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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 달래고 또 달랜다(2) >
작가를 바꾸지 않는 이상 시청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부분이라면 캐스팅 말고 더 있겠는가?
“주연 남주를 바꿔봅시다.”
“이장훈을 바꾸자고?”
‘비밀연애’의 남자 주인공으로 캐스팅된 이장훈은 조각같이 생긴 미남자는 아니지만 개성 있는 마스크에 진지함과 코믹함을 겸비한 배우다.
“국장님, 우리 솔직하게 까놓고 말해보자구요. 이장훈이 요 몇 년간 방송에 못 나온 이유가 뭔지 아시죠?”
“그거야...”
한창 잘 나가던 이장훈은 몇 년 전, 룸싸롱에서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자숙한다는 이유로 한동안 얼굴을 비추지 못했다.
내용을 보면 이장훈이 불법을 저지른 건 아니다. 단지 내용이 조금 추잡스러웠다는 게 문제였는데...
“드라마 주 시청자 층은 여자인 거 아시죠? 지금 여자들이 이장훈에게 감정 이입이 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친구들과 룸싸롱에 갔다가 자신의 파트너와 한창 스킨쉽을 하던 와중에 이장훈의 친구가 이장훈의 파트너를 터치했던 게 문제의 발단이 됐다. 이장훈의 파트너는 그게 불만이었지만 당시 이장훈은 아무렇지 않게 넘겨버렸고 결국 이장훈의 파트너는 이장훈의 친구를 성추행으로 고소하고 만다.
나중에 이장훈이 혐의 없음으로 넘어가게 됐지만 당시 사건을 알고 있는 여성들은 이장훈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게 됐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났고 얼마 전에는 케이블 드라마도 잘 찍었잖아?”
“그랬죠. 그런데 그 드라마가 비록 표절논란이 있긴 했지만 상당히 잘 만든 드라마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 때 나왔던 말이 남자 주인공이 이장훈만 아니었다면 당시 평균 시청률인 3%보다 최소 두 배 이상은 나왔을 거라고 합니다. 저 역시 그 의견에 동의하구요.”
“흐음... 한 번 생각해보지.”
이미 기사까지 나간 주인공을 바꾸기에는 다소 부담이 있을 수밖에 없다. 고민이 되는 건 당연지사.
여기서 물러나면 나중에 딴 소리를 들을 수도 있기에 쐐기를 박았다.
“지금 월화드라마 시청률 2% 나오죠? 그게 시청률이 그것 밖에 안 나올 드라마라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MBS 드라마국의 가장 아픈 손가락이라면 단연코 월화드라마인 ‘21세기 우리들’이다.
특히 한 때 최고의 톱스타라고 일컬어졌던 최수지를 원톱으로 세운 드라마라 이런 시청률은 상상할 수도 없었을 거다. 하다못해 아이돌을 주연으로 세워도 그것보다 높은 시청률은 장담할 수 있을 테니까.
최규식 국장도 월화드라마 이야기만 나오면 어디 가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인데, 그래서인지 우현의 입에서 월화드라마라는 단어가 나오자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해진다.
“지금 나 놀리는 건가?”
“놀리긴요. 솔직히 옛날이나 최수지지 지금은 최수지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녀는 예전에 시청률 안 나오고 힘들다면서 촬영장 뛰쳐나갈 때부터 시청자들에게 더 이상 스타가 아니었어요. 그냥 연예인이었을 뿐이지.
그런 최수지를 원톱으로 세워 놓으니 스토리를 떠나서 시청자들이 거부감을 갖는 거 아니겠습니까? 똑같은 우를 범하시면 안 되죠.”
금방이라도 듣기 싫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것만 같던 최 국장은 엉덩이를 들썩들썩하다가도 결국 의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럼 김 대표라면 누가 좋겠어?”
“캐릭터에 맞춰서 잘 고르면 될 겁니다. 여기서 제가 누구를 찍어주면 정말 일이 커지지 않겠어요? 그냥 논란 없고 이미지 좋은 연기자로 하세요.”
더 캐물으려던 최 국장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잘 알겠네. 식사라도 하고 갈 건가?”
“국장님 저랑 같이 먹으면 체하지 않으시겠어요?”
“솔직히 지금도 속이 그리 편하지는 않아.”
“그럼 다음에 드라마 잘 되면 그 때 같이 드시죠. 그럼 전 회사로 들어가 좋은 결과가 나오길 기대하겠습니다.”
“그러지. 그럼 수고해.”
그리 좋은 분위기의 대화는 아니었고 최 국장도 자신을 그리 좋게 보지는 않았지만 결과는 원하는 대로 나올 것이다. 여기서 또 실패하게 되면 자리를 보전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당장 다른 지상파 국장들에 비해 나이도 가장 많지 않은가?
국장이 먼저 나가고 회의실을 빠져나가는데 마치 미어캣이 고개를 쳐드는 것처럼 직원들의 고개가 일제히 들려 우현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 오갔는지 궁금했을 거다.
그들 하나하나에게 눈을 맞추고 웃으며 인사했다.
“그럼 수고하십쇼! 수고하십쇼!”
아마 자신이 여기서 했던 말이 이장훈 소속사의 귀에 들어갈 게 분명하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절대 피했을 상황인데 웃기게도 이장훈의 소속사는 DH엔터에서 인수하려고 준비 중인 스카이엔터다.
아마 이장훈의 소속사가 스카이엔터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신랄하게 까지 못했을 거다.
사무실에 돌아오니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와 있었다.
“이게 누구예요? 지여울 피디가 여긴 웬일이에요?”
그녀는 일반인치고 원체 미인이었지만 지금은 더 예뻐 보였다. 한창 일을 할 때는 다크서클과 푸석한 피부였지만 오늘은 잘 꾸미고 와서 그런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안녕하세요. 저 불청객 아니죠?”
“그럴 리가요. 앉아요. 그런데 강상훈 피디한테 얼핏 듣기로는...”
“어? 설마 들으셨어요?”
“정확하지는 않아요. 그냥 회사를 관둘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어서...”
“하하, 맞아요. 얼마 전에 ‘도마뱀 미디어’ 그만 뒀어요.”
“왜요?”
“하는 일은 많은데, 대우가 너무 열악해서요. 열정페이만 강조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
지여울 제작피디 정도면 최고 대우를 받아도 될 것 같지만 임원이 아닌 이상 아무리 일을 잘 해도 급여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특히 예술 계통에서 근무하는 쪽이 심하다.
“이야... 그럼 우리 회사 오겠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되는 거죠?”
파인프로덕션을 인수하고 나서 안 그래도 부족한 인력이 더 심하게 부족해졌다. 제작 일선에서 일하는 스태프는 영입하기 어렵지 않지만 제작을 총괄할 수 있을 정도로 노하우와 인맥이 쌓인 고급 인력은 쉽게 영입할 수 없었다.
“파인엔터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말을 들어서...”
그녀는 민망한지 얼굴을 살짝 붉혔다. 직원을 채용한다는 이야기만 듣고 자신이 직접 찾아온 게 못내 부끄러운 모양이다.
“잘 왔어요. 그래서 이렇게 쫙 빼입고 오셨구나. 딱 면접 복장이었네.”
“아하하!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해요.”
“대우는 강 피디에게 들었죠? 안 그래도 강 피디가 할 일이 많은데, 국내 제작업무까지 지금 손대고 있는 상황이라 나도 조금 미안했거든. 앞으로 해외 업무는 강 피디가 맡고 국내 업무는 지 피디가 맡으면 될 것 같아요.”
“이제 입사하게 되면 말 놓으세요. 제가 나이도 어리고 하니까...”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고. 일단 오늘은 들어가 쉬고 내일부터 나와서 강 피디한테 인수인계 받아서 일 시작해보자.”
“면접은 끝난 거예요?”
“우리 사이에... 라고는 말하기 그렇지만 사실 일 몇 번 해봐서 서로간의 스타일 잘 알잖아? 지금까지 일해온 걸 아는데 면접을 따로 볼 필요가 있겠어?”
“아휴... 그렇게 띄워주시니까 더 부담스러운데요.”
“그럼 잘 해. 그러면 되지. 아, 점심 안 먹었지? 딱 점심시간인데, 어때? 근처에 생태찌개 잘 하는 집 있는데.”
“어? 마침 어제 술을 좀 해서... 아하하!”
“해장으로 딱이지? 좋아, 좋아. 가자구.”
지여울 피디와 점심을 먹고 들어온 직후 ‘비밀연애’의 공수민 작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빨리 전화를 주셨습니까?”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요?”
“뭘 말입니까?”
“강석호를 꽂기 위해 이장훈까지 까야겠냐구요. 이건 나가도 너무 나간 거 아닌가요?”
그녀는 꽤나 흥분했는지 중간에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보통 여자들이면 이장훈의 추문을 들은 이후 다들 싫어하게 되는데 그녀는 그런 것 같지 않아서였다.
“그런가요? 그런데 미안하지만 난 이장훈이 그 드라마를 하든, 말든 상관없습니다. 단지 국장님께 정말 시청률이 걱정이라면 다른 캐스팅에 문제가 없는지 그것부터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씀드린 것뿐이죠.”
“그게 이장훈을 까라는 말과 뭐가 다르죠? 장훈이는 충분히 자숙하고 더 열심히 일할 준비가 돼있는 친구예요.”
“흐음... 그렇군요. 제가 미처 몰랐습니다. 그럼 이장훈이를 캐스팅 하시죠. 저도 국장님을 다시 만나 설득해보겠습니다.”
물론 그럴 생각은 없다. 보아하니 이장훈과의 개인적인 친분으로 캐스팅을 한 것 같은데, 그런 생각으로 작가 짓 하면 안 된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다.
“허... 지금 저랑 장난해요?”
“아니, 국장님께 다시 설득해주겠다는 데도 뭐가 또 문젭니까?”
“진심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아요?”
적당히 받아주다 끊으려했는데 아무래도 안 될 것 같다.
“공 작가님. 내가 주제 넘는 말 같아서 안 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한 말씀 드려야겠네요. 작가님 돈으로 작품하는 겁니까?
이거 회당 순수제작비만 몇 억이 드는 작품이에요. 이런 작품을 작가님 개인 인맥과 취향으로 그런 논란을 가진 배우를 캐스팅하겠다고 억지 부리는 것 역시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그건... 장훈이도 충분히 반성하고 있고...”
“반성 열심히 하라고 하세요. 누가 반성 안 한다고 했습니까? 중요한 건 이장훈이라는 친구는 직업이 연예인이라는 거예요.
연예인은 다른 어떤 직업보다 이미지가 중요하죠. 본인이 본인 이미지 관리를 제대로 못 해놓고 시청자들에게 그래도 연기는 잘하는 배우라고 주입시키고 싶은 겁니까?
그러다 망하면요? 내 돈 아니니까 아무 상관도 없나요? 작가님은 그렇게 책임감이 없습니까?”
우현이 강하게 밀어붙이자 그녀도 말이 꼬이는지 더듬거렸다.
“그, 그게 아니라! 오래전 일이고, 지금 캐스팅... 아니, 지금 장훈이가 맡은 캐릭터가 딱 어울리기도 하고...”
“어울리긴 뭐가 어울려요? 룸싸롱에서 친구한테 파트너 공유하다가 졸지에 성추행범 친구 된 거 모르세요? 그런 친구가 한 여자만을 지고지순하게 바라보는 쉐프에 어울린다고 진심으로 생각하세요? 글은 잘 쓰시면서 왜 자기 작품을 망치려고 드시지?”
“지금 내가 내 작품을 망치고 있다는 말이세요?”
“맞아요. 잘 생각해보세요. 이장훈이라는 친구를 어떤 감정으로 캐스팅한 건지. 정말 작품에 도움이 되고 이 작품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만한 캐스팅인지, 아니면 작가님 개인 선호도로 밀어붙인 캐스팅인지 말이에요.”
이 정도 했는데도 못 알아먹으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그만 전화를 끊어버렸다. 같이 식후 커피를 마시던 지여울 피디가 궁금했는지 슬쩍 운을 띄운다.
“이장훈이면 지금 MBS 금토드라마로 들어가는 ‘비밀연애’ 말하는 거예요?”
“응, 맞아. 거기에 우리 석호가 서브남주로 들어가면서 조금 마찰이 생겼어. 캐스팅을 하네, 못하네 그러기에 이장훈 캐스팅까지 걸고 넘어가니까 반발하네.”
“후훗. 역시 대표님 날카롭네요. 공 작가랑 이장훈 친하잖아요.”
확실히 이 바닥에 발도 넓고 아는 것도 많은 지 피디는 둘의 친분까지도 알고 있었다. 이래서 다들 경력자를 선호하는 건가?
“그랬어? 나는 짐작만 하고 있었지.”
“공 작가가 남배우 킬러이긴 하죠.”
미묘한 웃음을 짓고 있는 지 피디는 뭔가 더 알고 있는 것 같다.
“뭐야, 진짜 연하 잡아먹는다는 말은 아닌 것 같고...”
“뭐, 엄청난 건 아닌데...”
[260]< 달래고 또 달랜다(2) > 끝
ⓒ 영완(映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