이명준 감독님이 너무 훌륭하신 감독님인 것도 알고 좋은 기회인 것도 알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조율중인 작품이 있어서요. 죄송하지만 은하는 힘들 것 같습니다.”

“흐음... 이거 참...”

이명준 감독도 알고 있을 거다. 우현이 하는 변명이 거짓말이라는 걸. 정말 조율중인 작품이 있다면 해당 작품이 어떤 것이지 말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작품을 할 생각이라는 대답은 이 바닥에서 가장 많이 하는 변명이다.

“그러지 말고 다른 친구는 어떻습니까?”

은하는 안 되지만 지나에게는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이다.

“나는 처음부터 유은하를 생각했어요. 다른 친구는 내 머릿속에 없습니다.”

이걸 답답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생각이 없다고 해야 하나? 그렇게 유은하를 쓰고 싶었으면 배역을 늘려주던가 해야지...

“그러지 말고 생각을 바꾸시죠? 유은하는 이 작품을 할 수 없으니까요.”

“흐음... 이왕 이렇게 됐으니 유은하와 이야기를 한번 했으면 하는데... 자리를 마련해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이제는 은하에게 씨라고 붙이지 않는 것도 거슬린다.

“감독님, 제 이야기를 허투루 들으신 모양입니다. 유은하는 이 작품 하지 않아요. 아시겠어요?”

“크흠...”

정색하고 단호하게 답하니 그가 불편한 얼굴로 헛기침을 한다. 새파란 연예기획사 사장에게 이런 취급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억울한가본데 그렇게 억울하면 봉준후 감독처럼 세계적인 거장이 되든가...

“유지나 어떠세요? 지나도 얼마 전에 ‘미씽유’ 하고 톱 찍은 거 아시죠? 지금 한달 동안 중국에서 온갖 프로모션과 CF찍고 왔습니다. 반응 좋아요. 내 배우라서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연기력이 딸리는 것도 아니구요.”

“유지나라...”

“나쁜 선택 아닙니다. 어떤 연기자와도 케미가 나오는 친구예요. 밝은 얼굴, 처연한 얼굴, 표독스럽게 달려드는 얼굴 다 있는 친구예요. 베이글이라는 것에 가려져 있어서 그렇지. 솔직히 지나가 지금보다 조금만 더 크면 이렇게 작은 역할 안 맡길 겁니다.”

“이거 참... 완전히 틀어져버렸네, 완전히 틀어졌어.”

그는 앞에 놓인 차를 단숨에 들이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생각하시고 연락주시죠.”

“그럽시다.”

기분이 단단히 상했는지 몸을 휙 돌려 사라져버렸다.

“아... 그냥 자기가 무슨 세계적 거장이야, 뭐야. 더럽게 가리네. 출연료도 제대로 안 쳐줄게 뻔한데 무슨 배짱이야, 진짜.”

어이가 없어서 혼잣말로 지껄이다 사무실로 돌아왔다. 돌아오니 지여울 피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현을 찾아왔다.

“어떻게 되셨어요? 이명준 감독이 지나 씨랑 하겠대요?”

“아니, 글쎄 은하를 달라네?”

“네? 유은하 씨를 달라고 했어요? 이명준 감독이 양심이 없네. 꼴랑 그 배역으로 유은하를 데려가려고 하고...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어쩌긴, 지나를 들이밀고 싫으면 어쩔 수 없다고 했지. 잘 생각해보라고 했어. 자기 나름대로는 기분이 상했는지 인사도 제대로 안 받고 가더라구.”

“흐음... 이명준 감독이 자존심 세기로 유명한데, 그래서 5년 동안이나 작품을 못 했나 봐요.”

“그런 것도 있고, 원래 이 바닥이 감독 나이가 오십줄에 이르면 제작사에서 작품을 잘 안 하려고 하잖아. 그래서 오래 걸렸을 거야.”

언제부터인가 나이든 감독들의 작품이 흥행면에서 참패를 겪으며 나이가 많은 감독들은 요즘 시장에 대한 감이 떨어진다는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나이든 감독들은 점차 작품을 하기 힘들어졌다.

“그렇긴 하죠. 아, 이재호 작가님 시나리오 판권 계약하셨잖아요? 그럼 감독을 누구로 하실 생각이세요?”

“글쎄다. 아직 정하지는 않았는데?”

“그럼 랜디 오 감독 어때요?”

“랜디 오? 그게 누구야?”

들어본 적이 없는 감독이다. 지 피디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으며 태블릿 PC를 꺼내 동영상 하나를 틀어주었다. 그것은 단편영화였는데 외계인을 추적하는 10대 소년들의 이야기였다.

촬영기법이 한정적이고 특수효과도 거의 없이 인물간의 대화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품으로 찍은 것 치고 상당히 잘 만들었다 싶었다.

“뭐야? 우리나라 사람 맞아?”

영화에 나온 주연들과 배경이 한국이 아니었다. 이름을 들어보면 교포 같은데...

“대한민국 사람 맞아요. 중학교 때 미국으로 유학 갔다가 영화를 만들고 싶어서 대학 때 만들어 본 거래요.”

“초저예산으로 만든 것 같아서 그럴 것 같긴 했어. 그런데 왜 헐리우드에서 안 크고? 우리나라보다는 훨씬 여건이 좋을 텐데?”

헐리우드가 투자받기도 힘들고 시스템이 복잡해서 그렇지 일단 이 정도 재능을 보여줬다면 못해도 몇 년 안에 그의 이름으로 작품 하나는 내보였을 거다.

특히 헐리우드 영화판은 인종차별보다 흥행력을 더 중시하기에 재능만 있다면 한국보다 훨씬 더 좋은 조건으로 시작할 수 있었을 거다. 단지 그게 실패했을 때는 다시 재기하기 힘들겠지만.

“개인 사정으로 한국에 잠깐 들어온 상태예요. 그래서 이야기나 한번 걸어보면 어떨까 해서...”

“그걸 어떻게 알았어?”

“하핫! 사실 그게요... 강상훈 피디님이랑 아는 사이더라구요. 어제 강 피디님이랑 저녁을 먹는데 나이가 서른도 채 안 되는 젊은 남자랑 같이 온 거예요. 누구냐고 하니까 랜디 오 감독을 소개해주면서 능력 있는 친구라고 막 칭찬하더라구요. 강 피디님이랑 사촌지간이래요. 이제 곧 얼마 안 있으면 헐리우드에서 데뷔할 거라고 자랑하는 거 있죠?”

“아하... 하하하!”

강상훈 피디는 랜디오 감독을 끌어들여야겠다는 생각을 못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여울 피디는 제 삼자로 객관적으로 볼 수 있으니 당연히 회사로 끌어들여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거고.

“아직 신인 감독이라서 너무 큰 건을 맡기는 것일까요? 그런데...”

뒷말은 짐작할 수 있다. 단순히 영입만 하고 ‘네가 영화 만들어 봐라. 지원은 잘 해줄게’라고 하면 굳이 파인프로덕션에 있을 이유가 없을 테니까. 그럴 거면 헐리우드가 더 매력적인 거다.

블록버스터 케이퍼 무비로 데뷔할 수 있다는 것 정도는 돼야 그가 흥미를 보일 게 분명하다.

“전화번호는 알아?”

“후훗! 당연하죠. 그 자리에서 바로 번호 따버렸죠. 물론 강 피디님은 조금 다른 쪽으로 오해하시기는 했지만요.”

“강 피디님한테 미리 이야기하고 약속 잡아 봐. 괜히 이야기 안 했다가는 오해할 수 있으니까.”

“대표님도 마음에 드세요?”

“어. 싹이 보인다. 단편영화인데 사람을 몰입시킬 줄 알아. 긴장감을 유발할 줄도 알고. 일단 남의 시나리오를 어느 정도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지 알고 싶네. 그리고 자기가 쓴 게 아니면 안 하려는 친구들도 있잖아. 너무 기대하지는 말자.”

“에헤이... 대표님 지금 기대하는 얼굴인데요?”

지 피디가 검지로 우현의 얼굴을 향해 뱅글뱅글 돌렸다.

“크흠... 아니야, 나 기대 안 해. 진짜야... 진짜라니까!”

사실 기대하고 있다. 이 정도 재능 있는 감독은 회사에서 잘 키워만 준다면 앞으로 최소 10년은 회사를 먹여 살릴 거다.

[269]< 내 생각은 그게 아니었는데...(2)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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