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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 달래고 또 달랜다(6) >
“뭐예요, 불안하게? 뭐 숨겨놓은 거라도 있어요?”
우현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의심스럽게 묻자 김상호 대표는 능글맞게 에둘러 답했다.
“있기는 뭐가 있어? 그냥 대승적 차원에서 물어보는 거야. 그것만 들어주면 되는 거지?”
“아, 잠깐만 있어 봐요.”
의자에 등을 붙이며 눈치를 보자 김상호 대표가 상체를 바짝 앞으로 내밀었다.
“어허, 천하의 김우현이 왜 이렇게 간이 작아졌어? 로드매니저 할 때도 고개 뻣뻣이 들고 할 말 다 하던 친구 아니었던가?”
얄밉지만 저렇게까지 나오니 더는 눈치를 볼 수 없다.
“알았어요, 알았어. 그 조건이면 오케이. 이제 숨긴 거 좀 내놔 봐요. 뭔데 그렇게 쪼고 그래요? 막상 까보니까 별거 없는 거 아니야?”
“하하하! 맞아, 맞아. 별거 없어. 우리 입장은 이래. 출연료 받고, 타이틀도 받고, 엔딩도... 뭐, 그래. 오케이. 거기에 임태식 캐릭터에 우리 애 하나 넣자.”
끼워 팔기라니... 생각지도 못했다.
“헐...”
“뭘 놀래고 그래?”
“임태식은 극의 가장 핵심 악역이에요, 알죠? 연기력 딸리면 이 작품 죽도 밥도 안 되는 거. 엄청난 카리스마가 필요한 역인데, 도대체 누굴 집어넣고 싶어서 앞의 조건 다 받아가면서까지 넣으려는 거예요?”
주연 배우 계약하면서 끼워 팔기 하는 건 계약 중에 생길 수 있는 부차적인 일에 불과할 정도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도 파인프로덕션이 제시한 조건을 모두 수용하면서 핵심 조연 자리를 원한다는 건 그 배우가 신인이거나 연기력이 딸리는 친구가 아니라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윤메이슨이라고 알아?”
“누구? 윤메이슨? 그게 누구야?”
혹시 몰라 지여울 피디에게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도 처음 듣는 이름인 듯 고개를 저었다.
“누구긴, 우리 회사 배우지. 연기력은 내가 보장해, 진짜로.”
김상호 대표의 진지한 얼굴을 보니 대충 장난으로 저러는 것 같지는 않다.
“잘못하면 작품의 퀄리티가 떨어질 수 있는 문제인 건 알죠?”
“내가 신인배우 띄우자고 우리 강준이 작품 망하게 할 거라고 생각해?”
“좋아요. 그래도 지금 이 자리에서 결정할 수는 없어요. 일단 연기 한 번 보죠.”
무작정 거부할 수만은 없다. 말을 꺼낸 이가 한 회사의 대표이니 일단 그 친구의 연기를 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는다. 물론 조강준을 자리에 앉혀놓고 계약서에 도장도 찍지 않은 채 돌려보낸다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다.
“하핫! 그럴 줄 알았지.”
김상호 대표는 자연스럽게 핸드폰을 꺼내들고는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응, 올라오라고 해.”
“허... 밑에 대기시켜놓고 있었어요? 아주 작정을 하고 오셨네.”
“시간 없다면서? 우리 강준이도 바빠. 언제 또 와서 계약서에 도장 찍고 그래? 온 김에 한 번에 끝내자.”
“좋아요. 그런데 제 성격 알죠? 적당히 넘어가는 거 없습니다.”
“내가 우리 김우현 대표님 성격을 모르겠어요? 마음에 안 들면 이야기하고, 없었던 걸로 하면 되지 뭘...”
윤메이슨인가 하는 놈의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예 계약을 깨버릴 거라는 말이지만 그게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김상호 대표의 입장에서 연기까지 보여주고 싫다고 하는데 ‘그래? 알았어. 우리 강준이만 계약하자’ 이럴 수는 없는 거니까.
단지 우현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되면 조강준과 계약을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인 상황인 거다.
우현은 지여울 피디를 향해 회의실 밖으로 나가자는 표시를 하고는 김상호 대표를 향해 말했다.
“그 윤메이슨인가 하는 친구 들어오면 잠깐 앉아있으라고 해줘요. 우리도 작전 타임은 있어야지.”
“하하, 그러던가. 설마 그쪽도 선수교체 있는 건 아니지?”
“그건 생각 좀 해보구요.”
지여울 피디를 데리고 나와 대표실로 들어간 우현은 앞에 지 피디를 앉혀놓고 물었다.
“혹시 가수들 중에 윤메이슨이라는 친구가 있나?”
“없을 걸요? 저 알죠? 웬만한 보이그룹은 멤버들 이름까지 싹 다 외우고 있다구요. 제가 모르는 보이그룹은 음방 한 번 나와본 적 없는 친구들이거나 아예 데뷔조차 못 한 연습생뿐이 없을 걸요?”
이건 또 무슨 자신감인가? 지여울 피디가 보이그룹 덕후였다니... 어쨌든 가수 출신은 아니라는 말에 일단 안심했다.
“혹시 뮤지컬 배우 출신인가?”
“일단 검색 한 번 해볼게요.”
지여울 피디가 포털에 검색했지만 윤메이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남자배우는 찾을 수 없었다.
“없어?”
“네, 아무래도 길바닥 출신인가 본데요? 아니면 순수 인맥이라던가...”
길바닥 출신이란, 연예기획사가 길거리에서 캐스팅한 신인배우를 말한다. 보통 뛰어난 외모를 바탕으로 해서 연예계에 입문하게 되는데 요즘에는 이런 방식으로 데뷔하는 친구가 별로 없다.
이유는 간단한데 요즘에는 워낙 배우 지망생들이 많아 어릴 때부터 연기공부를 하고 기본기가 탄탄히 뒷받침 된 친구들 중에 고르는 게 훨씬 이득이기 때문이다.
외모 때문에 뽑긴 했는데 연기력이 별로거나 성격이 이상한 경우도 상당 수 있어왔기에 우현의 파인엔터도 길거리 캐스팅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
“흐음... 아무것도 모르는 쌩 신인이라 그런지 무슨 대책을 세울 수가 없네.”
“연기를 잘 하기만 하면 대책을 세울 필요가 없잖아요?”
“당연하지. 그런데 만약 연기가 별로면 김상호 대표 마음을 돌려 봐야 할 거 아냐? 판이 엎어졌다고 다 포기할 수만은 없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정보가 없으니 진짜 연기를 잘 하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네.”
“그럼 들어가 볼까요?”
“그러자.”
회의실에 들어가 보니 조강준의 옆에 한 사람이 더 앉아 있었다. 그런데 윤메이슨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살짝 백인과의 혼혈기가 있어 보였다.
“이 분이...”
“안녕하십니까! 윤메이슨입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허리를 꾸벅 숙였다. 나이는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데 키는 180 조금 넘어 보였고 턱수염을 아주 멋들어지게 길렀는데 너무 길지 않아서 지저분해 보이지도 않았다.
인사말을 들어보니 한국말이 서툰 것 같지도 않아 대사를 치는 데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리고... 눈빛이 날카로워서 범죄자를 연기하는 데는 이미지 상 어울려 보인다는 게 첫인상이었다.
“반가워요. 한국에서 자랐어요?”
“고등학교 때 한국으로 와서 쭉 여기서 자랐습니다. 한국말은 문제없고 영어도 문제없습니다.”
“음... 좋아요. 일단 연기 먼저 봅시다.”
“긴장하지 말고... 잘 할 수 있어, 화이팅!”
조강준은 살짝 긴장한 듯이 보이는 윤메이슨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기운을 북돋아 줬다. 그는 심호흡으로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는 입을 열었다.
“주사위 놀이 좋아해? 응? 싫어? 아니야, 지금까지는 아니었어도 좋아해야 해. 이게 널 살려줄지도 모르거든. 일부터 오까지 나오면 넌 죽는 거야. 대신 육이 나오면 살려줄게. 어어?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마. 원래 세상이 공평하지 않은 거 잘 알잖아? 내가 시팔 x같은 집에서 태어나서 이 모양 이 꼴로 사는 걸 봐봐. 너는 졸라 금수저였잖아, 안 그래? 이제 한 번 굴려보자, 응?”
그는 이미 주사위까지 준비해가지고 와서 준비했던 연기를 마무리 지었다.
“어때?”
“...”
김상호 대표는 우현의 눈치를 보며 넌지시 물어왔다. 이에 우현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생각에 잠겼다.
생각에 잠긴 이유는 쉽게 결정이 안 나서였다. 잘 하긴 했는데, 그렇다고 엄청난 임팩트를 보여준 건 아니었고 그렇다고 아주 못 했다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연기에 대한 충분한 집중력을 가지고 있었고 발음이나 발성도 그 정도면 나무랄 데 없었다. 외모도 너무 어려보이지 않고 적당히 남성다워서 좋은데... 카리스마가 부족하다고 할까?
보통 한국에서 활동하는 혼혈배우들이 잘 생기기는 했지만 대성하기 힘든 이유가 한국말을 잘 못해서인데 이 친구는 한국말을 잘 하는 대신 사람을 끌어당기는 흡입력이 떨어진다.
“좋네요. 일단 이 친구는 내려 보내고 이야기할까요?”
“어? 어, 그래. 너는 이제 내려가. 수고했어.”
김상호 대표는 일단 우현이 긍정적인 신호를 보낸 것에 만족하고 윤메이슨을 아래로 내려 보냈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진짜? 거 봐, 괜찮다니까! 애가 딱 배우야. 내가 장담하는데 쟤 무조건 뜬다!”
좋아하는 김상호 대표는 이어지는 우현의 말에 흠칫 놀랐다.
“대신 우리도 조건을 바꿀게요.”
“뭐야, 뭔데 그래? 무섭게... 그리고 연기 괜찮았잖아?”
“괜찮았죠. 하지만 알잖아요? 조금 부족하다는 거. 설마 내가 완전히 마음에 들어서 오케이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거죠?”
“크흠... 난 좋은데...”
“아까 말한 조건은 똑같아요. 회당 6천에서 안 줄일게요. 타이틀도 당연히 우리 은하가 먼저 나갈 거고, 엔딩 비중은 절반. 여기에 한 가지 추가할게요. 만약 이 작품이 반응이 좋아 시즌제로 가게 되면 이 조건 똑같이 가야 해요.”
“어? 그건 좀...”
“이거 받지 않으면 나가리 해요. 나도 양보 못 해요.”
이제는 김상호 대표와 조강준의 얼굴에 난감한 빛이 역력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다음 시즌을 한다고 계약을 박아버리면 반년동안 완전히 묶여버릴 수밖에 없다.
막말로 큰 성공인 아니라 그럭저럭 선방했는데 제작사가 성공했으니 다음 시즌 만든다고 하면 아무 말 못 하고 할 수밖에 없는 거다.
그리고 제작사의 입장에서는 시즌제 제작의 가장 큰 걸림돌 중의 하나가 첫 시즌이 성공하고 나면 다음 시즌에 들어갈 때 주연배우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뛴다는 것이다.
얼마만큼 흥행했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정말 ‘네플릭스’에서 대박내서 다음 시즌에 돌입하게 되면 배우 측에서 회당 1억을 불러도 어쩔 수 없이 계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 제작사 입장인데 다음시즌 계약조건을 못 박아 버리면 배우 측에서는 큰 손해가 아닐 수 없다.
“김 대표야, 이건 좀 너무하다. 연기력이 아주 딸리는 아이돌 출신도 아니고, 솔직히 좋았잖아? 조금 비중 있는 캐릭터라서 그렇지 정말 나쁘지 않다고. 그런데 이렇게 다음 시즌까지 못 박아버리면 우리 강준이가 할 수가 없지.”
“다음 시즌을 못 박아서 할 수 없다구요? 대표님 너무 욕심 부리시는 거 아닙니까? 솔직히 조강준 씨, 연기 잘 하는 거 모르는 거 아니지만 지상파 원톱 주연 맡아도 회당 5천 받을까 말까인 거 아시죠? 그거 회당 6천까지 올려줘서 계약해주는 건데 이거에 관해서는 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지상파 방영이 아닌 인터넷 스트리밍이기에 대우를 더 해줬다는 걸 강조한 것이다.
“알지, 아는데...”
“게다가 다음 시즌 촬영이라고 해도 길어봤자 3, 4개월 촬영하는 거고, 그것도 회당 6천에 계약해준다는 건데... 그리고 이거 한 작품 하고 말 거 아닙니까? 그깟 한 작품 계약 똑같이 간다고 너무 몸 사리는 거 아니에요?”
“하아...”
김상호 대표와 조강준은 난처한 얼굴로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러다 김상호 대표가 결정했다는 듯 탁상을 내리쳤다.
“7천으로 하자. 다음 시즌까지... 더 이상은 안 돼.”
나름 크게 배팅했다고 생각했는지 우현의 눈치를 슬쩍 봤지만 이어진 우현의 미소에 김상호 대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진짜죠? 오케이. 난 받았어요. 물리기 없기.”
[264]< 달래고 또 달랜다(6) > 끝
ⓒ 영완(映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