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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8] 얼핏 들은 이야기(4)
강상훈 피디는 우현의 자신감이 쉽사리 이해되지 않았다. 파인엔터가 이 바닥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별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캐스팅을 좌지우지 할 만큼 영향력이 대단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능하겠습니까?”
“글쎄요. 일단 ‘비밀연애’ 제작진들한테 조용히 접촉해서 누가 참견해서 흙탕물을 만든 건지 알아봐주세요. DH에 말이 들어가지 않도록 조용하게요.”
사실, 우현으로서는 확신을 가질 수는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언제는 무조건 되는 일만 했던가?
석호의 오디션 일정은 금요일 저녁 5시. 그 전에 결론을 봐야 한다. 일단 오디션을 보고 나면 해당 오디션에 참석한 드라마국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눌 거다.
거기서 자신들의 의견을 교환하고 말을 맞출 텐데 오디션을 끝내고 아무리 노력해봤자 뒤집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애초에 오디션을 보기 전, 석호에 대한 불신을 지우고 이야기를 원점으로 돌려놔야 오디션을 보고 나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아니, 석호에 대한 유리한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게 맞다.
“혹시 대표님이 움직이는 걸 알면 DH에서 아예 손을 놓을까봐 그러십니까?”
“잘 모르겠어요. 아예 손을 놓을지, 아니면 더 안 되게 방해를 할지… 예측이 안 되니 그냥 모르게 진행하는 게 좋겠네요.”
“흐음… 대표님은 혹시 DH엔터 쪽에서 자신들이 못한다고 생각한 걸 뒤집으면 더 곤란해질까봐 방해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냥 짐작일 뿐이에요. 아닐 수도 있구요. 그래서 잘 모르겠다고 한 겁니다. 어쨌든 하루 만에 문제를 해결해 을 수도 있으니 지켜보자구요.”
“일 힘들지 않게 꼭 해결해 왔으면 좋겠네요.”
하지만 우현과 강 피디의 바람과는 달리 하루가 지나도 별다른 연락을 받지 못했다. 기다림을 참지 못해 최 상무에게 전화를 거니 마치 빚을 진 것처럼 난감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아휴, 대표님. 어쩐 일로….”
“제가 전화 왜 했는지 모르십니까? 그냥 윤 대표님한테 전화할까요?”
윤 대표에게 전화하려다가 최 상무에게 전화한 것은 혹시 목소리가 높아질까봐서였다 아무리 일이 잘못 됐다고 해도 일부러 엿 먹이려는 게 아니었다면 서로 싸워봐야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다만 DH엔터의 일처리에 의문이 생겼기에 앞으로 신뢰감 없는 회사로 전락한 것이 아마 스스로에게 상처로 남았을 거다.
“아, 아닙니다. 대표님, 정말 죄송하지만 그냥 거래는 없던 것으로….”
결국 DH에서는 두 손, 두 발 다 들어버렸다. 이제 와서 거래를 더 지속하기 위해 매달리는 것도 구차하다는 걸 아니 깔끔하게 상욱이의 소송 취소를 포기해버린 것이다.
어쩌면 지금 이 판단이 가장 적절한 결정일지도 모른다. 자칫하다가 이상한 소문이라도 퍼지는 날엔 이 바닥에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닐 것이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알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번 일 때문에 손해 보신 부분은 다음에 기회가 생기면 최선을 다해 도와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뭐, 그러시던가요.”
그렇게 면박을 주고 전화를 끊은 우현은 곧바로 옷을 챙겨 입고 사무실을 나가 홍대 쪽으로 향했다
“공수민 작가랑 계속 통화 시도해봤는데 모르는 번호라서 그런지 어떤 전화로 걸어도 받지를 않습니다.”
차 안에서 강상훈 피디와 전화로 대화를 나눴다. 어디 사는 줄은 알아냈는데 도무지 연락을 받지 않아 약속을 잡을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됐어요. 지금 가는 중이니까 일단 공 작가 말고 MBS 드라마국장하고 약속 먼저 잡아요.”
“알겠습니다.”
1시간이나 걸려 합정동에 위치한 대형 주상복합 아파트에 도착한 우현은 무작정 주차장에서 공 작가가 거주하는 호수의 벨을 눌렀다.
“누구세요?”
차분한 여성의 목소리. 공수민 작가는 아직 만나본 적 없기에 목소리의 주인공이 공 작가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파인엔터테인먼트 김우현 대표입니다.”
찾아온 사람이 예상 밖이었는지, 아니면 잘 못 들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한다.
“네? 누구시라구요?”
“파인엔터 김우현입니다. 만나서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파인엔터에서 왜 저를 만나러 오신 거죠?”
목소리의 주인공이 공수민 작가가 맞나보다. 이렇게 스스로 확인시켜주니 잘 됐구나 싶었다.
“석호 관련해서 이야기를 좀 하고 싶어서요.”
“죄송한데 캐스팅 관련해서는 할 말이 없어요. 그만 돌아가세요.”
그녀는 바로 인터폰을 끊어버 렸다.
“뭐야, 이 여자. 영원히 갑인 줄 아나보네? 어이가 없어서 정말… 하하하, 참 나….”
어이가 없어 헛웃음까지 나왔다. 열은 받지만 안 왔으면 몰라도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는 없다. 다시 벨을 눌렀다.
처음에는 받기 싫다는 듯 계속 무시하다가 2분여 동안 계속 벨을 누르자 그녀가 다시 받았다.
“이러시면 정말 곤란해요.”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시죠. 이 바닥에서 언젠가는 만날 사람 아닙니까? 저 주차장에서 세워놓고 그냥 보내시려구요? 앞으로 파인엔터 소속 배우랑 평생 작품 안 하실 겁니까? 저 그냥 갈까요?”
그제야 그녀도 상황을 파악했는지 마냥 우현을 세워둘 수는 없다는 걸 느꼈나보다. 귀찮은 듯 한숨을 쉬며 문을 열어줬다.
순간 열린 문을 들어서며 그냥 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존심 상하는 걸 떠나서 똥인지 된장인지 개념도 안 잡힌 작가와 일한다는 게 영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이다.
일단 그녀가 사는 층으로 올라가 벨을 누르니 이번에는 순순히 문을 열어준다.
“잠깐 기다려주시겠어요?”
우현을 맞아들인 사람은 20대 중반의 젊은 아가씨. 아무래도 보조작가인 듯싶다. 그녀가 응접실로 이끌었고 따뜻한 차를 내어 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안방에서 거실로 나왔다.
쌩얼이 부담스러운지 알 없는 두꺼운 뿔테안경을 쓰고 급하게 옷을 갈아입고 나온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차분하지만 무언가 찬바람이 쌩쌩 부는 목소리다. 확실히 작가는 배우에 비해 갑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제 파인엔터가 배우 매니지먼트만 하는 회사는 벗어났다. 더 이상 작가에게 을이기만 하던 때는 지났다는 뜻이다.
그녀도 우현이 그걸 지적했었기에 더는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하고 들여보냈던 것이다.
“얼굴 뵙기가 참 힘들었습니다?”
“약속하지 않은 상황이니 누구라도 쉽게 만남을 허락해주지 않겠죠. 특히 이런저런 소문이 들리는 상황이니까요.”
강상훈 피디에게 듣기로 석호를 가장 싫어하던 사람이 둘인데 하나는 작가고 하나는 드라마국장이라고 했다.
DH엔터 쪽에서는 작가가 거부하는 건 충분히 예상했다고 했다. 그래도 충분히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데 생각밖에 드라마국장이 태클을 걸고 넘어와 손을 쓸 수 없는 지경까지 왔다고 들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드라마국장의 마음만 돌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둘의 마음을 다 돌려야 석호가 캐스팅을 낙점 받을 수 있는 상황이다.
“그 이런저런 소문이 무척이나 부당하다고 생각하는가 봐요?”
“당연하지 않겠어요? 대표님이 제 입장이라면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지는 않을 걸요?”
사실 그건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분고분하게 받아줄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박찬혁을 미시는 거예요?”
오디션을 볼 세 명의 인물 중 한 명이 박찬혁이다. 나머지 한명은 뮤지컬 출신으로 아직 드라마에 얼굴을 내민 적이 없는 친구니 사실상 박찬혁을 낙점해 놓은 상황이라고 봐도 된다.
박찬혁은 요즘 대세인 모델 출신 배우로 작년에 대박난 드라마에서 처음으로 얼굴을 알린 배우다. 단역으로 나왔었지만 너무 인상 깊은 마스크라 단박에 조연급으로 올라선 친구다.
이 업계, 특히 남자배우 중에서 모델 출신들이 많아진 이유는 일단 비율이 좋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중에 남성다운, 선 굵은 마스크를 가진 이들이 배우 업계에 뛰어드는 경우가 많다.
“와… 정보력이 보통 아니시네요? 맞아요. 박찬혁 정도면 괜찮은 서브남주가 되겠죠.”
그녀 스스로도 민망한지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박찬혁은 충분히 매력적인 연기자지만 전작에서 연기력 논란을 일으켰던 친구이기 때문이다.
사실 모델 출신 배우들이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데뷔 초반에는 연기력이 조금 부족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애초에 연기 수업을 받아오지 않았기에 오히려 그게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가요? 그럼 이거 좀 보실래요?”
우현은 준비해 간 노트북을 꺼내 열었다. 그리고 바탕화면에 띄워놓은 동영상을 재생시켰다.
뭔가 엄청난 걸 틀어준 건 아니다 그간 석호가 영화 단역과 드라마 조연으로 출연하며 촬영한 메이킹 필름이다.
석호의 연기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평소 모습이 담겨 있어 긴장하며 보는 오디션보다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공 작가도 이왕 틀어진 영상이니 의자에 앉아 찬찬히 동영상을 시청했다. 이미 전날에 10분 정도의 분량으로 편집한 영상이기에 내용은 군더더기 없고 딱 평가하기 좋았다.
“좋네요.”
좋을 수밖에. NG내는 장면도 넣었지만 충분히 석호의 매력을 어필할 수 있는 장면인데다가 가장 괜찮은 장면들로 내용을 꾸몄기 때문이다.
마스크로도 박찬혁에 밀리지 않고 연기력은 더 좋으니 키만 조금 작은 걸 빼면 결코 밀리지 않는다.
“그렇죠?”
“네.”
거기서 더 할 말이 없다는 그녀의 얼굴. 좋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뽑아줄 수는 없다는 분위기다.
당연히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작가의 자존심 상 설사 좋다고 인정한다고 해도 마음을 바꾸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감상이 생각보다 건조하시네요?”
겉으로는 섭섭하다는 듯 이야기했지만 어차피 동영상은 정말 진실된 마음으로 석호를 추천하러 왔다는 구실일 뿐이었기에 아무렇지도 않았다. 어차피 이렇게 나올 것도 예상하고 있었고….
“목소리 좋고 마스크 깔끔하네요. 사실 제가 아직 강석호 씨를 제대로 본 적이 없어서요.”
“그럼 이번 기회에 제대로 보는 게 좋겠죠. 아무런 선입견 없이 말이에요.”
“그렇게 할게요.”
쿨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게 캐스팅을 하겠다는 뜻이 아님은 둘 다 잘 알고 있다.
“감사합니다. 공정하게 봐주시면 저야 바랄 게 없죠. 아, 그리고 제가 얼핏 어디서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우현은 자리에서 일어서다가 마지막에 다시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무슨 이야기요?”
“아… 이것 참… 말씀드려도 될지 모르겠네요. 저야 순수한 마음으로 말씀드리는 거지만 작가님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기도 하고… 그리고 이 이야기를 제가 했다는 말이 새 나가기라도 하면 저만 곤란해질 것 같은데….”
“그럼 하지 말아요.”
의외로 공 작가가 쎄게 나왔지만 눈가를 씰룩이며 이어진 우현의 말에 다시금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알겠습니다. 뭐… 작가님 정도면 충분히 잘 헤쳐 나가실 테니까요.”
“저, 저기… 무슨 말인데 그렇게 뜸을 들여요?”
“후음… 그럼 저한테 들었다는 말 하지 마세요. 약속하면 말씀드리죠.”
“그래요, 약속할게요.”
“여기 ‘비밀연애’ 여주 맡은 송유라 말인데요….”
서브남주도 아니고 뜬금없이 주연여주를 언급하는 우현의 말에 공 작가의 미간이 찌푸려지기 시작했다.