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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 달래고 또 달랜다(5) >
“일단 생각하는 게, 이름을 가장 먼저 걸어달라는 거랑, 엔딩에 조강준 얼굴로 끝내달라는 거. 그리고... 아무래도 은하 씨 출연료보다 더 많은 출연료를 요구할 가능성이 있어요.”
“흐음... 그렇겠지.”
아무리 유은하가 톱스타라고는 해도 똑같은 인지도라면 남배우 출연료가 여배우 출연료보다 비싸다. 그것도 아주 많이 비싸다.
여배우 같은 경우는 최고의 톱스타라고 해도 회당 출연료가 억을 넘어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굳이 꼽자면 현재 작품 활동을 별로 하지 않는 이영아 정도? 거기에 전지연을 추가할 수 있겠다.
참고로 요새 최고 스타라고 인정받는 아이돌가수 출신 수정이 회당 3천도 받지 못하고 로코퀸이라는 공효민도 회당 4천을 받지 못하는 걸로 알려지고 있다.
반대로 남배우는 같은 인지도에 비해 더 많은 출연료를 받는데, 이건 드라마의 제작 환경 때문이기도 하다.
일단 요즘 제작 환경은 중국 시장의 영향을 무척이나 많이 받는다. 따라서 중국에 통하는 남자배우를 선호할 수밖에 없고 그들을 출연시키기 위해 출연료가 높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해당 배우에 PPL이 얼마나 붙느냐에 따라 몸값이 좌우되는 것이기에 많다, 적다를 불평할 수는 없었다. 시장경제의 원리에 따라 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은하 씨보다 더 올려달라고 하면...?”
“맞춰줘야지. 안 될 거 없잖아. 은하는 내가 잘 달래면 되고, 조강준 정도면 6, 7천 달라고 하려나? 그 정도는 줄 만한 가치가 있는 배우지.”
지 피디도 이 정도는 우현이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그럼 내일 출연계약 미팅 잡을 때, 그 정도까지는 생각해 놓을게요.”
“아, 그래도 엔딩 올라갈 때는 최소 절반 비율은 맞춰야 해. 이건 배우 자존심이 달린 거라고.”
엔딩을 모두 조강준에게 몰아줄 수는 없다. 만약 그렇게 되면 은하는 작품에서의 영향력을 모두 넘겨주는 거라고 생각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럼 타이틀 순서는요?”
“흐음... 곤란하네.”
출연료를 맞춰줄 수는 있다. 어차피 일반 시청자들이 배우들의 출연료를 아는 것도 아니니 우리들끼리만 알고 넘어가기에 자존심 상할 일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타이틀에 누구의 이름이 먼저 나오는 지에 관한 것은 시청자들이 단 한 순간에 이 드라마가 누구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지 알 수 있게 한다.
“그렇죠? 아무래도 제 생각에는 그쪽에서 그걸 꼭 집고 넘어갈 것 같은데요?”
“안 돼. 아무리 생각해도 타이틀 순서를 넘겨줄 수는 없어. 일단 출연료는 7천까지 맞춰준다고 해. 대신 타이틀은 우리가 가지고, 엔딩은 공평하게 절반씩. 이게 우리 조건이야.”
“알겠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아휴... 이제 바빠지겠네.”
“이제 본격적으로 일해야 하지 않겠어? 강 피디에게 말 들었지? 나는 보너스에 인색한 사람 아니야.”
“그럼요. 제가 그것 때문에 여기에 온 걸요? 하핫! 일단 홍보팀이랑 상의해서 기사 바로 낼게요.”
“그래야지. 조강준 소속사에서 미적거리기 전에 우리가 그냥 내버려.”
“조강준 소속사에서 아직 검토 중이라고 반박기사 낼 텐데요?”
“검토 하라고 해. 결국 미팅 끝나고 도장 찍으면 다시 확정 기사 내버리면 되잖아. 그렇게 이슈몰이라도 하자고. TV방영도 안 하는데, 그런 이벤트라도 있어야지.”
“알겠습니다. 조연들 좋아하겠어요. 지금껏 주연배우 캐스팅이 안 돼서 다른 스케줄도 못 잡고 이것만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래, 일이 생겼으니까 빨리 돈 받아야겠지. 조연들 출연료는 절대 잊지 말고 날짜 제때 챙겨줘. 그리고 단역들은 당일이나 늦어도 다음날 전부 지급하고.”
“그럼요. 회사 통장에 돈 많다면서요? 마구마구 쓸 겁니다.”
“그래, 그런 걸로 나가는 건 안 아까우니까 뒷말 나오지 않도록 관리 잘해줘.”
예전에는 단역들에 대한 처우가 열악해도 제작사에게 제대로 된 항의도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칫 항의하다가 아예 돈을 못 받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 때문에 강력한 항의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SNS가 보편화되면서 제작사에의 식사와 급여에 관한 부분이 부족한 것이 드러나면 바로 공론화가 돼 버린다.
만약 그렇게 되면 제작사로서는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제작진에 대한 문제제기는 곧 제작사가 만들고 있는 영화와 드라마로 피해가 확대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칫 시청거부나 관람거부로 이어질 수도 있고 실제 이런 문제가 불거진 적도 있기에 요즘에는 단역들에 대한 처우도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
“안 그래도 보조출연 하청업체들 제가 직접 관리하고 체크하려구요. 요즘 하청업체들에도 종종 양아치들이 있어서 잘못하다간 우리가 욕먹는 경우도 있거든요.”
“그래, 그런 부분은 직접 신경을 써.”
그녀와의 회의를 끝내고 개인적으로 잘 챙겨주지 못한 유니를 위해 야외 녹화방송에 응원차 들른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오랜만에 은하를 만나려고 했지만 자정까지 이어진 제작진들과의 회식 때문에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카운터’ 제작을 놓고 미리 의기투합하는 자리라 빠질 수도 없는 자리였다.
“어? 같이 오셨어요?”
다음 날, 조강준의 출연계약을 위한 미팅 시간에 조강준 외에 의외의 인물이 같이 들어섰다. 바로 조강준의 소속사 ‘아시아로’ 김상호 대표였는데, 우현이 처음 파인엔터의 로드매니저로 일하던 시절 회사의 상무로 있었던 사람이다.
약 반 년 정도 같은 소속사 식구였는데 김상호 당시 상무는 회사를 나가 자신만의 새로운 엔터 회사를 차렸고 그 회사의 대표 배우가 바로 조강준이었던 것이다.
당시 김상호 상무와 그리 친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빠릿빠릿하고 감각 있던 우현을 자신의 회사로 스카웃하려 했던 적도 있었다.
우현이 회사를 나와 폐인 생활을 하다 회사를 다시 세운 이후 몇 번 통화로 안부인사만 주고받았었다.
“이야... 이게 얼마만이야? 이제 완전히 대표님 다 됐네.”
40대 중반의 김상호 대표는 서글서글한 인상에 피부에 주름도 별로 없는 청년 같은 얼굴이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아 주변에서는 나이를 말하지 않으면 30대로 보기도 한다.
“말씀 하고 오시지 그랬어요?”
“말하고 오면 얼마나 준비했겠어? 나 긴장되게 말이야.”
김상호 대표는 우현의 어깨를 툭툭 치며 다정하게 말한 후 회의실로 조강준을 데리고 들어갔다.
“아이 참... 계약 준비는 잘 했어?”
난감한 상황에 지여울 피디를 돌아보고 물으니 그녀가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서류 파일을 들어올렸다.
“그럼요. 같이 들어가실 거죠?”
“그래야지. 준비 단단히 하고 온 것 같은데... 난 저 양반이 직접 올 줄은 생각도 못했네.”
“저 분 스타일이 어떤데요? 저도 김상호 대표님은 직접 만나본 적도 없고 이야기도 들은 게 없어서요.”
“생긴 걸로 보면 꼼꼼하게 다 챙길 것 같은데, 의외로 기분파야.”
지여울 피디는 우현의 찡그러진 인상을 보고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럼 좋은 거 아니에요?”
“좋게 끝나면 그럴 수 있지. 반대로 생각하면 지 꼴리는 데로 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엎어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할까?”
“아...”
“그래도 바닥부터 시작해서 저 정도까지 키워냈으니 흥행이나 배우를 보는 감각은 있는 사람이야. 그래서 더 골치 아프네. 일단 같이 참석할 테니까 먼저 들어가서 분위기 좀 봐. 어떻게 나오는지 한 번 보자구.”
“아, 옙! 제가 바람 잡는 건 또 일가견이 있죠, 하핫!”
지여울 피디는 손에 든 계약 파일을 휘휘 돌리며 회의실로 들어갔고 우현은 일부러 개인 업무를 보며 회의실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게 30분 정도를 보내고 회의실에 얼굴을 내밀었을 때, 분위기는 생각보다 좋아 보였다.
“어? 김 대표, 이제야 오나?”
여유롭게 손을 흔드는 김상호 대표를 향해 자연스러운 미소를 보여줬다.
“아이고, 제작사까지 겸하다보니까 일이 많네요. 그래도 우리 지여울 피디가 능력이 좋아 제 대신에 이런저런 일을 많이 처리합니다.”
“좋겠어. 이렇게 능력 있는 친구도 스카웃해 오고... 지여울 제작피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도마뱀 미디어’ 소속이었잖아?”
“이게 다 제 인복 아니겠습니까? 제가 서른 전까지 재복, 인복 뭐 있는 거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서른 지나니까 인복 하나는 확실히 따라오는 것 같습니다, 하하하! 유은하도 보세요. 하필 저한테 딱 오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해. 이 바닥에 들어와서 로드한 첫 연예인이 유은하였잖아. 사실 매니저들이 가장 바라는 게 그거 아니겠어? 이름 없는 연예인 바닥에서부터 스타까지 키우는 거. 캬~ 김 대표가 그 코스를 제대로 밟은 거지.”
“하핫! 제가 웬만하면 겸손한 마음을 잃지 않는데 이건 뭐... 팩트라, 아니라고 할 수가 없네.”
“하하하! 내가 이래서 우현이... 아니지, 김우현 대표를 좋아했잖아. 그 때는 고작 로드매니저였는데, 나한테 해야 할 작품과, 안 해야 할 작품을 가르치더라니까? 내가 참 그때는 황당해서 뭐라 혼내지도 못하고 넘어갔었어.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다 맞는 말이더라구. 결국 유은하를 자기가 고른 작품으로 끝끝내 우겨서 출연시키더니 대박을 내고 나니까 이후에는 사장님도 은하 작품에는 손을 못 댔다니까? 전부 쟤 손에서 나왔어.”
김상호 대표는 옆에 앉은 조강준에게 마치 자랑스러운 친구를 소개하는 것처럼 떠별렸고 조강준은 거기에 맞춰 조금은 과장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우현을 바라보았다.
“연예계 ‘미다스의 손’이라고 소문이 자자하시던데 소문이 과장이 아니었네요? 만나서 영광입니다.”
“아이고 제가 영광이죠. 조강준 씨 연기는 볼 때마다 감탄이 나옵니다.”
“과찬입니다. 더 잘해야죠.”
그렇게 서로 화기애애하게 인사를 나눴지만 우현은 지여울 피디의 웃음이 살짝 어색한 것을 파악했다. 그녀는 미미한 눈짓으로 탁자위에 놓인 계약서를 가리켰는데 그 계약서에는 아직 누구의 서명도 되어 있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그럼 조강준 씨 계약조건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 정도까지 진행되고 있었습니까?”
아무래도 이야기만 빙빙 돌리다가는 서로 헛 힘만 뺄 것 같아 단도직입적으로 나갔다.
“응? 아... 여기 지여울 피디가 우리 강준이 출연료를 회당 6천에 주겠다고 하네? 우리 강준이 몸값이 전에 비해 천만 원이나 올라서 얼마나 좋은지, 하하하!”
김상호 대표는 조강준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호탕하게 웃었지만 그게 다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출연료는 만족하시는 것 같고... 더 원하는 게 있으세요?”
사실 출연료가 회당 천만 원이나 올랐다고 했지 그게 만족스럽다는 말은 아니었지만 그냥 무시하고 넘어갔다. 가장 중요한 조건이 해결되면 출연료 문제는 자연스럽게 조정될 일이기 때문이다.
“지 피디가 참 여우야. 사람 참 잘 골랐어.”
김상호 대표는 묻는 말에 답하지 않고 동문서답을 했다. 이에 지여울 피디가 난처하게 웃으며 말했다.
“여우라니요, 아하하. 곰이에요, 곰.”
“곰은 무슨... 자꾸 우리 패만 깔려고 하고 자기 패는 보여주질 않아. 보통 아니라니까?”
김상호 대표의 자못 불만스러운 모습에 우현이 피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휴, 본인이 여우면서 남더러 여우라고 하기는... 좋아요. 우리는 타이틀 양보 안 돼요. 엔딩도 딱 절반. 이것만 해주면 나머지는 오케이.”
“그래? 진짜로?”
이 조건을 듣고 분명 문제를 제기할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지 못하게 김상호 대표가 눈을 빛내며 되물어 온다.
놓친 게 있었나? 가슴이 철렁한다.
[263]< 달래고 또 달랜다(5) > 끝
ⓒ 영완(映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