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1]< 달래고 또 달랜다(3) >
“별 거 아니니까 빨리 말해 봐. 나 숨 넘어가겠어.”
“아하하! 알았어요. 그런데 진짜 별 건 아니에요. 지금까지 공 작가 남주들을 한 번 쭈욱 생각해보자구요. 어떤 공통점이 있지 않아요?”
지 피디의 말을 듣고 보니 머릿속을 스치고 가는 게 있었다.
“어? 그러고 보니 조금 이상한 애들이 많았지, 아마?”
“이상하다기 보단 조금 논란이 있었던 배우들이었죠.”
공수민 작가는 주로 로맨스물을 써 왔는데 대부분의 남자 주연배우들이 사고치고 나서 자숙 후에 복귀한 이들이었다. 그런데 왜 그런 배우들만 써 왔을까?
“전에 공 작가랑 같이 작품을 했었는데, 이상하게 우리가 내민 배우를 자꾸 까는 거 있죠.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캐스팅에는 일절 관여를 안 해서 그냥 ‘남주를 꼭 자신이 원하는 배우로 쓰려고 하는 구나’하고 생각했죠.”
지 피디의 얼굴은 꼭 연예인 뒷담화를 하는 것처럼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이다.
“그런데?”
“그런데 전혀 생각지도 않은 배우를 내미는 거예요. 너무 놀라서 이 배우는 우리가 힘들 것 같다고 했더니 펄쩍 뛰면서 자신의 캐릭터를 가장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는 배우라고 바락바락 우기는 거 있죠.”
“지금이랑 똑같네.”
“그 때 보조작가를 우리가 구해줬었는데 제가 그 보조작가를 몰래 불러내서 물어봤었어요. 혹시 그 배우 소속사에서 찾아와서 작가 설득했냐고... 그런데 누가 찾아온 적은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꾸준히 연락하는 사람은 있었대요. 그게 바로 우리한테 들이민 배우였죠.”
“아하... 배우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복귀하고 싶은 마음이 컸을 테고, 공 작가 작품이 무난한데다가 시청률도 평균은 찍어주기 때문에 이것보다 좋은 작품은 없었겠네.”
“그렇죠. 공 작가 입장에서는 젊고 잘생긴 배우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쌓고 싶었던 건지... 뭐, 하여튼 깊게 들어가고 싶진 않고요. 이런 식으로 배우를 푸시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공 작가가.”
더 이상 얘기하다가는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지 피디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 정도만 해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를 수 없었다.
공 작가뿐만 아니라 방송이라는 걸 이용해서 자신의 사심을 채우려는 이들이 종종 있다.
특히 예능이나 드라마 쪽 피디들 중에 그런 경우가 종종 있는데, 예를 들어 여자아이돌에게 손금을 봐준다며 손을 쓰다듬는 경우는 너무도 빈번한 일이고 몇 번 얼굴보고 친해졌다고 은근슬쩍 스킨쉽을 하려는 경우도 있다.
오죽하면 모 개그 프로그램에서 피디도 아닌 일개 고정출연자가 남자아이돌 게스트의 중요부위를 터치하려는 장면이 찍히기도 했겠는가?
“하하, 너무 걱정하지 마. 말이 새 나갈 것도 아니고... 그나저나 이장훈을 공 작가가 포기할 수 있을까?”
“최규식 국장을 압박하셨으니까 공 작가가 억울해서 전화한 거 아니에요?”
“그랬지.”
“그럼 깔끔하게 포기할 걸요?”
“그래? 이 아줌마 성격이 보통 아니던데?”
“후훗, 그래 보여도 공 작가가 얼마나 돈 욕심이 많은 데요. 단 1원 한 푼도 손해 볼 짓 하지 않아요. 고민이야 하겠지만 결국 포기할 걸요?”
“그러면 나야 좋지. 공 작가가 계속 고집을 부리면 나도 피곤해지거든.”
말을 안 들으면 더 강한 충격요법을 써야 하고 그러다보면 어디 한 군데에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아무리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일을 진행한다고 해도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균열이 생길 수도 있기에 애초에 그런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그럼 저는 내일부터 어떤 일을 주로 맡으면 돼요?”
“내일 강상훈 피디에게 인수인계 받겠지만 일단 ‘네플릭스’에서 투자하는 드라마가 있어, ‘카운터’라고... 들어봤지?”
“그럼요. 모를 수가 있나요? ‘네플릭스’가 우리나라에서 처음 투자하는 드라마인데...”
“최은미 작가 만나서 대본 얼마나 나왔는지 체크하고 진행사항 봐서 제작일정 확정지어야 해.”
“흐음... 이게 일반 드라마처럼 제작발표회를 제작 전에 하기가 애매하네요.”
“그렇지. 방영은 제작이 모두 끝나면 시작되니까. 영화처럼 방영 전에 보고회 일정 잡아야 할 거야. 그래도 대본리딩 정도는 진행해야지?”
“그럼요. 그리고 첫 ‘네플릭스’ 투자 작품이라서 오히려 우리 식을 조금 보여줄 필요도 있을 것 같아요. 상징성도 있고...”
“아, 고사 말하는 거야?”
“네. 고사도 지내고 대본리딩도 하면서 왁자지껄하게 소문을 내고 시작하면 아무래도 TV만 보던 시청자들도 인터넷으로 ‘한 번 봐볼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으니까요.”
“좋네. 그리고 최은미 작가가 자꾸 남주 못 정하고 뭉개고 있거든? 늦어도 이번 주 내에 기사 올라갈 수 있도록 도와줘. 최 작가도 지금 사심 채우려고 그러는 건 아니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언급하니 지 피디가 손사레를 친다.
“에이... 최은미 작가는 그런 스타일 아니에요. 얼마나 깐깐한데요. 특히 남주 캐스팅에 관해서는 더 깐깐해요. 아무래도 장르물이다보니까 연기력이나 카리스마가 조금 떨어지면 극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어서 더 그런가 봐요. 예전에 도마뱀이랑 작업할 때는 캐스팅에만 몇 달이 걸렸던 적도 있어요.”
“제발 이번만큼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게 해줘.”
“하핫! 알겠어요. 그럼 내일부터 파인프로덕션으로 출근할게요.”
“좋아, 좋아. 지 피디 오니까 내 마음이 편해진다.”
“부디 그 마음 변치 않았으면 좋겠네요.”
지 피디는 새 일자리를 구했다는 데 안심했는지 올 때보다 얼굴이 더 좋아 보였다.
다음 날, 아침에 출근하니 민주가 난처한 얼굴로 구석진 곳의 회의실을 힐끔거리며 우현을 맞이했다.
“대표님, 어떡하죠?”
“누가 찾아왔는데 그래요?”
“DH엔터 최동진 상무가 아침부터 와 있었어요.”
“아... 일찍도 찾아 왔네. 알았어요. 차는 그냥 냉수로 주세요.”
“알겠습니다.”
회의실에 들어가니 굳은 얼굴의 최 상무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괜찮아요, 앉아요. 어쩐 일로 아침부터 오셨어요?”
“저희로서는 이번에 파인엔터와 진행했던 일련의 일들이 이렇게 진행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무척이나 당혹스럽고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걸 먼저 말씀드립니다.”
길게 늘어놓지만 결국 ‘우리는 열심히 했는데 결과가 좋지 못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손해가 생겼다’는 말이다.
“뭘 그렇게 돌려 말하세요? 어쨌든 우리로서는 석호가 졸지에 새 된 셈이라 ‘비밀연애’에 캐스팅 될 수 있도록 노력 중입니다.”
“흐음... 서브남주를 강석호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시는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이장훈을 엮어버린 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DH의 이해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이장훈이 ‘비밀연애’에 도움이 되는 캐스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스카이엔터 소속 배우가 아니었으면 이런 말을 꺼내지 않았겠죠?”
최 상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쿨하게 인정했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스카이엔터 소속 배우는 곧 우리 배우나 마찬가지입니다.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죠. 대표님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이번 일 처리는 과하셨습니다.”
“최 상무님도 솔직히 말씀하시니까 저도 솔직하게 말하죠. 맞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조금 과하게 처리하긴 했죠. 하지만 애초에 석호를 끌어들이지 않았다면 저도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겁니다. 내 새끼부터 살리고 봐야지, 남의 새끼까지 생각할 틈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도 심했습니다. 멀쩡히 계약단계에 와 있는 캐스팅을 건드리는 건 상도의를 벗어난 거 아닙니까?”
최 상무는 지지 않고 맞부딪쳐왔지만 우현은 코웃음을 치며 무시했다.
“허... 애초에 이런 일을 만들지 말았어야죠. 그리고 지금 고작 이번 일에 대한 항의만 하고 가시려는 건가요?”
“그럼 제가 대표님처럼 대놓고 협박이라도 할 줄 알았습니까?”
우현을 비꼬는 최 상무의 표정은 못 볼 거라도 본 것처럼 인상을 썼다. 하지만 그 표정은 이어진 우현의 말에 더욱 일그러졌다.
“협박이라도 하셨어야죠. 그럼 상무라는 직책을 달고 뭐하는 겁니까? 만약 내가 최 상무였다면 어떻게 해서든 석호를 캐스팅 시키거나 아니면 이장훈의 캐스팅이 흔들리지 않게끔 못을 박았을 겁니다.
어쩌면 반대로 석호를 까버린 이후에 여기 찾아와서 다시는 헛수작을 부리지 말라고 경고했겠죠. 그런데 지금 최 상무님은 뭘 하고 계시죠?”
“...”
최 상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솔직히 내가 최 상무가 아니라 윤 대표였다면 일을 이 지경까지 오게 한 최 상무를 그냥 두지는 않았을 겁니다. 인정하세요?”
“...”
이번에도 그는 입을 열지 못했다.
“잘 듣고 혼자 판단하든 윤 대표와 상의하든 하세요. 나는 석호를 ‘비밀연애’에 캐스팅 시킬 거고, 이장훈은 까버릴 겁니다. 그게 싫으면 대안을 내놓으세요. 일이 안 될 거면 아예 손대지 마시고, 손을 댔으면 일이 되게끔 하시라구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우현의 말에 한참을 말없이 고민하던 최 상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 일은 잊지 않을 겁니다.”
“저 역지 잊지 않을 겁니다. 앞으로 DH엔터가 어떻게 일처리를 하는지 똑똑히 지켜보죠. 이 바닥에서 삼류 소리 듣기 싫으면 잘 해야 할 겁니다.”
마지막까지도 경고를 날리는 우현을 노려보던 최 상무는 쾅 문을 닫고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어머, DH엔터 최규식 상무 아니에요?”
회의실을 나와 대표실로 가려는데 아래층 파인프로덕션에 있던 지여울 피디가 올라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인수인계는 벌써 끝났어?”
“사실 어제 인수인계 받았어요. 집에 가봤자 할 일도 없고, 괜히 몸만 늘어지는 것 같아서 근처 커피숍에서 혼자 놀고 있는데 마침 강 피디님을 만났지 뭐예요? 그래서 만난 김에 여차저차 인수인계 받았죠. 그래서 아침에 최은미 작가 미팅 잡아서 말씀드리려고 올라왔는데... 왜 저렇게 화가 났대요?”
“아, 이장훈 캐스팅 때문에 온 거였거든.”
“으이그... 최 상무가 우리 대표님 성격을 몰랐나보구나.”
“하하하! 역시 나 알아주는 건 지 피디밖에 없네.”
“아하핫! 제가 대표님하고 일하면서 종종 깜짝 놀라곤 했거든요. 평소에는 사람 좋게 넘어가다가 몇몇 부분에서는 칼같이 잘라내시잖아요. 아마 최 상무도 대표님을 쉽게 봤나 봐요. 잠깐... 최규식 상무는 DH엔터고 이장훈은 스카이 엔터인데? 설마... 지금 떠도는 소문이 진짜예요?”
지여울 피디는 DH엔터가 스카이엔터를 합병하려고 진행 중인 걸 아직 소문으로만 들었던 것 같다.
“맞아. 민상욱이 우리 배우였던 거 알지? DH에서 민상욱 소송을 취하시켜달라고 했었어. 그 대가로 석호를 ‘비밀연애’의 서브남주로 꽂아준다고 해서 일이 여기까지 왔네. 어쨌든 앞으로 DH엔터랑 마찰이 있을지도 모르니 그렇게 알고 있고.”
“아... 강 피디님이 말했던 분란이 이거였구나.”
“강 피디는 자세히 말 안했어?”
“지금 민감하게 돌아가는 일이 있는데, 이건 대표님께 직접 듣는 게 이해가 빠를 거라고 하더라구요. 자신이 이야기하면 잘 못 파악할 수도 있다고...”
“그럴 수도 있겠네. 강 피디는 순수하게 제작 업무에 대한 건 잘 아는데, 이런 일은 잘 모르더라구. 특히 외국 수출업무를 주로 맡아오다 보니까 이런 일은 처음인가 봐.”
“어쨌든 일이 잘 마무리 됐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오늘 최은미 작가님한테 남주 최종 마무리 하러 찾아가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글쎄 작가님이 아예 캐스팅 미팅 잡았다고 하대요?”
[261]< 달래고 또 달랜다(3) > 끝
ⓒ 영완(映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