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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 내 생각은 그게 아니었는데...(1) >
영상미가 좋기로 유명한 이명준 감독은 5년 전 작품 이후로 새로운 작품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 때 충무로 대표 감독이었고 해외 유수한 영화제를 제집 드나들듯이 드나들던 감독이었기에 그의 고전은 영화계 내부에서도 의외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응, 얼마 전에 유진이가... 유진이 알지? 마이더스에서 내 코디 중 한 명이었는데.”
“내가 그 때 네 코디를 어떻게 다 기억하냐?”
“흥! 하여튼 세심함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어. 어쨌든 유진이가 들었대. 윤혜선이 이명준 감독 시나리오를 들고 이거 괜찮은지 매니저랑 이사들한테 묻고 다녔다고.”
“그래? 우리 회사로는 이명준 감독 시나리오 들어온 게 없었는데?”
“그러니까 한 번 알아봐, 괜찮은지.”
“어차피 너 지금 ‘카운터’ 촬영 중이라 당장 힘들잖아.”
“일단 내가 한다고 하면 한두 달 미뤄질 수도 있는 거잖아? 알면서.”
은하는 연예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 위치를 이용해서 적절히 써먹을 줄도 안다.
“흐음... 알았어. 내가 시나리오 구해서 한 번 볼게. 내가 볼 때는 별로일 수도 있으니까 너무 기대하지는 마.”
“응. 설마 오빠가 하지 말라는데 할까봐? 나도 쪽박 날 영화는 하기 싫어.”
사실 우현이 지금까지 대박 날 작품이라고 공언한 것 치고 안 된 작품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또한 반대로 망할 작품이라고 한 것 중에 의외로 쏠쏠한 흥행기록을 낸 작품도 있었다.
아무리 모든 걸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직감적으로 가려낸다고는 했지만 배우를 볼 때도 인성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작품의 흥행을 갈라놓고는 한다.
때로는 정치적 이슈가 작품의 흥행을 끌어올리기도 하고 감독이나 배우의 행동, 또는 말실수가 흥행을 끌어내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은하도 그걸 알지만 그래도 우현에 대한 믿음이 단단하기 때문에 굳이 우현이 만류하는 작품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래, 커피는 안 마시고 갈 거지?”
“응, 지금 출발해야 안 늦어.”
은하는 일부러 우현과 점심을 먹고 싶어 일찍 나왔던 것인데 커피까지 같이 마시기에는 콜타임 시간에 늦을까 그냥 일어서야 했다.
은하를 보내고 나서 이명준 감독의 시나리오를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이미 타 매니지먼트사에 돌고 있는 것이라 그런지 이명준 감독에 대한 말만으로도 바로 작품의 제목과 내용까지도 알 수 있었다.
제대로 된 시나리오는 제작사인 샤롯엔터테인먼트에서 얻어 올 수 있었다.
“이거야? 흐음...”
우현은 지여울 피디가 건네준 시나리오를 들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시나리오의 제목은 ‘무조건 잡는다’, 퇴직한 경찰이 사설 경호업체에서 일하다가 예전 미해결 사건의 용의자를 만나게 되면서 벌어지는 추적 스릴러다.
당연히 남성 위주 영화인데 여주인공이라고 할 만한 배역은 용의자에게 표적으로 지목된 정신과 의사 밖에 없었다.
“제가 봤을 때는 은하 씨가 맡기에는 배역이 너무 작은 것 같은데...”
지 피디의 말처럼 은하가 맡기에는 배역이 너무 작다. 그런데 배역이 작다고 그냥 버리기에는 시나리오의 몰입감이 상당하고 캐릭터가 살아있다. 과연 이명준 감독이 5년간 절치부심해서 만든 시나리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아. 작긴 작은데... 그냥 버리기도 아깝고... 시나리오는 확실히 좋아. 지 피디 생각은 어때?”
“저도 시나리오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만약 은하 씨만 아니라면 적극 밀어주고 싶은데, 과연 이 정도 배역에 은하 씨가 만족할까요?”
“그렇긴 하지?”
“그런데 대표님도 아시다시피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들이 개봉 전에는 떠들썩하게 홍보하기는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성적이 괜찮기가 힘들잖아요? 사실 대표님께서 손 댄 영화만 그나마 흥행에 성공했고 그 외에 여자가 주연을 맡은 영화들은 거의가 참패하는 상태라...”
말을 줄였지만 뒤에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냥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거네?”
“그렇죠.”
지 피디의 말이 맞다. 작품성 있고 흥행성도 있으면서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가 나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었다.
“흐음... 일단 천천히 생각해보자구. 아, 지나는 뭐해?”
얼마 전에 중국에서 돌아온 지나의 환영 회식이 있었는데 수많은 스케줄을 소화하고 와서인지 초죽음이 되어있었다. 또한 음식이 입에 안 맞아서 엄청나게 고생했다며 혼자서 삼겹살을 3인분이나 해치우고 된장찌개에 밥 한 공기를 뚝딱 비워냈었다.
“집에서 계속 쉬고 있어요. 매니저인 진명 씨가 계속 체중 체크하고 있다고 하니까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아니... 체중 때문에 물어본 건 아니고, 차기작 생각할 때 됐잖아.”
“너무 빠른 거 아닐까요? 사실 다른 회사에 비해서 파인 엔터 소속 배우들은 쉬지 않고 작품 하는 경향이 있어서...”
“아, 그런가? 고마워. 난 내 생각만 했네. 지나 의견 물어서 천천히 가보자고. 시나리오가 좋으니까 지나한테 한번 밀어보려고 했는데, 지나가 싫다고 하면 그냥 둬.”
“아... 이걸 지나 씨한테 추천해주시려구요?”
“지나는 아직 영화로 크게 대박 쳐본 적이 없잖아. 잘하면 이거 괜찮겠다 싶은데... 하여튼 이 문제는 지 피디가 알아서 컨트롤 해.”
“알겠습니다. 그럼 은하 씨는 이 작품에서 아예 손 때게 하실 생각이신 거예요?”
“응, 아무래도 이건 은하한테는 작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출연해봤자 별로 이득이 없어 보이는 영화다. 은하 입장에서 흥행이 엄청나게 고픈 것도 아니고 이 작품으로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지여울 피디도 이 생각에 동의하는지 별다른 반박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리고는 뭔가 생각났는지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맞다. 지금 ‘변호사들’에서 전문작가팀의 가장 큰형님 되시는 이재호 작가님 있잖아요?”
“응, 왜?”
“그 분이 시나리오 하나를 써서 저한테 주셨어요. 꽤 오랫동안 써 온 작품인지 트리트먼트까지 거친 거라 손댈게 없어 보이더라구요.”
“시나리오를? 전에 작품 관련해서 다른 시나리오가 있다고는 못 들었는데?”
당시 이재호 작가가 가지고 온 시나리오는 북한 특수부대와 국정원 사이의 긴박한 첩보전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 사이 다른 작업을 하면서 또 다른 시나리오를 썼다는 게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구요. 일단 대표님께 보여드려야 할 것 같아서... 일단 보고 판단하세요.”
지여울 피디는 가방 안에서 얇은 파일 하나를 꺼내 우현의 앞에 놓아두었다.
“그래, 어차피 지금 작품 찾는 중이니까. 아, 그리고 유니는 어때?”
“공연 끝나고 계속 작업실에 박혀 있어요. 집에는 잘 때만 들어가려고 하구요. 아무래도 유니 부모님들이랑 마찰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 흐음... 이참에 독립을 시켜버리는 건 어때?”
“쉽지 않을 거예요. 지금 유니 상태를 보면 당장 하겠다고 나설 것 같긴 한데... 부모님 입장에서 허락할 것 같지 않잖아요?”
“그렇긴 하지. 이제 스무 살이니까. 그런데 자꾸 저렇게 스트레스 받으면 안 되는데...”
“저도 그게 걱정이에요. 그래서 일부러 스트레스 안 받게 지방 쪽으로 행사 좀 잡아보려구요.”
“그거 좋은 생각이다. 공기 좋은 곳으로 잡아 줘. 시간 여유 많게 잡아줘서 갔다가 맛있는 것도 먹고, 구경도 하는 식으로 말이야.”
남자 매니저랑 둘이 다닐 때였다면 혹시 모를 사고 때문에 이렇게 할 수 없었겠지만 지금은 코디와 메이크업까지 같이 따라 다니기 때문에 걱정할 게 없다.
“네, 그렇게 잡아보겠습니다.”
지 피디가 나가고 이재호 작가가 쓴 시나리오를 읽기 시작했다. 제목은 아직 미정인지 타이틀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호오... 이런 것도 쓸 줄 아나?”
전에 국정원과 관련된 시놉을 보여줬기에 이재호 작가에 대한 이미지는 장르물에 정통한 작가였지만 이번 시나리오는 조금은 다른 장르였다.
바로 하이스트 필름 또는 케이퍼 무비라고도 불리는 단체 범죄액션을 그리고 있는데 내용이 어설프지 않고 캐릭터가 살아있었다. 특히 마지막의 반전은 이미 어느 정도 반전이 있을 거라는 걸 예상하며 읽던 우현의 뒤통수를 때릴 정도였다.
다 읽자마자 바로 이재호 작가를 불렀다. 그는 강남의 오피스텔에서 단체로 작업하고 있었기에 사무실로 오는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거 언제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겁니까?”
이재호 작가가 소파에도 앉기 전에 우현이 다짜고짜 물었다. 궁금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어서 그런지 마음이 급했던 거다.
“아, 그게 사실은 제가 다 쓴 게 아닙니다.”
“네? 이재호 작가님이 다 쓴 게 아니라구요? 그럼 원래 있던 시나리오에...”
“맞습니다. 제가 트리트먼트를 더해준 거죠.”
창작품이 여러 명의 손을 거쳤다면 그것을 가공하는 제작사의 입장에서 곤란한 일이다. 판권의 지분을 명확하기 가리기 어렵고 나중에 소송의 빌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거는 원래 누구 거 였습니까?”
“제 동생이 원래 소설가가 꿈이었는데 원래 그걸로 소설을 쓰고 싶었다네요. 혼자서 이런저런 설정을 짜 놨더랍니다. 그러다가 잘 안 되면서 지금은 대기업 다니고 있어서 소설가의 꿈을 접었구요. 그런데 이 작품에 대한 미련이 있는지 저한테 이걸 잘 다듬을 수 있겠냐고 넘겨줬었어요.”
“아...”
그제야 이재호 작가가 어떻게 드라마를 하면서도 또 다른 시나리오를 쓸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이런 케이퍼 물은 설정만 탄탄하다면 거기에 살을 붙이는 정도는 숙련된 시나리오 작가라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고도 만들어 낼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보니까 설정이 너무 좋더라구요. 제가 정말 인상 깊고 재미있게 본 케이퍼 무비가 바로 ‘범죄의 재편성’인데 제 동생이 준 설정을 보니까 딱 그게 생각나더라구요.”
대한민국 최고의 상업영화 전문 감독이라고 할 만한 최동원 감독을 지금의 위치로 올린 영화가 바로 ‘범죄의 재편성’인데 확실히 이번 시나리오는 그것에 뒤지지 않을 만큼 대단했다.
“그럼 이거 시나리오만 우리한테 넘기는 거예요?”
“그러려고 합니다. 판권만 넘기고 빠져야죠. 그런데... 감독님이 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잘 좀 만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시나리오 작가에 내 동생 이름을 꼭 올리고 싶거든요. 그래서...”
대박난 영화의 엔딩크레딧에 올라가는 거랑 망한 영화의 엔딩크레딧에 올라가는 건 참여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느끼는 감정도 천지차이일 수밖에 없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하하, 그럼요. 이 시나리오 아까워서라도 제대로 만들 수 있는 감독 섭외할 겁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계약서 바로 쓰죠.”
이재호 작가를 자리에 앉혀 놓고 바로 계약서를 만들었다. 판권료는 5천만 원. 제대로 된 이력 하나 없는 작가에게 주는 판권료라고 하기에는 너무 큰돈이지만 같은 식구에게 주는 돈이라고 생각해 상당한 경력을 가진 작가급의 대우를 해줬다.
지나는 이명준 감독의 작품에 붙이고 은하를 바로 이 시나리오에 붙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 지여울 피디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이명준 감독이 캐스팅 미팅을 제안했는데요. 대표님을 만나고 싶다고...”
“나를? 왜?”
[268]< 내 생각은 그게 아니었는데...(1) > 끝
ⓒ 영완(映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